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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문화 시비걸기

꼬리에 꼬리물기? 아님 횡설수설?

 

아름다운 재단이 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떴다"라는 표현만큼 적적한 걸 못 찾겠다. 참여연대 대표였던 박원순씨의 개인기에 전적으로 의지해 탄생한 듯한 아름다운 재단은 이제 방송은 물론 신문까지 밀어주고 있다. 아니 '기업'까지도 밀어주고 있다.현대증권인가에서는 TV광고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아름다운 재단을 광고해주고 있다. 자신들의 이미지와 접목시키려는 속셈이 너무 뻔해 보이지만 시청자들에게는 아름다운 광고로 보이겠지.

뭔 문제가 있어서 난 이렇게 시비조일까?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라곤 10원도 안내는 내가 이따위 소리를 해도 되는 걸까? 그렇다고 무슨 빈민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너무 뻔뻔한 거 아냐?)

 



자선문화가 자리잡히면 빈곤문제가 해결될까? 아니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완화는 될까?

 TV에서도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금을 받는다. 눈물나게 어려운 사람들을, 감정을 자극하는 멘트와 함께 보여줘서 사람들로 하여금 수화기를 들게 만든다. 공영방송이라는 취지에도 그럴 듯하게 맞는 것 같고, 전화로 돈을 낸 사람도 뿌듯함을 누리게 하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걸 본 적이 있는가? 왜 가난이 대물림 되는지, 그렇게 아프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 국가는 대체 뭘하고 있는지 따지는 걸 본 적이 있나 말이다. 할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는 소녀가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 정부보조금이 끊기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얘기할 뿐 무엇이 문제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들이 능력이 없어서?

TV 구석에 보면 성금액수가 올라가는 게 보인다. 억대의 제법 많은 돈이 걷힌다. 시청 앞에도 사랑의 온도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부금 액수가 100억이 되면 온도계도 100도를 가리키게 된다나 모라나. (요즘은 정치던, 운동이던 간에 이벤트가 빠지면 안된다. 뭐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100억, 꽤 큰 돈이다. 숫자로 따지면 꽤 여러 명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퍼센트로 따진다면 얼마나 될까? 그리고 100억이 매달 모이는 걸까? 아마도 올해 목표액일 것이다. 그래 까짓거 매달 100억 정도는 기부금이 모인다고 치자. 그 돈으로 얼마나 빈곤을 해결 할 수 있을까?

간단한 산수 한 번 해보자. 독거노인이 60만명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한달에 10만원씩만 주려고 해도 600억이 필요하다.(매달 말이다. 그리고 10만원 갖고 인간다운 삶은 고사하고 그냥 생존이나마 가능한가?) 게다가 어려운 사람이 독거노인뿐인가? 경제능력이 없는 장애인은 몇 명일 것이며, 소년소녀가장은 또 한둘인가? 노숙자는 어떻게 할 거고, 고아수출은 대체 언제까지 할건데? 이걸 기부문화를 확산해서 해결하자고? 장난하나?

 

어쨌든 기부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맞다. 좋은 일이다. 내가 아는 사람은 장애인 센터를 운영하다가 자금 사정 때문에 문닫을 뻔 했다가 개인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건물을 지어 이사를 했다. 이건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기부를 하거나 봉사하는 분들의 대부분이 훌륭하다는 것에 딴지 걸 생각도 없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아닐 수도 있다.

 

횡설수설, 노조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하종강이란 분이 있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이고 노조에 강연도 많이 다닌다. 노조원들 중에는 맑스니 계급이니를 체계적으로 말할 수 있는 먹물들도 있겠지만 그런 의식없이 그저 "노조에 가입해서 단결하여 싸우면 월급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정도의 의식만으로 노조원이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이런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하종강의 강연을 듣고 나면 감동을 한단다. 그의 강연내용을 무리하게 축약하자면 이런거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임금인상을 위해 파업 같은 것에 동참했던 분들이 언론에서 게거품 물며 '이기주의'니 '기업과 나라를 망하게 한다'느니 하는 말에 마땅한 논리도 없이 속으로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려왔는데 하종강의 그런 말을 들으니 얼마나 당당해 지겠는가. 하지만 하종강의 나머지 말에도 귀를 귀울여야 한다. "노조 지도부까지 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내가 지금 상관도 없는 것을 어거지로 갖다 부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쨌든

일반 소시민들이 자신의 수입의 일부를 떼어내서 남을 돕고, 소중한 시간을 내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 분들에겐 오히려 존경을 표한다. 내가 지금 시비 걸고 있는 것은 그것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여기서 '업'이란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 삼는 사람은 빈곤의 문제를 '자선과 기부문화의 확대'로 해결 하자고 '운동'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즉 그것을 운동차원에서 하는 사람, 또는 단체, 언론기관 등등을 말하는 것이다.

 

또 횡설수설? 이주노동자 이야기

참세넷에서 같이 활동하던(하는?)사람 중에 이주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인권운동가가 있다. 그분이 일하는 센터는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이런점에서 기부금은 매우 중요하다.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지만 난 지금 기부금 자체를 문제삼는 게 아니다.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 사이에 이견이 있는데 이런거다. 아니 사실 이견은 없다. 그들은 이주 노동자도 우리와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부하는 사람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소개하느냐이다. 원래 생각 그대로를 말했다가는 많은 기부자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한다. 왜? 상당수의 기부자들에게 이주노동자란 "너무 불쌍해서 도와줘야하는 존재"일뿐 자신들과 동급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센타의 문을 닫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기부자들에게 솔직히 말해야할까? 아니면 무슨 악마의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런 문제일랑 덮어두고 그 돈을 좋은데 쓰기만 하면 되는 걸까?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조차-아니 어떤 때는 그들이 더- 빈곤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이번엔 신문 얘기?

중앙일보에서는 몇 달전부터 WE START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뭐 그런 운동이다. 오늘은 신문 1면에서부터 <달라진 기부 문화 치솟는 '사랑 온도'>라고 요란을 떨어놨다.운동의 부제도 멋지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자"  그런데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이 가난의 대물림을 끊는 것과 얼마나 관련이 되는지 다소 황당하다. 그걸 보니 마치 이러는 것 같더군. "우리가 가난한 니들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하잖아. 그러니 제발 분배니, 평등이니, 생존권이니 하면서 지랄들 좀 하지마." (물론 성격도 않좋고 중앙일보도 싫어하는 내가 오버한 게 분명하다)

 내가 못마땅한 것은 한겨레마저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꽤 한참 전부터 아름다운 재단과 함께 기부문화 확산을 위한 캠페인 같은 것을 장기적으로 해오고 있다. (물론 대기업의 협찬을 받는다.) 한겨레에 대해 이미 포기한 사람도 많다. 나도 한겨레가 대단한 신문이라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말도 안되는 '진보적 대중지'라는 모토로 밀고 나가는 신문의 한계이기도 할게다 (대중의 평균수준보다 앞서 나가는 게 진보인데 진보적 대중지라니!)  그나마 한겨레에는 이런 훌륭한 칼럼도 실렸다. (이 사람은 이렇게 짧은 글로 핵심을 파고드는데 난 왜 이렇게 길게 주절거릴까? 사실 이 글에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다.)

 --- 중략---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복지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비용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복지 담당자들은 재정경제부 눈치를 보고, 시민단체들은 예산을 따내기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을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은 빈곤을 끝내는 게 아니라 연장하는 것이다. 구걸하다시피 해서 따낸 예산이나 기부금이 축소된 복지를 만회해 줄 수도 없지만, 빈곤에 대한 그런 접근이야말로 빈곤층을 사회적 부를 축내는 문제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며, 빈곤층을 양산한 자본과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빈민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왜 빈민운동이 없는가. 디파치오는 이렇게 답했다. 빈민을 돕고 대변한다는 자들이 무엇보다도 빈민을 양산하는 원리에 눈감으며, 빈민을 대신해 자본과 국가에 구걸해주는 선행으로 빈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세력화를 막았다는 것.

결국 빈곤을 둘러싼 투쟁에서 나오는 새로운 비전이 없다면 우리의 패배주의적 시각과 고갯짓은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1% 나눔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는 시민단체가 진정 빈곤을 없애고자 한다면, 그 수익을 빈민들의 생계지원이 아니라,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을 향한 빈민들의 투쟁 자금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전문 보러 가기

 

자선과 빈민운동은 상호 모순관계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절대적인 모순관계는 아니지만 모순일 수가 있다. 그 것도 심각하게 말이다. 물론 빈민운동하는 사람이 이웃의 굶는 아이를 외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경우 아무런 모순은 없다. 황당한 비유로 들리겠지만 위기에 처한 동물을 돕는 사람들에게 "사람 먹고 살기도 힘든데 왜 동물 갖고 난리냐?"라며 시비 거는 사람들이 꽤 있다. 꽤 설득력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동조하기도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주절거리겠지만 일단 변명?을 해보자면 이런거다. 동물 위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람도 위하고 다른 생명도 위하는 경우가 많다.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강아지의 목숨도 중하게 여기고 함부로 꽃을 꺽지 않는다면 이상한 건가?이처럼 상호 모순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빈곤의 문제는 이렇게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더하면 한 얘기 또하는 꼴이 될 것 같으니 일단 그만둘란다. 졸리기도 하고 말이다. 전혀 정리가 안됐지만 나중에 다시 정리할 것 같지는 않다. 할 수도 있고. 어차피 횡설수설이니까.

 

잔향-노을

* ps 오늘 신문을보니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올해 801억의 성금을 모았다고 한다. 위에서 내가 말한 100억이 아니라 1000억이 목표였나보다.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801억의 내용을 보면 무지 우울하다. 삼성 200억, 현대기아차 70억,엘지70억, SK70억, 포스코 70억 이런 식이다. 이렇게 기업체가 낸 성금비율이 87%이다.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기업에게 구걸하는 단체인가? 게다가 기업들은 기부금을 내면 파격적인 세금혜택을 받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손해볼 것도 별로 없다. 기업 이미지 관리까지 생각하면 아주 남는 장사다 2004.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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