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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에 이어지는 기억

학생운동을 시작하면서 많은 노래를 배우고 듣고 불렀다.

그러나 그솎에서 나의 마음을 때리는 것은 없었다.

그저 필요에 의해서(불르기좋은), 가사가 좋아서 수준에서 호불호가 있었을뿐이었다.

 

그러다 전철연 열사추모 집회에서 흘러나온 노래

'더이상 죽이지마라'

 

가슴 아래까지 울리는 선율, 목소리, 가사, 호흡...

 

그 날의 집회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그 날 어떤 연사가 나왔는지 ,어떤 투쟁을 진행했는지

기억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집회전 그 노래가 흘러나올 때

앰프의 위치, 날씨, 냄새, 풍경들은 선명하기만 하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노래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부른 것인지

물어보았다.

 

노래부르기 보다는 듣기를 좋아하는데

민중가요와 만남은 듣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경험이 대부분이었을 때

정태춘의 노래는 충격 이상이었다.

 

그리고 복원되는 기억

음반사전 검열에 대해 대중음악계의 반발이 거셀 때였는데

검열을 받지않고 무단으로 앨범을 낸 사람의 인터뷰가 텔레비젼에 나왔고

유명한 가수가 그런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근데 웬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가 나와 대박 실망했는데

그이가 바로 정태춘이었다.

 

풋~ 그사람이 그사람이었다니

 

 

그리고 집에서 그이의 앨범을 안치완, 조국과 청춘, 꽃다지 앨범과 함께 발견했다.

분명 큰누이가 사다노은 앨범이었던 것이다.

 

큰누이는 대학초년까지는 통일운동을 하던 이였다.

큰누이는 전형적인 앨리트의 행보를 걸었기 때문에

큰누이가 하는 행동에 부모님의 일체의 의심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큰누이가 하는 이야기나 가져오는 책, 단체복, 테입은

대학생이면 으래 거쳐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큰누이가 운동을 관둘 때즈음이 한총련이 불법화 될 때였는데도 말이다.

(큰누이가 96년에 연세대를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던 모습은

우리집에서 대학생이면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고민의 단계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반짝이 옷을 입은 나훈아와 이미자, 조용필 옆에

자연스럽게 정태춘과 안치완, 조국과 청춘, 꽃다지가 있었다.

 

정태춘의 앨범을 자주 들을 수 없었다.

그냥 편하게 들을 수 없는 무게의 앨범이었고

한번 들을 때마다 휴유증이 큰 앨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전역하고 처음으로 정태춘의 노래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운동을 추억하는 짜증나던 내용의 문화제였다.

 

거기서 정태춘은 조용한 목소리로

목이 부어서 오늘 제대로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요즘 작은 곳에서 노래를 불러서 이런 큰 문화제는 적응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전교조 만들어질 때 감정을 살려서 만든 노래였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울림으로 더욱 쨍해버렸다.

내귀에서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고

그의 목소리와 기타소리만 흘렀고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당시 건조해지기만 하던 나의 마음에 자극을 주었던 것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오늘 우연히 정태춘의 노래를 듣게 되었고

그의 앨범을 인터넷을 통해 반복해서 듣고 있다.

 

'더 이상 죽이지마라'

 

노래가 나온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유효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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