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운동권 밴드? - 천지인

내자신이 운동권도 아니었고, 천지인이란 밴드가 있는지도 몰랐다.

마르크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좌파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사회에서 자칭 혹은 타칭 좌파라고 하는 이들 중에 진짜 좌파가 몇%나 되는지 의심스럽긴 하지!)

유물론자?

그래 거기엔 좀 해당된다.

 

아, 음악 소개하려다가 얘기가 딴길로 새는 것 같군.

어쨌든 천지인은 내가 10여년째 보고 있는 월간지 <말>에 실린 기사를 보고야 알았다.

아래에 있는 말지 기사만으로도 글이 굉장히 기니까 오늘은 노래 가사나 올리고 그만둬야겠다.

 

청계천8가 version2 _ 김성민 작사 작곡_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없는 인파로 가득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 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낯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흑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rap/ 화려한 불빛도 없이 그저 각자의 삶의 길로 수없이 지나치는 사람들 그 사이로 내 의지보다는 타의로 생겨나고 사라지고 현실의 벽 앞에 난 눈물을 떨구고 가난이라는 글자에 포기라는 단어로 끼워맞춰 보기도 했지만, 쓴 가래 뱉어 버리고 도 자식들의 꿈 있는 미래를 위해 내 한 몸이 이 거리 속에 묻혀 이 두 다리로 버텨

 


 

“팔리지 않는 시대정신은 가라.

       이게 우리들의 음악이다.”

 

 

글 이오성 레이버투데이 기자 dodash@labornews.co.kr

사진 허태주 기자 tjheo@digitalmal.com

'"우리 앨범을 두고 이번에 메이저 앨범이라고들 이야길 하는데요, 메이저가 뭔지 알려면 먼저 마이너가 뭔지 알아야 해요. 그럼 마이너란 뭐냐. 내 음악으로 내가 밥 벌어먹고 살지 못하면 그게 마이너예요. 메이저라는 게 방송에 나오고, 기획사에 소속되어야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메이저의 지위를 만들어야 되는 거죠. 전문연구직 직장인으로서 우리들의 생계와 미래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천지인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어느덧 데뷔 10년을 넘겨 진보진영 '최장수 밴드'의 반열에 오른 '2004년의 천지인'은 최근 그들을 둘러싼 호사가들의 ?리뷰와 코멘트?에 벌써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진보진영 관계자들’ 특유의 ‘단정과 재단’이 그들을 지치게 한 했다.

"한때 ‘팔뚝질’ 좀 했다던 어느 진보적 인터넷매체 기자는 ‘아직도 천지인이 활동하고 있느냐’고 사람들이 묻는다고 하대요. 그래서 5년 전부터 그런 이야길 쭉 들어왔다고 그랬죠. 그리고 이야기했어요.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집회에 쉬지 않고 나갔었다고. 어느 일간지 기사제목은 ‘운동권 밴드 천지인 세상 속으로’ 였어요. 세상 속으로라니, 우리가 세상 밖에 있었나요? 그 세상과 이 세상이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그랬다. ‘불행히도’ 천지인은 신화적인 밴드였다. 베이시스트 허훈씨의 표현대로 그들은 ‘공동체의 별’이었고, ‘노래하는 거리의 투사’였다. 그리고 그 신화는 꼭 그만큼의 무게로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떤 뮤지션보다도 더 현실에 발 딛고 노래하며 싸웠던 그들이 정작 그 현실 밖에 비켜서 있던 이들의 눈에는 ‘신화’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 ‘신화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신화가 아니다

천지인(天地人).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고 명명된 ‘신세대 담론’이 열병처럼 세상을 휩쓴 1993년,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을 들고 민중운동판에 벼락처럼 나타난 록밴드. 그들은 록이 어떻게 ‘한국’의 민중운동과 결합할 수 있는지 보여준 최초의 전형이었다. 「청계천 8갯 「열사가 전사에게」 「청소부 김씨 그를 만날 때」 「밤바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등 한 번에 열거하기도 힘든 숱한 히트곡들이 말해 주듯 그들은 ‘당대 최고의’ 뮤지션이었다.

천지인의 록이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이 ‘나라의 현실’에 발딛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령 ‘네가 커서 어른 되면 남 다스리는 판사나 정치인이 되어’로 시작하는 「네가 커서 어른 되면」은 1990년대 운동권의 혼란한 정서를 역설적으로 대변했다.

노래패들은 앞다투어 그들의 노래를 따라불렀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술집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그들의 노래만은 술집의 낮은 창 너머로 이따금씩 흘러나오곤 했다. 그해 출시된 그들의 ‘비합법 음반’은 사회과학 서점에서밖에 구입할 수 없던, 그 ‘열악한 유통구조’에도 불구하고 무려 8만여 장이나 팔려나갔다.

어떤 이는 “서태지류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던 민중가요판에서 음악의 질로 맞장 뜰 수 있었던 유일한 밴드”라고 그들을 평가한다. 당대를 풍미했던 꽃다지, 혹은 희망새의 인기가 서서히 하향세를 그려가는 과정에서도 록밴드의 정체성을 지닌 천지인의 생명력은 남달랐다. 한때 융성했던 ‘록 담론’-록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던-이 자취만 남기고 사라져갔음에도 그들은 1997년 2집 음반, 2001년 3집 음반을 발표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꿋꿋이 지켜왔다. 이제 천지인은 데뷔 이래 10년을 넘긴 몇 안 되는 ‘노래집단’이 되었다.

그런 그들이 지난 7월 ‘새음반’을 발표했다. 2년의 준비 과정 끝에 천지인의 지난 히트곡들을 베스트앨범 형식으로 다시 묶었다. 비록 ‘베스트’라곤 하지만, 이번 음반은 과거의 천지인과 확연히 달라졌다. 리듬앤블루스 풍의 랩이 가미된 「청계천 8갯와 세련된 전자음으로 업그레이드된, 그러나 그 ‘슬픔의 정서’는 한층 깊어진 「열사가 전사에게」등 모든 곡들이 좀더 깊어지고 세련돼졌다.



3.5집은 어떤 결별이자 시작

천지인은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다 해봤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앨범을 ‘3.5집’이라고 부른다. 4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낸 ‘베스트’이자, 3집 이전의 천지인과 ‘일정한 결별’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별’의 단초는 무엇보다 이번 음반이 메이저 음반사인 신나라뮤직을 통해 유통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천지인은 이번 앨범을 내며 ‘공격적인 방송활동’을 펼치겠다고도 선언했다. ‘복수의 빛나는 총탄으로 이제 고인 눈물을 닦아다오’라던 그 노래, 「열사가 전사에게」가 방송사의 심의를 통과한 ‘사건’도 기폭제가 됐다.

그래서일까. 천지인의 이번 앨범은 ‘기성언론’으로부터 유례없는 조명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일간지에 그들의 음반소개와 함께, 인터뷰가 비중 있게 실렸다. 10년을 언더그라운드로만 ‘암약’해 온 록밴드에 대한 기성언론의 관심이야말로 천지인의 생명력과 가치를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런 천지인도 한때 민중운동진영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음악을 듣던 근엄한 ‘선배’들이 “양키의 음악이 민중가요의 순결을 유린한다”며 술상을 뒤엎었던 것이다. 불과 10년 전의 이야기다. ‘원년 멤버’로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는 김정은씨(34 · 키보드)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옛날 이야기’를 꺼낸다.

“정말로 공연하다가 돌을 맞은 적도 있어요. 1994년에 광주 조선대에서였는데, 아마 한총련 출범식이었을 거예요. 사상적으로 조금 다른 학생들이 모여서 함께 집회를 하고 있던 자리에 초대받아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우리 공연을 제지하기 위해서 주최측 학생들이 몰려왔었어요. 결국 사수대들의 보호까지 받으며 노래를 불러야 했죠. 하~ 참.”

 



 

우리는 너희들의 안줏거리 밴드가 아니다

그리고 강산이 변했다. 그런데 10년 전의 천지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또다른 낯섬’이거나 ‘과거에 대한 집착’이 주류다. 그들의 방송활동 선언이나, 메이저 음반유통사와의 계약에 대해 삐딱한 시선으로 흘겨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느 영화주간지에 실린 음반평은 ‘사운드와 편곡은 비할 바 없이 세련돼졌지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청계천 8가의 벼룩시장처럼 10년 전의 투박했던 감동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정은씨는 차라리 “옛날처럼 반발이라도 하면, 보다 건강한 논의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한다. 록밴드 ‘메이데이’ 출신의 베이스 연주자 허훈씨(34)도 이렇게 항변한다.

"아니, 떡볶이도 맛있어야 팔리는 거 아닙니까. 떡볶이가 맛있으려면 떡도 좋아야 하지만, 양념도 좋아야 하고, 그릇도 맛있어 보이는 놈으로 갖춰야죠. 그런데 뭐라고요? 변했다니요? 맛도 보기 전에 함부로 이야기하고. 그런 사람이 평생 가봐야 떡볶이 맛을 알겠어요? 전노협 진군가를 밤에 홀로 들었던 사람은 거의 없겠죠? 그런데 저흰 천지인 노래를 잠자리에서도 듣고 싶은 ‘맛있는 노러로 만들고 싶어요."

이처럼 ‘좋았던 옛날’만 기억하려는 ‘무심한’ 진보진영의 팬들에게 천지인이 가진 서운함은 결국 지금 민중가요판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대중음악판이 휘청거리는 지금, 민중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이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민중가요판은 이제 정말 삭막합니다. 후배들이 없어요. 문화공연의 경우에도, 보세요. 지금 ‘자 우리 손을 잡자’라든지, ‘자유’, 라든지 그래도 우리 민중음악판에 숨통을 틔워주던 공연들이 최근 5년 동안 완전히 사라져버렸어요. 이를테면 모두 열린음악회 같은 것들에 뺏긴 거지요. 그 많던 공연 기획자들, 음반 기획자들은 또 모두 다 어디로 갔습니까? 게다가 진보진영의 음악하는 단체들은 어떻습니까. 채 10개도 안 돼요. 한번 꼽아볼까요? 꽃다지, 희망새, 소리타래, 우리나라, 젠···”

결국 채 여섯 개도 꼽지 못한 채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한참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천지인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욕을 먹더라도 악착같이, 아니 번듯하게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후일담이라도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랬다. 어쩌면 천지인이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우리마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자존심일지도 몰랐다. ‘자존을 건 생존’을 부르짖는 이들에게 그들을 알고 있다던 이들은 변절, 혹은 타협이란 단어를 들고 나와 싸움을 거는 셈이다. 김정은씨가 말을 잇는다.

“최근 천지인의 오버 진출에 대해서 자본주의화니 하는 소리들을 들으며 그런 생각까지 들더군요. 아니, 대체 유물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돈에 대해 초연하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인가. 유물론자가 돈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에요.”

그래서 기자가 다시 물었다.

- 이분법적으로 물어보죠. 그와 같은 이들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고, 맞서 싸울 겁니까? 아니면 초연해질 겁니까?.

“사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냥 ‘무시’하고 싶어요. 이 말은 초연하다는 것과는 좀 다른 건데요. 말하자면 우리는 술자리의 오징어 안주처럼 추억거리 밴드로 남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어요. 아주 사적인 경험이지만, 옛날 선배들, 특히 일상적으론 진보진영이나 또는 음악과 아무 관계없이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만나면, 니네 이래서 되겠냐, 아직도 이런 정도밖에 안 되냐며 냉소적으로 훈계를 하죠. 그래 놓곤, 돌아서면 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우리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추억처럼 씹다가 마는 거예요.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충고나 늘어놓는 그런 사람들은 무시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천지인은 왜 MR 테이프 안 풀어요?”

‘후일담이나 늘어놓는 선배’들 뿐만이 아니었다. 진보진영에 대해 가지는 천지인의 ‘문제의식’은 더욱 심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10년의 깊이가 담긴 문제의식이었다. 보컬 엄광현씨(29)가 정색을 했다.

“노래운동 진영의 선배들, 혹은 공연 관계자들을 만나면 이런 소리를 들어요. 왜 천지인은 MR(반주테이프)을 풀지 않느냐는 거죠. 답답해요. 우리는 멤버가 모두 모여 장단을 맞춰야 음악이 나오는 밴드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반주테이프를 달라는 것처럼 치욕스러운 게 없어요. 물론 우리 문화판의 여러 조건들이 밴드가 공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안 되는 건 압니다. 그래도 하나씩 바꿔 나가야죠. 결국 이런 식으로 우리 같은 밴드들이 집회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정말 화가 나요.”

엄광현씨는 “그나마 밴드가 공연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큰 집회에선 우리를 부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3월 10만 명이 모인 탄핵반대 집회에 서문탁과 조PD의 모습은 보였어도 천지인은 보이지 않았다. 천지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3.5집을 내고, 오버에서 활동하기로 하면서 꽃다지의 이은진 선배를 찾아가 물었더니 그러시더군요. 민중가요의 틀을 깰 수 있는 건 지금 너희밖에 없는데 왜 이제서야 내기로 했느냐고. 천지인은 이미 외연의 확장을 해낸 밴드고, 그래서 오버에서 승부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죠. 그리곤 그러시대요. ‘가라, 가서 열심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지만 말라’고.”

지난 8월 3일은 천지인에게 뜻 깊은 날이었다. 이날 처음으로 「열사가 전사에게」가 공중파를 타고 울려퍼졌다. 대구 MBC에서 방영하는 ‘텔레 콘서트’가 그 자리였다. 말하자면 제도권에서의 ‘첫 경험’에서 느낀 그들의 ‘감개무량의 소감’은 이런 것이었다.

“음··· 모두들 우리를 신인 록밴드 정도로 생각하더군요. 겉늙어 보이긴 하지만(웃음). 그런데 굉장히 특이했던 것은 ‘열전’(열사가 전사에게)을 부르고 났더니, 처음 들어본 이들이 이 노래를 아주 독특한 발라드쯤으로 받아들이더군요. 어떤 이들은 '열전'을 듣고 6·25 전쟁 때 사망하신 순국선열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뭉클했다고도 하고, '청계천 8가'를 듣고 어머니 아버지의 삶을 떠올렸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반응들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이제 오버그라운드로 첫발을 ‘오래된 밴드’는 스스로 자신들의 장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데뷔 10년만에 가장 튼튼한 라인업이 구성된 거죠. 사실 1집 때만 해도 모두들 군대 문제조차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들 군대 갔다 휴가 나와서 가발 쓰고 공연하기도 했거든요. 1999년에 이 멤버가 짜여졌으니 벌써 5년 동안 호흡을 맞춰 왔어요. 매니지먼트 역시 과거의 아마추어적 분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이미지메이킹’이 필요하고, 거기에 충실해질 생각입니다. 3집 앨범 낸 뒤에 대중음악계의 한 홍보담당자를 만났어요. 그랬더니 혹시 니네 멤버 중에 의사나 변호사가 있냐고 묻더군요. 없다고 했더니 아니 그러면서 어떻게 ‘홍보’를 하느냐고 반문하대요. 음악하는 사람이 음반 낸 게 무슨 기삿거리냐는 거죠. 우리는 이런 현실에 맞설 겁니다.”

 

‘팔리지 않는 시대정신’은 가라

천지인은 단단히 ‘작심’한 듯 보였다. 그것은 냉혹한 자본주의의 ‘게임의 법칙’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겠다는 각오였다.

“우리는 자부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떤 밴드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전략과 전술을 고민하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테크니션이라고 불릴 만큼의 실력은 아니지만, 더 이상 ‘팔리지 않는 시대정신’에 집착해 자멸하진 않을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9월 10일, 엄광현씨는 빈민대책 집회에 예의 ‘밴드도 없이’ 혼자 노래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늦은 시각, 그는 천지인 팬 카페(http://cafe.daum.net/bandchunjyin)에 이런 글을 올렸다. 취기 어린 그의 글엔 천지인의 진심어린 고민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음악이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날', 천지인은 비로소 ‘살아 있는 신화’로 거듭날 것이다.

‘내 노래의 파장이 좀더 컸으면 좋겠습니다..
내 노래가 내 가사가.. 좀더 많은 사람들 가슴을 후벼팠으면 좋겠습니다..
내 노랫말이 사람들 가슴을 후벼파는 대신..
머리랑.. 가슴만 아픈 하룹니다..
여기 들어오시는 모든 분들..
내게 힘을 좀 주세요..
무거운 납덩이 같은 힘을.’

 


기사를 링크시키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그냥 퍼왔다.

기사는 월간<말>의 인터넷판인 디지털말(http://www.digitalmal.com)에서 가져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