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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여성이 행복해야 포항 사람이 행복하다

 

포항 여성이 행복해야 포항 사람이 행복하다




여성노동자


  어느 직장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백여 명이 넘는 가입 대상자 중에 겨우 세 사람만으로 조합이 명맥을 유지한다. 사용자의 탄압에 바로 맞설 용기가 없는 대다수는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기만 한다. 물론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술자리에서는 조합원들의 기개와 헌신성, 그리고 신성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거품을 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가끔 후원회비와 투쟁기금을 몰래 건네주는 이도 있다.

  이 직장에는 여성이 지극히 적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전에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여성도 많았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는 결혼을 이유로 여성 직원을 함부로 내쫒지는 못했다. 비록 노동조합에 여성 조합원이 한 명도 없지만 그랬다. 결혼과 함께 해고 위기에 빠졌던 여성이 노동조합에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 노동조합에서는 상급단체에 보고하여 함께 여성 노동자의 해고를 막기 위해 나섰고, 당시 포항여성회와 여성부 등에도 다리를 놓아주어서 결국 해고를 막았다. 그 여성은 노동조합에 감사했다.

  이 직장엔 남성이 90% 이상 차지하다보니, 한동안 여성 화장실조차 없었다. 소수자인 여성은 관리자에게 감히 여성 화장실을 만들어달라는 요구조차 못했다. 윗사람들 눈밖에 나서 좋을 게 없다는 여성들의 의견이었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이 나서서 여성 전용 화장실을 만들어주었다. 여성들은 노동조합에 감사했다.

  몇 년이 지나도 노동조합원은 한 명밖에 늘지 않았다. 그만큼 사용자 측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과 각종 음해가 심했다. 결국 상급단체 일을 하던 한 조합원을 말도 안되는 사유를 들어 해고하였다. 사용자는 조합원을 해고하기 위해 비조합원들을 동원하였다. 비조합원들은 ‘사사건건 원칙대로’ 하기를 주장하는 한 조합원 때문에 최고 관리자가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직원 사이 위화감을 조성하므로 노동조합원을 중징계하라는 연서명을 했다. 이 서명에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았던 여성 노동자들도 모두 참여하였다. 결국 소수자인 여성들은 자신들보다 더 열세인 노동조합에 대해 함께 칼을 잡고 내친 일에 나선 것이다.

  제 4회 포항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알게 될 거야>는 비정규직 여성 교육노동자(계약직 교사)가 중학교 여학생을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게임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나마 자기보다 더 힘없는 여학생을 쥐꼬리만한 권력으로 억압하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은 교사보다 낮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밀리고, 여성은 남성에 억눌리는 게 현실이다. 영화는 가상의 극으로 구성되었지만, 위에서 말한 이야기는 2007년 현재 포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실화다. 영화보다 현실은 더 슬프고 극적이다.


  포항을 벗어나보자. ‘이 랜드 그룹은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즈음하여 80만원 월급으로 10년 넘게 부려먹은 비정규직 노동자 등 1천여 명(주로 여성 노동자)을 마구잡이로 해고하였다. 특히 비정규직 발효 시점을 역산하여 남은 기간에 따라 계약을(심지어 일주일 혹은 하루 계약까지 했다) 맺고 이를 해고의 합법적인 근거로 제시하는 악덕 기업주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그룹 회장은 교회에 헌금으로 130억 원을 갖다 바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랜드 상황을 아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교육노동자 ㅅ 의 글 중에서)

  이런 상황에서 여성주의(페미니즘)는 이런 생존의 위기에 처한 노동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랜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돕기 위해 ’남편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이 함께 풀어갈 때,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연대하여 함께 동참할 때, 학부모, 교사, 학생들이 주체가 될 때 해결되는 법이다.


  이주 여성

  

 ‘베트남 여성,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현수막은 농촌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래카드다. 이 플래카드는 지난 6월 미국 국무부의 ‘인신매매보고서’에 공개되어 한국의 수많은 국제 결혼 부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결혼 중개업자가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동안 막상 국가나 시민단체는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충남 당진군의 사례는 이런 불유쾌한 기사에서 모처럼 희망을 찾게 해준다.

  <이주여성이 만드는 여성영화제작 워크숍>은  당진군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자들을 모아서 미디어 교육을 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감독, 연출, 촬영, 출연해서 만들게 된 작품이다. 상업적 제작 시스템을 거부하고 아주 적은 예산으로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은 독립영화(인디 다큐)를 만든 것이다.

  이들의 짧은 작품을 보면서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지에서 꿈(파랑새)을 찾아 머나먼 이국 땅에 온 여성들이 겪었던 외로움과 문화적 갈등, 소통의 부재를 절감한다. 심지어 십년 이상 한국 생활을 하면서도 아직 한국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도 있다. 이주 여성들 대부분은 농촌 지역에서 집에만 갇혀 있는 일이 일상이다. 우리는 동남아시아 인과 맺는 국제 결혼에 대해서 비판만 하고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하지는 않았을까?

  비록 서울여성영화제에서 기획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후원하여 짧은 기간에 만든 인디저널리스트 교육이지만, 그 결과의 반향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교육 기간 내내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비슷한 이주 여성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웃고 울며 행복하였다. 게다가 낯선 컴퓨터를 배우고 영화까지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생애 최고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동한 한국을 원망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을 이주여성들에게 작으나마 보람과 긍지를 가지게 한 기획이라고 보인다. 환상을 쫒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타개해 나갈 적극적 의지를 길어주는 무기가 되었다.


포항, 그리고 여성


  포항에는 이주 여성이 없을까? 성매매와 관련된 한터 여성들이 하고 싶은 얘기는 없을까? 밤늦도록 자율학습에 시달리고,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고민은 무엇일까? 이른 아침 통근열차에 짐을 싣고 번개 시장에 농산물을 팔러 나오는 농촌 할머니들의 삶의 애환은? 사랑을 찾아 밤거리, 나이트 클럽을 찾는 중년 여성들의 외로움과 하소연을 들어줄 이는 없을까?

   이번 포항여성영화제의 주제가 <그녀․ 우리․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제에 참여하면서, 다음 영화제에서는 좀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지역 여성 얘기보다 <포항 여성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였다. ‘포항 여성’의 얘기를 통해 포항이 바뀌고, 포항이 바뀌므로 세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성희롱 예방 교육용으로 만든 <화기애애>는 중고등학생들이나 노동조합, 직장, 단체에서 상영하고 토론을 겸한 교육을 하면 좋을 것이다. <생리해서 좋은 날>도 여성은 물론 여성과 함께 살아야 하는 남성들이 보고 여성에 대한 이해와 존중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게 하는 영화다. <애니메이션 모음>은 여성주의 시각에서 만든 독특한 애니메이션으로 포항에서 접하기 어려운 영상을 소개한 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잘돼 가? 무엇이든>과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도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을 재미있는 극으로 만들어서 볼만 했다.

  네 번째로 맞는 포항여성영화제가 해가 거듭할수록 내용과 진행 면에서 진보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포항여성회 활동이 그만큼 지역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주여성센터 활동이 활발해지고 한미 FTA 반대 운동, 지역의 노동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등 진보적 여성운동에 앞장서고 있으므로 포항 시민들이 가진 기대는 더 클 것이다. 첫날 개막식에 참여한 여러 단체들의 관심은 그것을 반영한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을 기대한다. 포항여성영화제를 위해 노력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포항 여성이 행복해야 포항 사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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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찾아오는 손님들

 
  밭을 가꾸다보면 내가 씨 뿌리고 심고 가꾸는 건 식물인데, 막상 밭에는 식물뿐만 아니라 많은 동물들도 함께 서식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작은 텃밭에도 많은 손님들이 찾아온다. 씨를 뿌리면 제일 먼저 새들이 날아온다. 까치와 참새, 비둘기가 제일 눈에 잘 띈다. 까투리와 장끼도 용케 땅 속에 숨어 있는 맛있는 씨앗을 찾아낸다.
  채소 잎들이 나기 시작하면 작은 애벌레와 곤충들이 많아진다. 배추를 갉아먹는 애벌레가 눈에 잘 보인다. 케일에도 진드기와 벌레들이 많이 모여든다. 그러다보니 개미와 무당벌레도 무척 바삐 이곳 저곳 다닌다.
  고추이파리를 돌돌 말아 숨어 있는 벌레도 있다. 물론 땅 속에는 많은 지렁이와 굼벵이가 숨어 있고, 공벌레는 그늘 습한 곳에 어김없이 몸을 숨기고 있다. 요즘처럼 습기가 많은 장마철엔 민달팽이가 많이 나타난다.
  내가 수확하려고 하는 야채를 야금 야금 갉아먹는 녀석들이지만, 이들을 잡기 위해 아직까지 약을 친 적은 없다. 다만, 눈앞에 보이는 녀석은 내 손에 걸리면 짧은 일생을 마감해야 한다. 여러 종류 벌도 날아들고 노린재는 역한 냄새를 풍긴다. 해바라기 잎 아래 그늘에는 시커먼 곤충이 꼭 붙어있는데 이름을 아직 모르겠다. 그외 벌레와 곤충은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그런데, 나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않는 이들과 다른 녀석들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산모기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작은 녀석들은 내가 밭에 갈 때면 어김없이 손과 발, 목덜미, 얼굴에 사정없이 달려들어 애를 먹인다. 심지어는 엉덩이를 물어서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산에다 모기약을 뿌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미운 녀석이 고라니다. 작년부터 우리 밭을 자신의 특별 레스토랑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고추가 조금 자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고추순을 막 잘라먹는다. 채 꽃도 피지도 못하고 앙상한 줄기만 남은 고추 나무가 불쌍하다. 아직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밭 주변에서 이 녀석을 본 목격자가 여럿 있다. 고라니는 고추순만 아니라 여린 호박순도 잘라 먹고, 심지어 상추, 쑥갓도 뜯어먹는다. 사람들은 고라니를 잡기 위해 덫이나 올무를 놓자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고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 견디고 있다. 매일 고라니에게 습격당하여 망가지는 밭을 보면서 인내심의 한계를 기다리고 있다. 멧돼지와 마찬가지로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고라니 소탕 작전을 펴는 지역도 있다고 한다.
  세 번째로 토끼다. 귀여운 토끼 이미지로만 생각하면 잘못이다. 어제 저녁 내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도 감히 토끼란 녀석이 겁도 없이 나타나 야금 야금 채소를 뜯어먹고 있었다. 몸통은 갈색 털에 귀가 쫑긋하니 섰다. 내가 보고 있는데도 도망갈 생각도 안한다. 토끼가 나타나니 주위에는 까치와 또 다른 새들이 야단이다. 얼마 전 상추 밑동까지 싹뚝 잘라먹는 녀석이 아무래도 토끼인 것 같다. 고라니는 키가 있어 주로 고추 윗순을 잘 뜯어먹는데, 토끼는 앉아서 상추 밑동을 먹었을 것이다. 
  현재로는 배추벌레, 모기, 고라니, 토끼가 내 밭을 망치거나 나를 괴롭히는 녀석들이다. 하지만 가끔 나를 놀라게 하는 놈을 빼놓을 수 없다. 얼마 전 맨손으로 땅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긁어내다가 깜짝 놀랐다. 색깔도 알록달록 고운 뱀이 미끈한 몸체를 드러낸 것이다. 갑자기 등골을 타고 소름이 끼쳤다. 이 녀석은 소리도 없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작대기로 걸어서 다른 쪽 산으로 집어던졌다. 내 밭에서 뱀을 본 게 벌써 두 번이나 된다. 요즘은 밭에 갈 때 한 손에 막대기나 연장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
   어제는 붉은 양대와 흰 양대를 심었다. 서울에서는 강낭콩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양대’라고 부른다. 지금 심으면 추석 지나고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콩을 심으면 또 콩을 좋아하는 벌레와 곤충이 나타날 것이다. 날로 무성해지는 텃밭에 새로운 벌레와 곤충을 만나는 일도 즐거움의 하나다.
  지금 막 피기 시작하는 모감주나무의 금빛 꽃망울 밑에서 식물과 곤충, 벌레와 만나는 시간은 참 행복하다. 혼자 있어도 뻐꾸기 소리와 꾸루룩 거리고 파드득 거리는 여러 새들의 움직임이 있어 외롭지가 않다. 어차피 이 땅에서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함께 사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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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없이 여름나기

냉장고 없이 여름나기


  교무실에 선풍기가 들어왔다. 교실엔 이미 지난 주부터 선풍기가 돌기 시작했다. 섭씨 삼십 도를 넘나드는 때 이른 더위 탓이리라. 하지만, 나에게는 다시 선풍기와 에어컨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걸 의미한다.

  새삼스레 가족과 혼자 떨어져 자취 생활이 어느새 두 해 여름에 접어든다. 지금 우리 방에는 선풍기는 물론 냉장고도 없다. 우리 방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건 라디오와 휴대폰 분이다. 화장실과 부엌으로 난 문을 빼놓곤 그 흔한 창 하나 없이 단절된 어두운 공간이다. 

  작년에는 쓰다 버리는 냉장고를 구하기 위해 게시판에 광고도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도 해보았다. 하지만 끝내 나와 인연이 맞는 냉장고와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식중독 한 번 걸리지 않고 무사히 여름을 보냈다.

  얼마 전에 우리 동네 중고 물품 가게에 들어 냉장고 값을 물어보니 최소 팔 만원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돈도 돈이지만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떨떠무레하게 대답하는 주인(직원?)의 말에 더 이상 물어볼 마음도 없이 나와 버렸다. 

  그래~ 올해도 냉장고 없이 한번 지내보자. 밥은 이틀 치를 넘기지 않게 짓는다. 어릴 적에는 보리를 미리 삶아 시원한 곳에 매달아 놓고 쌀밥을 지을 때 얹어서 먹었다. 그런데, 여름, 특히 장마철에 가끔 쉰 밥이 생기기도 했다. 그럴 땐 밥을 다시 끓여서 먹으면 괜찮았다. 김치는 일 주일 정도 지나도 먹을 만하다. 다른 밑반찬은 사흘을 넘기지 말고 먹어야한다. 또, 반찬은 매끼마다 먹을 만큼 덜어서 먹으면 상하지 않고, 국도 마찬가지다.

  또, 새로운 방법이 생각나서 올해는 실천하는 게 있다. 아침에 도시락과 함께 일용할 반찬을 직장으로 가져가서 휴게실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이다. 그리고 퇴근할 때 다시 가져가서 저녁과 아침을 먹고 다시 가지고 오면 된다.

  찌개와 간단한 요리를 위해 필요한 마늘과 고추, 파도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으면 쉽게 상한다. 특히 시중에 파는 깐 마늘도 사흘 정도만 밖에 두면 당장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 이런 양념도 마찬가지로 직장 휴게실 냉장고에 잠시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만 꺼내서 요리를 하면 된다.

  유월이 지나면 텃밭에서 고추, 파, 상추, 쑥갓, 근대, 열무, 배추, 깻잎 등을 매일 바로 수확할 수 있어 양념이 상할 염려는 줄어든다. 그러고 보니 올 가을에는 우리 밭에 양파와 마늘을 한번 심어봐야겠다. 

  냉장고 없이 살면 좋은 점을 생각해본다. 일단 전기세가 적게 나간다. 물론 내가 냉장고를 쓰지 않는다고 공동 생활하는 다가구 주택에서 전기세를 적게 내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에너지를 절약하고 전기세를 적게 내야 하는는 건 사실이다. 다음으로 방이 조용해서 좋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않아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셋째, 음식을 적게 섭취하게 된다. 냉장고 없이 일식 삼찬 이상 해먹기 어렵다. 기껏해야 두 가지 반찬이면 족하다. 따라서 소식을 하게 되고 건강에도 좋다. 마지막으로 계획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밥을 할 때 이틀 이상 넘기지 않게 쌀을 안치려면 항상 하루, 이틀 뒤를 생각하면서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사는 현재는 항상 긴장되고 최선을 다하며 살게 마련이다.

  냉장고가 있어야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을 버리면 얼마든지 냉장고 없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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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유치 이전에...더욱 가난해지는 포항시민들이 불쌍하다

 

KTX 연결 이전에

-더욱 더 가난해지는 포항 시민들이 불쌍하다.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KTX 연결 유치 이전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 열차 운행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다. 중국과 태국은 버스나 기차 운행 시간이 24시간 이루어진다. 그에 비해 우리 나라는 심야 우등버스가 12시나 1시까지만 운행되고, 서울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밤 11시면 끊어지고 첫차 출발 시간도 늦다.

  포항이 멀다는 얘기는 많이 한다. 그 해결책을 생각해보자. 우선 서울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KTX 첫차의 출발 시간을 오전 4시로 당기면 된다. 그렇게 되면 동대구역에 5시 40분에 도착하여 6시에 출발하는 동대구-포항 통근열차를 갈아탈 수 있게 된다. 포항역에는 오전 8시 11분에 도착한다. 이렇게 된다면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포항에 출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철도 운행 체계로서는 서울에서 포항으로 출근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이 포항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KTX 노선이 연결되기 이전이라도 추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이런 조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만 대한민국 교통의 오지인 포항이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2007년 6월 1일부터  동대구에서 포항으로 가는 기차편은 13 편에서 10편으로 줄었고, 포항에서 동대구로 가는 통근 열차가 6편에서 4편으로 무려 33%나 줄어들었고 무궁화 호도 5편에서 4편으로 20%나 줄였다. 변경되고 없어진 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포항->동대구

2007. 5.31까지

2007년 6.1일부터

비고

종류

포항 출발

동대구 도착

종류

포항 출발

동대구 도착

 

통근

05:15

07:26

통근

06:00

08:11

 

통근

06:20

08:15

통근

09:35

11:29

없어짐

새마을

07:25

09:11

새마을

08:40

10:19

 

통근

08:15

10:06

 

 

 

없어짐

무궁화

09:25

11:04

무궁화

08:00

09:50

 

무궁화

11:10

12:53

무궁화

12:00

13:46

 

통근

12:00

14:04

통근

12:50

14:50

 

무궁화

13:00

14:41

무궁화

16:05

17:49

 

무궁화

15:00

16:42

무궁화

20:40

22:26

 

무궁화

16:30

18:11

 

 

 

없어짐

새마을

17:25

19:10

새마을

17:20

18:56

 

통근

18:20

20:28

통근

18:30

20:57

 

통근

20:30

22:18

 

 

 

없어짐


▶ 동대구->포항

2007. 5.31까지

2007년 6.1일부터

비고

종류

동대구출발

포항 도착

종류

동대구출발

포항 도착

 

통근

05:20

07:24

통근

06:05

08:11

 

통근

06:00

08:03

통근

10:10

12:10

 

통근

08:17

10:15

통근

14:10

16:05

 

무궁화

10:25

12:11

무궁화

07:40

09:30

 

새마을

11:54

12:49

새마을

13:59

15:38

 

무궁화

11:30

13:11

무궁화

11:50

13:39

 

무궁화

12:30

14:10

무궁화

16:00

17:43

 

통근

15:00

16:52

통근

18:25

20:39

 

무궁화

16:20

18:10

무궁화

20:35

22:25

 

무궁화

17:42

19:24

 

 

 

없어짐

통근

18:30

20:40

 

 

 

없어짐

통근

20:30

22:22

 

 

 

없어짐

새마을

21:05

22:50

새마을

20:12

21:52

 

  이 같은 변경으로 통근 열차를 타던 사람은 무궁화 호나 새마을 호를 타야 한다. 통근 열차 요금 2,700원에서 6,400원(무궁화 호) 9,300원(새마을 호)을 내는 걸 의미한다. 통근 열차를 타지 못하면 무려 237%와 344% 의 요금 인상분을 고스란히 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게 되어 있다. 기차 운행 횟수가 줄어들었으니 그나마 선택의 폭도 넓지 못하게 되었다. 


  요금도 문제지만,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포항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것은 무척 어렵게 되었다. KTX 환승을 하더라도 18:30분에 막차를 타야 한다. 고속버스가 00:30까지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는 포항-서울 하루 출장은 불가능하게 된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울 대우재단빌딩에서 오후 3시에 이사 회의가 열린다고 하자. 부산, 광주, 대구, 목포, 포항에 흩어진 이사들이 자기가 거주하는 곳에서 출발하는 시간을 따져보자. 대우재단빌딩은 서울 역 앞에서 도보로 10분 이내 갈 수 있다.

 

지역 출발 시간

서울 도착 시간

소요 시간

회의 기준 소요시간

요금

비고

대구

12:51

14:41

1:50

2:09

38,600

 

광주

12:00

14:46

2:46

3:00

36,100

용산 도착

부산

11:45

14:41

2:56

3:15

48,100

 

목포

10:40

14:01

3:21

4:20

40,700

용산 도착

포항

09:35

13:39

4:04

5:25

41,300

동대구 환승

  서울까지 가는 물리적 거리는 부산과 목포가 포항보다 멀지만, 시간 거리에서는 포항이 가장 멀다. 문제는 포항-동대구 간 열차를 증차하면 시간 거리를 단축할 수 있음에도 이번 6.1 개편에서는 오히려 기존 운행 횟수를 줄인 것이다. 포항에서는 오후 3시 회의에 참석하려면 적어도 6시간 이전에 나서야 하도록 되어 있다. 대구까지 승용차로 한 시간 거리인데도 기차를 이용하려면 무려 3시간 차이가 나는 불합리한 구조로 되어 있기에 기차 승객은 갈수록 줄어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시간을 맞추려면 포항에서는 비행기나 고속버스를 타고 가야만 하던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일찍 출발해야 한다. 게다가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포항은 훨씬 더 불리하다. 저녁을 먹고 막차를 탈 여유를 생각해보자. 회의 종료를 6시로 잡은 경우를 가정하자.

 

출발 시간

도착 시간

회의 종료후 여유 시간

비고

대구

22:10

00:49

4:10

 

광주

21:20

00:19

3:20

용산 승차

부산

22:00

00:52

4:00

 

목포

20:30

23:37

2:30

용산 승차

포항

18:30

22:25

0:30

동대구 환승

  포항은 회의 마친 후 가방을 챙기고 악수하면서 저녁은 물론 뒷풀이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기차를 타러 가야한다. 목포는 저녁을 먹고 떠나야 하지만, 대구나 부산에서 온 참가자는 뒷풀이에서 술 한잔 하고 나머지 사람을 다 보내고 귀가할 수 있다. 포항〈목포〈광주〈부산〈대구 순으로 여유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럴 경우 일어나는 사회 생활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실로 엄청나지 않을 수 없다.


■ 포항과 부산 사이

  포항과 부전(부산) 사이 열차는 50%나 줄였다. 6월 1일 전만 하더라도 포항과 부산은 기차로 출퇴근 할 수 있었지만, 현재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변경 내용을 보자.

▶포항->부전

2007. 5.31까지

2007년 6.1일부터

비고

종류

포항 출발

부전 도착

종류

포항 출발

부전 도착

 

무궁화

05:00

07:54

무궁화

05:40

08:34

 

무궁화

09:00

11:34

무궁화

15:00

17:44

 

무궁화

11:00

13:36

 

 

 

없어짐

무궁화

19:30

22:23

 

 

 

없어짐

▶부전->포항

2007. 5.31까지

2007년 6.1일부터

비고

종류

부전 출발

포항 도착

종류

부전 출발

포항 도착

 

무궁화

05:05

07:47

무궁화

11:15

13:57

 

무궁화

07:00

09:36

무궁화

18:50

21:45

 

무궁화

15:00

17:35

 

 

 

없어짐

무궁화

18:50

21:44

 

 

 

없어짐

  코레일로 불러달라는 철도공사는 포항이나 동해안 지역 주민들이 다른 지역보다 차별받지 말아야 하는 최소한 권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회사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다. 포항시는 코레일의 이런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해야지 장밋빛 환상에 포항 시민의 눈을 멀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포항 시민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갈수록 축소되는 철도 운행 횟수나 적절한 시간 배치이지 KTX 유치가 아니다. 진정 시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 체계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포항은 갈수록 사람 살기에 불편한 도시, 살고 싶지 않은 도시가 될 것이다. 맹목적인 KTX 포항 유치 운동에 우려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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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포항유치보다 더 필요한 것

 KTX보다 통근열차를


  포항에 KTX 열차를 유치하자는 서명지가 직장에 돈다. 박승호 포항시장이 나서고 본격적으로 KTX 포항유치위원회까지 만들어진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KTX 가 연결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먼 도시가 되어버린 포항시민의 입장에선 KTX 노선이 연결된다면 현재보다 1시간 이상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에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KTX 유치보다 더 필요한 것은 서민의 발인 무궁화호와 통근열차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철도공사는 2007년 6월 1일부터 철도운행 시간을 변경하면서 동대구에서 포항으로 오가는 통근 열차 6편을 3편으로 줄이고 무궁화호도 5편에서 4편으로 줄이기로 하였다. 이제 따라 새벽 5시 20분 동대구에서 포항으로 떠나는 통근 열차는 아예 없어지게 된다. 이 통근 열차는 대구 방면에서 포항으로 출퇴근하는 이들은 물론, 경주권에서 포항역 주변에서 열리는 새벽 시장에 신선한 야채와 농작물을 내다팔기 위해 보따리를 들고 타는 농촌의 할머니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통근열차를 없애므로 새벽 시장은 점차 활기를 잃게 될 것임에 분명하다. 물론 첫차가 없어지므로 대구에서 포항까지 기차를 이용해 출퇴근 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기차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동대구에서 5시 20분에 출발하는 기차는 포항에 7시 24분에 도착하여 실제적으로 대구-포항간 통근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6월 1일부터는 06:05에 출발하는 유일한 통근 열차를 이용하면 포항에는 8시 11분에 도착한다. 직장에 따라서 포항역에 7시 30분경에는 도착해야 다시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해서 직장에 출근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열차는 더 이상 통근 기능을 하지 못한다.


  포항-동대구간 요금을 비교해보자. 통근열차 2,700원, 무궁화호 6,400원, 새마을호 9,300원이다. 대구-포항간 시외버스 요금은 6,000-6,600원이다. 동대구에서 포항까지 이어지는 대구선과 동해남부선은 선로가 하나밖에 없는 단선이기에 통근열차나 새마을호나 소요 시간은 별 차이 나지 않는다. 새마을호가 1시간 45분대에 가지만 여러 역을 정차하는 통근열차도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새마을호 요금은 통근열차 요금의 3배 이상 든다. 직선 거리도 70여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구와 포항 사이는 실제로 통근이나 통학이 가능하다. 소요 시간도 1시간 대로 수도권과 비교하면 일상적 거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통근 열가가 50% 할인을 받는다고 해도 하루 통근 비용으로 무궁화호 이상은 실제적으로 부담이 너무 크다. 수도권 광역 전철노선을 생각해보면 쉽게 비교된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전철 요금이 2,500원이다. 천안에서는 서울까지 출퇴근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가까운 대구와 포항은 출퇴근하기에는 너무도 힘들고 어렵다. 기차도 없고 비용도 무척 비싸다는 얘기다.


  그러나 만일 KTX가 포항에도 연결된다면 그나마 남은 통근열차나 무궁화는 사라지고 새마을호와 KTX만 남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철 사장이 취임한 이래 공공 기능을 약화시키고 오로지 수익을 올리기에 급급한 철도공사의 태도를 보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또렷하게 보인다. 동대구와 포항 사이 KTX 요금은 적어도 1만원 이상으로 책정될 것이다. 통근하기엔 불가능한 요금으로 설령 KTX 가 포항까지 연결된다 하더라도 수요가 많지 않아 적자 구간이 될 것이다. 현재 포항-서울 간 항공 노선도 승객이 적어 하루 4편밖에 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해보자.


  결국 서민들의 발을 묶고 일부 부유한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KTX를 유치하는 셈이 된다. KTX 유치보다 더 시급한 것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한 교통 정책이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동해안 주민들을 위해서는 영천에서 포항으로 바로 연결하는 철도 건설이 필요하고 동해중부선이 빠른 시일 안에 건설되어야 한다. 이렇게 서민을 위한 정책이 실현되지 않으면 포항의 인구 감소 추세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사회 공공성을 강화하지 않고 추진되는 KTX 포항유치운동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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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자연이다

 

  누구나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그리운 사람을 만날 때 대부분 눈물마저 흘리지 않는가. 

  김광화도 내가 무척이나 궁금하여 보고 싶었던 친구였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979년 봄 성남에서다. 노동자와 함께 배우고 공부하는 야학에서 그와 같은 강학으로 만났다. 하지만 채 여섯 달도 넘기지 못하고 우리는 함께 성남경찰서 취조실에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보름 뒤에 구속취소로 풀려난 뒤 나는 지방으로 내려갔고, 이어 징집과 투병 등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그 역시 군대에 끌려갔고, 우리 또래였던 한 학강은 다음 해 이화여대 앞에서 분신하였다. 나는 병원에서 광주 학살 소식을 접했고, 역시 암울한 병실에서 김종태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그후 십년이 채 되지 않아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온 나라를 흔들었다. 톨스토이가 말한 인생의 학교, 감옥과 병원, 그리고 군대를 겪은 뒤에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학생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1990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지방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방에서 생활하면서 공동체, 우리 문화, 환경,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세상의 변화, 교육노동운동 등이 내 화두였고 주된 활동 내용이었다.

  잠시 방황하였지만, 몸은 더욱 건강해졌고 다시 서울에 올라가 잠시 생활하게 되었다. 여전히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다시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옛정이기도 하지만, 70년대 혁명을 얘기했던 ‘동지’들이 보고 싶었다. 하나, 둘 찾아보았고 술을 마시며 못다한 얘기를 나누었다. 세월은 많이 변했다. 당시에도 많은 논쟁을 하였지만, 지금 살펴보니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나타내고 있다.   

  올해 드디어 김광화를 찾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무주에 살고 있었다. 10여년 전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가질 때 살고 싶은 후보지였던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 그가 있다고 했다.  나도 변했겠지만, 그도 변해 있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가 우리 집으로 책을 하나 보내왔다. ‘귀농 부부 장영란․ 김광화의 아이와 함께 크는 교육 이야기 <아이들 자연이다>

  이 책을 우리 아들 찬이가 제일 먼저 읽었다. 내가 주말을 맞아 집에 가니 ‘아빠, 내 얘기가 이 책에 나와요.’ 한다. 그 구절을 옮겨본다. 


  “그리고 일요일이 왔다. 그런데 이 날, 정말 내게는 뜻밖의 전화가 왔다. 서울 살 때 알고 지내던, 이십 년도 더 지난 옛 친구였다. 친구는 우리 집을 오고 싶다 했다. 편할 때 오라고 했더니 당장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 그 친구에게는 상상이 또래 아들이 있었다. 이 아이는 서울에서 살지만 신기하게도 게임을 전혀 안 한다고 한다. 그 덕인지 이날 상상이는 게임에 대한 중독증을 ‘쉽게’ 잊을 수 있었다. 이럴 때 손님은 참 뜻밖이고 우연의 일치다. 하지만 우리 아이 생명을 북돋아주는 고마운 손님이 아닌가”


  내가 왜 그날 갑자기 무주로 내려갔는가? 김광화 부부 못지 않게 나도 아내와 내 아이 교육을 두고 많이 싸운다. 학원에 보내지는 않지만, 아내는 집에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싫어하는 수학 문제를 맨날 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찬이가 싫어하는 수학 공부를 억지로 시켜서는 안된다는 본다. 두 사람의 입장이 너무 팽팽하여 도무지 해결될 빌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광화라면 나보다 훨씬 쉽고 설득력 있게 답을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온 식구가 함께 무주로 달려간 것이다. 그뒤 아내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져서 친구를 만난 보람이 있는 셈이다.

  김광화는 딸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난 친구를 잘 사귀는 성격이 아니었거든, 내성적인데다 빡빡 깎은 머리에 흉터가 있어 낯을 많이 가렸지. 고등학교 때는 하숙을 같이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유일했지.

  그런데 대학은 많이 달랐어. 다른 학교 학생들도 많이 있었지. 여학생들도 알게 되고, 근데 그때는 친구라기보다 동지를 사귄 셈이지, 학생운동이란 동지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사실 70년대에 ‘동지’라는 말을 거의 부르지 못했다. 정말 불온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광화와 만난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서로 학교가 달랐고 생활 근거지도 같이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를 그렇게 찾고 싶었던가?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날 밤의 대화를 기억한다. 밤새 토론하며 새벽에 이르러 그와 또 한 선배와 어떤 일치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그게 20년이 지나 30년이 다 되어서 광화가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지금 농사를 짓고 홈스쿨링을 하며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교육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며 아내는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밤늦게 들어온다.

  다시 20년 후에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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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상하이2-물가가 비싸

 2. 물가 비싼 상하이


2월 20일(화)

  아시아나 항공은 엔진에 이상이 생겨 정비를 해야 한단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출발하였다. 한 시간 기다린 승객에겐 보답으로 음료를 먼저 서비스한다. 하긴 테레사님은 상하이 공항에서 열여섯 시간이나 대기했는데,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상하이는 생각보다 가깝다. 겨우 한 시간 반 정도 비행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푸둥[浦東] 공항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손님도 적다. 수속도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예전에 상하이에 왔을 땐 홍차오[虹橋] 공항에 내렸다. 당시 공항에 내렸을 때 많은 조선족 사람들이 민박 숙소 호객을 위해 몰리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대신, 여러 여행사 직원들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다. 현지에서 민박을 정하려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중학교 1학년 사회책에는 중국의 개방 정책 단원에서 상하이와 푸둥 지구가 나온다. 가르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중앙교육진흥연구소 교과서에서는 ‘푸동’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표기는 하나로 통일되는 게 좋겠다.

  일단 <100배 즐기기>에 ‘위치가 가장 좋은 민박’이라고 나온 ‘상하이 백패커’ 민박 집을 목표로 가기로 한다. 공항버스 6번은 9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탈 수 있다. 라오시문[老西門] 까지 16 위안이다. 찬이는 키가 커서 초등학생 할인도 되지 않는다.

  오십여 분 만에 라오시문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우리가 내린 곳은 푸싱둥루[復興東路]다. ‘상하이 백팩커’를 찾아서 동쪽으로 가다가 삼패루로(三牌樓路, 싼빠이로루)와 학원로(學院路)를 거쳐 둥제[東街]에서 중화루[中華路]를 돌아서 빈강명인원(濱江名人苑) 아파트를 찾아갔다. 하지만 경비원에게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이사 갔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다른 숙소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처음 들어간 호텔은 450 위안. 왜 이리 방값이 비싼지 모르겠다. 동남아시아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격이 높다. 깃발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으로 향한다. 그들을 따라 팡방중루[方濱中路]로 들어가 본다. 사람들이 바글 바글하다. 의지대로 갈 수 없어 그냥 사람의 물결에 휩싸여 앞으로 간다. 좀 한적한 삼패루로(三牌樓路)로 여관 간판이 보인다. 상해신호경문여관(上海新好景門旅館)이다. 더블 룸이 218 위안이다. 깎아 달라고 하다. 우리가 중국어를 잘 못하는 걸 보고 어떤 사내가 자기가 아는 한국 사람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서 통역을 해준다. 그 한국 여자 덕분에 200 위안으로 깎아서 들어간다. 침대 시트는 깨끗하지만, 바닥은 도통 청소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일단 짐을 풀고 예원(豫園, 위위안)을 먼저 보기로 했다. 위위안은 1999년도 여름에 가족과 함께 왔을 때는 너무 더워 가지 않았던 곳이다.  

  여관 입구 길바닥에 한 여학생이 뭔가 앞에 써놓고 쪼그려 앉아 있다. 내용을 읽어보니 고전적 수법의 앵벌이를 하고 있다.

 

‘트럭 운전사인 아버지가 마약 중독에 빠져 돈을 탕진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으므로 존경하는 각계인사 여러분들의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그래도 이런 수법이 아직 통하는지 동전이 몇 개 모여져 있고, 관찰해 보니 지폐를 건네는 이도 있다. 여전히 어리숙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위위안 가는 길에 배가 고파 우선 만두를 사먹다. 예원(위위안)도 식후경이다. 유명한 난썅(南翔, 남상) 만두집은 아니지만 손님들로 빈자리가 없다. 아래층에서 먼저 계산하면 동그란 표를 받는다. 잠시 기다리면 만두 8개 담긴 통을 받아서 2층에 올라가서 먹으면 된다. 작은 만두를 먹다가 입천장을 데다. 숟가락을 받쳐 먹어야 하는데, 젓가락으로 집어 그냥 입에 넣으니 뜨거운 육즙이 터져 입천장을 놀라게 한다.

  다시 예원을 향해 전진. 정말 사람이 많다. 등 장식을 많이 달아놓고 있다. 아무래도 돼지가 많이 보인다. 밤에 불이 들어오면 아주 멋지겠다. 밤에 다시 오기로 한다. 하지만, 결국 일주일 동안 다시 찾을 시간이 없었다. 성황묘도 입장료를 받는다. 돈 주기가 아까워 밖에서 구경하고, 예원 입구를 찾아 전진한다.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가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사람 구경하면서 군것질 거리도 빠뜨리지 않는다. 화화공자(花花公子)님이 찍어놓은 사진만큼 아름답다. (참고)



* 여행 기간 : 2007년 2월 20일(화)-2007년 2월 27(화) 7박 8일

* 여행 장소 : 인천-중국(상하이-항저우-쑤저우-상하이)-인천

* 누구랑 : 연오랑 세오녀 찬이(만 11세) 가족 

* 환전 : 1 위안=121원


* 연오랑의 다른 여행기는 앙코르사람들과의 만남http://cafe.daum.net/meetangkor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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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상하이1-여행 준비

 

1. 여행 준비


  봄방학 즈음이면 일주일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 이번 2월에는 국적기와 중국 항공사 사이 경쟁으로 일부 노선 항공료 할인 세일을 한다. 게다가 3월이면 만 12세가 되는 찬이가 마지막 어린이 할인 혜택을 받으려면 봄방학이 적기가 아닐 수 없다.


  한 달 간의 동남아시아 여행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중국행 항공편을 살펴보았다. 마침 상하이 왕복 십구만 원대 상품을 골랐다. 세금 포함하여 세 사람 항공료가 칠십만 천원이다. 단 일주일 기간이다. 우리에게 딱 맞는 상품이다.

  인터넷으로 바로 결제를 마쳤다. 출발 하루 전에 전자우편으로 출발안내를 해준다. 아시아나 OZ 363 비행기는 인천 공항(ICN)을 2월 20일 (화) 09:50 출발하여 푸둥 공항(PVG)에 2월 20일 (화)10:40 도착한다. 돌아오는 것은 OZ 362 편으로 푸둥에서 2월 27일 (화) 17:25 출발하여 인천에는 2월 27일 (화) 20:15 도착한다.


  설 연휴가 끝나는 다음날인 2월 20일에 떠나는 비행기니까 준비할 시간은 열흘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상하이는 이미 두 번이나 다녀온 적이 있어 크게 염려하지는 않는다. 일단, <중국여행동호회> http://cafe.daum.net/chinacommunity 카페에 들어가 게시물들을 틈나는 대로 살펴본다.


  여행 가기 전에 꼭 필요한 관련 서적을 검색해서 세 권을 인터넷으로 주문하였다. 그런데, 동네 서점들이 왜 망하는지 이해가 된다. 목요일 저녁에 주문한 책이 금요일 오후에 바로 배달된다. <금요일에 떠나는 상하이 여행>은 주말 상하이 여행을 겨냥하여 묶은 아주 간편한 책이다. 여행 준비 한 달 전부터 이 책을 보면서 따라 하면 손쉽게 상하이 주말 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포항에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다 읽었다. <상하이 100배 즐기기>와 <상해에서 상하이까지>는 그 이후 틈틈이 읽었다.


  비자는 세오녀가 금요일 오전에 중국 영사부에 가서 신청하였다. 중국 영사부 위치가 바뀌었다. 호적등본과 주민등록 사본을 떼어가야 하는 등 번거롭기 그지없다. 그다음 주 수요일 오전에 찾으러 가면 된다. 단체 비자가 아니라 개인이 신청하면 일인당 35,000원으로 비싼 편이다.


  환전은 외환은행 환전 클럽을 통하여 600 달러를 바꾸었다. 환율이 내려가기를 기다리다가 오히려 더 올라갔다. 2007년 2월 14일 고시환율 954.72, 60% 우대를 적용하여 944.86에 566,910 원 들었다. 이전 여행에서 남은 달러를 더하여 사용하면 되고, 엔화와 원화도 추가로 가져간다. <중여동> 환전 게시판을 눈여겨 살펴본다. 드디어 추석날 상경하는 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올라온 글을 보고 전화를 하였다. 안양에서 접선하여 8,000 위안을 1:121로 968,000 원에 샀다.


  상하이에 처음 간 게 1999년 여름이었다. 당시 직장에서 단체로 간 여행이었고, 돌아오자마자 우리 가족만 따로 다녀왔다. 벌써 팔년 전이다. 당시에도 급격하게 변화하는 상하이 모습에 놀랐는데, 이번엔 또 얼마나 바뀌었을까 궁금하다. 그때 썼던 여행기를 상당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 여행 기간 : 2007년 2월 20일(화)-2007년 2월 27(화) 7박 8일

* 여행 장소 : 인천-중국(상하이-항저우-쑤저우-상하이)-인천

* 누구랑 : 연오랑 세오녀 찬이(만 11세) 가족 

* 환전 : 1 위안=121원


* 연오랑의 다른 여행기는 앙코르사람들과의 만남 http://cafe.daum.net/meetangkor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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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삥 뿌이 가다가 오토바이 사고

 

2006년 여름 한 달 간의 앙코르 여행 기록


누구랑 : 연오랑 세오녀 찬이 가족 여행

기간 : 7월 20일(목)-8월 18일(금) 29박 30일

장소 : 인천-태국(방콕-깐짜나부리-나컨빠톰-쑤코타이-씨 쌋차날라이-싸완클록-우돈타니-반치앙-나컨파놈)-라오스(타캑-싸완나켓-빡쎄-짬빠싹-씨판돈)-캄보디아(스뚱뜨렝-꼼뽕짬-씨엠리업-바탐봉-씨쏘폰)-방콕-인천


8월 14일(월) 스물 엿새 째 아침

  늦은 아침을 먹으러 리버사이드 발코니(Riverside Balcony)를 찾아갔다. 오토바이에 온 식구가 타고 오래된 돌다리(Old Stone Bridge)를 건너 식당에 도착했는데 영업을 하지 않는다. 월요일은 노는 날이고 평소에도 오후 4시부터 연다고 한다. 오늘이 바로 월요일이다. 밤에만 여는 식당이라서 그런지 낮에 보니 볼품이 없다. 다른 식당을 찾아다니다가 3번 길 바탐봉 법원 서쪽에 있는 프까이 쁘륵 식당(Phkay Proek Restaurant)에 들어갔다. 오므렛과 빵 4,500 리엘, 새우볶음밥 3,000 리엘, 치킨 카레는 8,000 리엘, 앙코르 맥주는 8,000 리엘이다.

밥은 한 양푼에 1,000 리엘. 다른 음식은 8,000-12,000 리엘 수준의 음식이 나온다. 세오녀는 양파를 좋아해서 양파를 달라고 하지만, 종업원들은 ‘어니언(union)’이라는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캄보디아 말로 양파 정도는 알고 가야 할 것 같다. 밥을 먹고 있는데, 할머니가 민물 게를 한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고 있다.

 

2,000 리엘에 일곱 마리. 양념을 해서 바로 먹으면 되는데 맛이 괜찮다. 음식점에 음식을 팔러 와도 되는 이상한 집이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받았는데, 계산이 엉터리라 일일이 확인하면서 계산했다. 캄보디아에서도 식당에서 반드시 계산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식당에는 한국 사람들이 자주 오는지 화장실 표시에 한국어가 사용되고 있다.


  배를 채운 뒤 오늘 일정을 시작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깜삥 뿌이(Kamping Puoy) 저수지를 목표를 삼아 간다. 그런데, 가다 보니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주유소에서 기름 1리터에 3,600 리엘을 넣고,  앞바퀴가 이상해서 살펴보니 바람이 반 밖에 없다. 조금 더 천천히 가다가 오토바이를 고치는 곳이 보여서 그곳에서 바람을 넣었다. 깜삥 뿌이 방향 물어보니 이길은 왓 바난 가는 길이라고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 이번 여행에 짐이 된다고 <어라운드 바탐봉(Around Battambang)> 책자를 가지고 오지 않아 바탐봉 주변 지도가 없어 헤매는 것이다. 길을 돌려 빠이린 방향 길을 제대로 찾아 달린다. 우기라 먼지는 별로 나지 않지만 길이 상당히 많이 패여 있고, 작은 구멍이 많아 꼭 지뢰밭을 피해가는 느낌이다. 또한 비포장길이라 상당히 미끄러워 시속 20km 정도로 조심 조심 간다. 그러다보니 팔과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 운전하는데 상당히 피로를 느꼈다. 프놈 쌈빠우 전에 비가 쏟아져서 길거리 주유소에서 잠시 쉬었다. 우리는 준비해 간 오이를 먹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년과, 세 명의 젊은이들이 오토바이 한 대에 타고 가다가 우리와 함께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과일을 꺼내더니 장년 남자에게도 주고 우리에게도 먹으라고 권한다. 우리는 오이를 그냥 먹었는데 오히려 미안하다.

  비가 그치니 쁘놈 쌈빠우가 아주 맑고 깨끗하게 보인다. 길에는 물 웅덩이가 많이 생겼고, 도로는 더 미끄러워졌다.

얼마쯤 가다가 결국 우리는 작은 가게 앞에서 그냥 왼쪽으로 주루룩 미끄러졌다. 진흙탕에 옷을 다 버리고 나는 왼손과 팔꿈치, 왼쪽 무릎과 오른쪽 허벅지에 타박상과 상처가 생겼다. 가운데 앉은 찬이는 큰 상처가 없고, 세오녀는 팔을 짚으면서 어깨에 충격이 간 듯했다. 사고를 수습하고 우리는 그냥 바탐봉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침 빠이린 방향에서 오는 썽태우를 잡았다.

오토바이를 싣고 우리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긴장하여 운전하다가 뒷자리에 앉으니 졸음이 쏟아져서 꾸벅꾸벅 졸다가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세오녀가 운전사에게 10,000 리엘을 주었다. 남은 기름이 아까워 시내를 더 돌아본다. 기차역에도 다시 가보았다. 아침에 서 있던 화물 열차가 사라지고 없다. 대신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고 있다. 버스 회사를 둘러보면서 차 시간표와 가격 등을 알아보았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문제는 회사마다 타는 장소가 다르다는 것이다. 네악 끄로르홈 여행사(Neak Krorhorm Travel & Tours)에서 운행하는 방콕행 버스가 12시에 출발하고 가격은 48,000 리엘이다. 내일은 예정에는 없었지만 씨쏘폰으로 가서 하루를 머물다가 태국으로 가야 겠다.

  저녁은 호텔 옆에 있는 아피(Aphy) 식당에서 먹었다. 중국 차를 한잔씩 준다. 작은 카페 같은 식당인데 손님이 무척 많다.    


* 환전

-외환은행 2006년 7월 19일 환전 클럽 이용

  1달러 964.47 원(고시 환율 975.37원에서 사이버 환전으로 65% 할인율 적용)

 -라오개발은행(타캑) 2006년 8월 1일, 1 달러=10,020 낍

 -빡쎄 란캄 호텔 2006년 8월 5일, 1 달러=10,000 낍

 -1달러 : 4,136 리엘 2006년 8월 8일, 꼼뽕짬 환전소


* 연오랑 세오녀 가족의 다른 여행기는 http://cafe.daum.net/meetangkor 앙코르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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