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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올라가기

젠장 벌써 7시군. 6시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하긴 어제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

텐트치고 라면 끓여 먹고 나니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그 시간에 술을 먹기 시작했으니.

반딧불도 보고 밤하늘의 별도 보고

계곡 물소리도 들으며 술한잔 하다보면

친구와 뭔가 그럴 듯한 대화를 나눌 것도 같지만

우리의 일상이 누추하듯 우리의 대화 내용도 그냥 그렇고 그런 것들뿐이다.

늦게 일어났다고 또 라면을 먹을 수는 없으니 밥해 먹어야지.

어제밤에 귀찮아도 쌀을 담가두길 잘했군.

내가 한 밥이지만 정말 예술이야.

 

 

나이를 확인하다 ?

 

한신계곡-> 세석산장-> 장터목 산장-> 천왕봉-> 하동바위

코스를 정했으니 열심히 올라가야지.

난 그렇게 힘든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이 녀석은 자꾸 나이 탓을 하네.

지가 맨날 대충 라면으로 때우고 운동도 안하니까 그렇지

어디 꼭 나이 때문이겠나.

하긴 맨날 술에 쩔어 살던 나도 별로 나을 건 없다.

 

내 눈치를 보며

"좀 쉬었다 갈까?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쉴 것 같은데..."

어쩌겠는가. 쉬어야지.

"천왕봉까지 가려면 시간 안모자라냐?"

"걱정마. 충분해"

 

"야 여기 기억나냐? 10년전에 우리가 수영했던 곳인데"

나같은 길눈에겐 다 거기가 거기 같은데 기억날 리가 있나.

"수영했던 기억은 난다."

한여름은 지났다지만 그래도 8월이고, 날도 이렇게 더운데 수영이나 하고 갈까?

어제밤 계곡물에 씻을 때도 별로 차갑지 않았잖아.

 

 

어라? 물이 왜 이리 차가운 거야.

기껏 옷도 벗었는데 수영은커녕 발도 못담그겠네.

5초정도만 발 담그고 있어도 발이 시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군.

분하다. 10년만에 수영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야, 예전엔 이렇게 차가운 물에서 어떻게 수영을 했지?"

친구 왈 "그땐 한여름이었고 제일 팔팔할 때였잖아"

그래도 좋다. 수영은 못즐겼지만 눈과 몸은 이렇게 즐거우니.

계곡물은 그냥 마셔도 찜찜하지 않고.

그런데 이렇게 좋은 한신계곡 쪽에는 사람들이 왜 없지?

이쪽 코스가 좀 험해서 그러나?

 

 

길을 잃다.

 

올라갈수록 점점 험해지는군.

친구놈은 원래 그랬다치고,

난 왜 갑자기 힘이 쫙 빠지고 다리가 후들 거리지?

배고픈 건가?

친구가 건네준 쵸코바, 이거 완전히 마약이군.

먹자마자 힘이 확 솟네.

이런 효과를 전문용어로 '직빵'이라고 하나?

 

 

바위와 나무들이 온통 이끼로 덮인 모습이

플래툰 같은 베트남전 영화에서 본 정글 느낌이다.

이끼낀 바위는 정말 미끄럽다.

난 이렇게 계속해서 미끄러지며 헤메고 있는데

이녀석은 잘도 올라가네.

 

 

"범수야, 길 잃어 버린 것 같다."

엥? 이녀석 여기 출신 맞아?

지리산을 마치 제 앞마당처럼 얘기하더니.

반달곰이 좋아한다는 연죽만 지천으로 널려있군.

풀에 쓸리고, 나뭇가지에 긁히고,

에고 에고 길을 찾아랏!

 

 

막판에 많이 힘들었지만 어쨌든 1차 목표지점인 세석산장에 도착.

이제부터는 능선을 타고 가기 때문에

좀 전처럼 그렇게 가파른 곳은 없다고 하니 다행이군.

근데 날씨가 왜케 좋다냐?

 

내 눈엔 별 것도 안보이는데 이 녀석은 뭘 그리 감탄을 하지?

"야~ 구상나무가 살아남았구나!"

 

귀신같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빨지산들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

토벌군이 산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아직도 흙을 파보면 검은 재가 나온다나.

모든 나무가 불타 버린 그 곳에

구상나무 군락을 만들겠다고 묘목을 심었는데

자생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놈들이 이렇게 멋지게 살아남았으니 친구녀석이 감탄할밖에.

 

저기 보이는 곳이 천왕봉이라고? 저길 언제가냐?

시간도 꽤 된 것 같은데.

사진이고 뭐고 빨리 빨리 가야겠다.

 

그래도 촛대봉 꼭대기에는 올라가서 내려다 봐야지.

 

이 녀석은 이제야 마약을 복용하는군.

하긴 마약 대신 어제 절에서 얻어온 오이와 과일을 잔뜩 먹기는 했지.

 

"저~기 보이는게 바다야, 구름이야?

여기 올라오면 맑은 날에 바다가 보인다고 하던데."

 

 

어찌하오리까?

 

장터목 산장 가는 길.

핸드폰이 안터지니까 시간도 안나오네.

시계는 핸드폰에 내장된 건 줄 알았는데 시간도 전파를 통해서 받나 보다.

시계를 찬 사람에게 시간을 물어봤는데.

 

아이고 큰 일 났다. 벌써 3시가 다 돼 간다고?

우린 1시반이나 2시쯤 됐는 줄 알았는데.

아직 장터목도 제법 가야 하는데, 그리고 점심도 아직 안먹었는데.

천왕봉은 포기해야 하나?

 

시간이 넉넉하다고 자신있게 떠든게 미안했는지,

길을 잃어 시간을 허비한 것이 미안했는지

친구녀석은 자꾸 엄한 소리를 한다.

"산이란게 꼭 정상에 올라야 맛이냐?"

"천왕봉이 지리산에서 최고봉이라니까

사람들이 꾸역꾸역 올라가는 것뿐이지 사실 별 의미는 없다."

 

맞는 말이긴 한데 거의 다 와서 못올라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

장터목에 도착하긴 했는데 시간 여유가 너무 없다.

해떨어지면 랜턴도 없는데 말이다.

이 녀석은 죽어도 못가겠다고 하니

이 참에 짐을 다 내려놓고 혼자 올라갔다 와야겠다,.

생라면 반개를 후다닥 깨먹고 출발하려는데

친구녀석은 아무래도 걱정스러운가 보다.

올라가는데만도 1시간은 족히 걸릴텐데 1시간안에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을까?

그나마 한시간도 거의 맥시멈으로 잡은건데.

에라 중간에 돌아오더라도 일단 가보자.

 

 

급한 마음에 너무 오버를 했나보다. 아주 죽겠구만.

이 상태로는 시간안에 도저히 못갔다 오겠다.

10년 전쯤에 천왕봉을 못올라 갔다면 굉장히 짜증났을 것 같은데

이젠 그런 일쯤은 그냥 넘길 만한 여유는 생긴 것 같다.

아님 스스로에게 세련된 변명을 할만큼 교활해진 건가?

뭐 아무려면 어때.

가을에 다시 오지 뭐. 내년에 오던가.

1808M 제석봉,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다.

 

사진이나 몇장 찍고 가야겠다.

안내판을 보니

예전에 도벌꾼들이 극성을 부렸는데

그들이 증거를 없애려고 불을 질렀다고 써있다.

친구 말에 의하면 도벌꾼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라는데

증거를 없애려고 불을 질렀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아무래도 우리 국군이 빨치산 잡으려고 불질렀다고 쓸 수는 없어서 이렇게 쓴거 아닐까.

'도벌꾼'을 '토벌군'으로 바꾸면 딱 맞는데.

그러고 보니 어제 문수사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던

'지리산 공비' 어쩌구 저쩌구 하는게 생각나는군.

 

이번 산행 때 쓸려고 미니 삼각대를 샀는데 한 번은 써먹어야 할 것 아냐?

셀프샷 한 장.

자, 이제 열심히 내려가야 겠다.

 

 

2003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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