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하루

2008/10/10 07:33

1.

술은 마음으로 먹는 것이다

그 깊이 만큼 술이 들어간다

생각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2.

삶이 짙게 제 윤곽을 드러낼수록 조금은 두렵다

 

3.

서울이라는 괴물은 밤에도 죽지 않고,

새벽에도 결코 처지는 것 하나없이 움직인다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

 

4.

분명히 화가 났다

자고나면 감정의 찌꺼기로 치부해도 될련만 새벽에 깨어나 곰곰히 생각해보아도 분명히 화가 났다

잠시 두고 볼 일이다.

   

5.

이번 주말에는 만사 제쳐두고 이책을 읽어야 겠다.

 

출처 : 우석훈. 2008. [괴물의 탄생].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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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 - 거시적 단상 

 

[ 박노자 ] 만감 일기장     출처 :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6180

 

 

역사한답시고 밥을 벌어 먹고 사는 중생인지라 거의 꿈꿀 때도 역사에 대한 꿈을 많이 꿉니다. 그리고 이리 저리 산책하면서 시간 보낼 때에 - 오래간만에 관악산에 올라 등산 좀 하고 그 산신령님께 인사를 드리고 성주암에서 불공을 드렸던 오늘처럼 - 늘 역사가 떠오릅니다. 이것도 일종의 망상이고 고뇌의 근원인 집착인데,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대책이 없어요. 덜 성숙된 근기인 듯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등산했을 때에 갑자기 남한의 정치, 사회사가 하나의 그래프처럼 등식화돼서 머리에 떠오른 것입니다.  정치 사회사의 주된 과정이라면 국가 (관료기구)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아닌가요? 만약 그 관계를 중심에 넣고 대한민국사를 시대구분하자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구분이 될 듯합니다:

 

1. 제1기 - 국가 기구 비대화, 시민 사회를 완전히 압도함:

1948-1980년. 원래 분단 국가이자 주로 식민 관료에 의해서 주도돼온, 외세에 의존하는 외삽적 성격이 강한 대한민국이 애당초에 차라리 "연성 국가"에 가까웠지만 1950-53년 동란기를 거쳐서 많이 강경화됐어요. 일단 다른 친미적인 주변부 독재에서 보기 드문 60만 대군이 생기고, 경찰들이 일체 반체제적 움직임을 원천 봉쇄하는 기술을 익히고 사법부는 조봉암을 법살하면서 진보적 시민사회를 도살하는 경험을 쌓았죠. 그래도 병역거부자가 징병 대상자의 20%에 달했던 1950년대에 국가가 그 조직적 지배력이 약하고 개별적 관료들의 사리사익에 너무 많이 좌우되는 등 "도둑 정권" (cleptocracy)적 특징마저 보였지만 군부에 장악되면서부터 달라졌어요. 일제 말기를 모델로 하고 미국의 지원에 무조건 의존할 수도 없는 군부인지라 사회를 아예 병영화시키고 말았어요. 유신 시대 초기, 철도청에 취직하려면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던 그 시대에 겨우 그 여맥을 잇는 재야만 빼고 본다면 대한민국이 어쩌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참 비슷했습니다. 양쪽에서 수령주의적 개발독재, 군사화가 극성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 절정은 물론 광주 학살이었죠.

 

2. 제2기 - 시민사회의 대국가 투쟁기:

1980-1997년 - 유신이 무너지고 광주의 충격파가 번진 뒤에 남한에서 다시 한 번 "급진주의"가 회생되면서 시민사회와 국가의 "결투"가 시작됐어요. 민주 노조, 진보적 NGO, 마르크스주의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지적 모색 등등 대한민국이 지금 자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다 그 기간에 피를 흘리면서 쟁취된 것이죠. 또 시민 사회에 밀리고 밀리는 역대 정권들이 바로 그 때에 참 중요한 양보를 많이 했어요: 해외여행 자유화부터 민주노총 인정까지 말씀입니다. 사실, "가슴을 열고 대한민국을 받아들이자"면 얌전한 영국 노동당을 벤치마킹했던 전향 지식인 조봉암보다 1980년대의 그 수많은 위장 취업자와 골방 철학자들을 받아들여야 할 걸요. 어쨌든 이 시기의 절정은 김대중의 "대통령화"이었어요.

 

3. 제3기 -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의 포섭:

1998-2007년 - 권력화된 1970-80년대 "재야"의 일부 (김대중型의 1970년대적 재야, 유시민型의 1980년대적 재야) 그 자체가 이미 재벌과 기존 정치권에 의해서 충분히 "순치"된 상태이었는데, 권력화되자마자 재야에 남아 있는 동료들을 빨리 순치시키기 시작했어요. 온갖 "시민 연대"들이 국가 보조금을 받고 국가 포르젝트를 따내고 그 지도자님들을 정부 각처에 보내고 정책 입안 과정에 가끔씩 불러져 의견 제시의 특혜를 얻는 대가로 구속되고 분신되는 노동 운동가, 짓밟히는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잃어갔던 그 화려한 시절이었어요. 전대협 간부 출신들이 정부에 들어가서 이라크 파병을 거의 당연지사로 받아들였던, 인간이란 과연 어떤 동물인가를 고심케 만들었던 시대.

 

4. 제4기 (미완) - 국가에 의한 통제와 탄압의 점차적 심화:

2007년 이후: NGO들을 하위 파트너로 끼워줄까 했던 국가는, 이제는 그들에게 당근보다 채찍을 더 자주 쓰게 됐죠. 글쎄, 이렇게 해서 NGO의 "시민 사회 지도자"들이 다시 한 번 1980년대적 본심으로 돌아가 노동자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노동운동과의 든든한 연대를 모색하게 되면 역사의 발전이 계속될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 정당이 마땅히 해야 할 걸요. 단, 지금으로서 아직도 역부족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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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면서 살아야지

2008/10/01 13:28

[엄마가 뿔났다]가 끝났다

병원에 있을 때는 놓치지 않고 보려고 애쓰는 드라마였다

집에 텔레비젼을 두질 않아 계속 보질 못했다

 

나이 62살에 휴가라고 우겨(?) 독립하여 사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오늘 사무실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운받아 마지막회를 보았는데 '흐뭇한' 기분이다.

 

'무심한 세월에 실려 늙어가겠지...잘 살았달것도, 그저 못 살았달것도 아닌 그저 그런 한평생, 그래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머... 이만하기도 감사해야지...그래 감사해야지...하지만 다음 생애에 나도 내이름 석자로 불리면서 살아보고 싶다'

 

집으로 복귀(?)하여 다시 일상의 연말을 보내는 엄마의 말이다.

 

'무심한 세월'이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세월이 마음이나 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니 얼마나 정확한 성찰인가 

私心이 있는 인간이 어떻게 세월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나 더, '감사해야지, 그래 감사해야지' 라는 말도 참 좋다.

 

그래서 나도 감사해야지, 그래 감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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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먼저일까? 관계가 먼저일까?

 

 

- 관계란 무엇일까?

 

관계(Relation)라고 하는 것은 철학적인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개념이다. 관계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독특한 성격을 가졌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결혼을 하면 부부관계가 생기지만, 이혼을 하면 관계가 없어진다.

 

관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실체적으로 존재 한다 라기 보다도 두 개 내지 여러 개 항이 일정하게 모이면 성립되었다가 흩어지면 없어지는 재미있는 성격을 가졌다.관계가 성립하려면 관계를 맺는 항들, 개별자들이 있어야 한다. 만약 개별자들이 사라지면 관계도 사라진다.

 

그래서 개별화(individualize)가 안 되어 있으면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물이 흘러가면 흘러가는 물 안에서는 관계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반드시 어떤 구분, 개별화가 있어야 한다. 물과 강둑의 관계, 물과 바닥의 관계, 하다못해 물결이 있어서 물결들끼리의 관계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개별화가 되어서 여럿(多)이 성립을 해야, 관계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체성이 깨져야 관계다.

 

그런데 개별화가 되어 있고 여럿(多)이 성립돼 있어도, 이 여럿과 여럿이 완전히 즉자적(卽自的)으로 오로지 타자에게 열리지 않고 자기에게로만 닫혀 있으면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개별자들의 정체성(identity)이 깨져야 관계가 성립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완벽하게 자기 정체성을 보존하면 관계라는 것이 생길 수 없다. 왜냐하면 관계를 맺으면 자기 정체성도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탁자가 완벽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보존하면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런데 A가 탁자에 음료수 병을 놓으면 압력을 받게 되고 탁자가 변하게 된다. 정체성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그래야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완벽하게 즉자적(an-sich) 존재들만 있는 곳에는 관계가 없다.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연속성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관계가 성립한다. 즉 완벽하게 닫힌 동일성이 열리고 타자와의 연속성이 있을 때에 관계가 성립한다. 그래서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항들에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관계 속에서 나와 네가 태어난다

 

그런데 어떤 생각에 따르면 반대로 관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항들이 의미가 있게 된다고 한다. 즉 관계가 존재하고 개별자들이 그 항들을 채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A는 B의 선생이다.’라는 것이 하나의 관계이다. 이 관계, 추상적인 관계가 더 기본적이고, 더 먼저고, 그 다음에 여기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자와 자하 등의 항들이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먼저, 더 우선(primary)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항들이 있어서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가 이 세계를 이루는 더 근본적이 구조고 개별적인 항들은 항상 그 관계의 어느 한 항으로만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정리해보면, 앞의 생각은 개별자 중심이다. 개체들이 존재론적으로 우선하고, 관계라고 하는 것은 그 개체들 사이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또 없어지기도 하는 묘한 것이란 생각이고, 두 번째 것은 우리 눈에 직접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존재론적으로 더 심오한 것은 관계들이고, 개별자들은 그런 관계들 속에서 태어난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한국 사회를 보면 철수, 영희, 민수 등 그런 개별자들이 있고, 그런 개별자들이 부부관계를 맺고, 선생과 학생관계를 맺고, 부모 자식의 관계를 맺고, 가게 주인과 단골손님의 관계를 맺지만,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는 관계들의 체계가 있고, 즉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관계라는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근본문제: 문제

 

20세기 중엽을 장식했던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도 결국 이 문제이다. 실존주의는 어떤 개별자의 주체성, 어떤 개별자의 내면의식에서 출발해서 다른 것을 구성하는 사유라고 한다면, 구조주의는 이 관계의 발견이다.

그 문화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당장 눈에 안 보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그런 관계들과 체계를 발견한 것이 구조주의이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대립은 바로 이 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히로마쓰 와타루(1933~1994 일본 현대 철학자)라는 철학자는 ‘형성적 관계(形成的 關係)’와 ‘존립적 관계(存立的 關係)’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생겼다가 사라졌다하는 관계를 ‘형성적 관계’라고 하고, 좀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 더 근본적인 관계, 예를 들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사실과 같은 그런 관계를 ‘존립적 관계’라고 한다.

 

이상으로 간략히 관계에 관한 중심적 논의의 틀을 살펴봤다. 관계에 대한 관심은 뛰어난 철학자들에게도 커다란 관심이었다. 그들은 관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들이 생각한 관계의 개념을 조금 더 살펴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성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이정우(철학자)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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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어머니가 보고 싶다

2008/09/27 09:04

평일에도 간신히 9시에 출근하거나 지각 또는 땡땡이를 치는 놈이

쉬는 토요일 아침 6시 반쯤에 잠을 깨서 뒤척이다가

그냥 사무실로 출근했다.

 

사무실 가는 길에

'아버지의 뜨거움과 어머니의 끈질긴 성실함 중에 난 어머니의 부지런함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명의 피가 내 안에 흐를텐데,

이제는 뜨거움보다는 끈질김이나 인내 같은 것들이 더 많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추석에 시골집에서

이제 나이 먹고 늙어서 쉬어도 되겠건만 몸을 놀리지 않는 어머니의 몸-오랜 세월 바지락을 까서 지문이 사라지고 긁힌 상처만 있어 바지락 껍데기처럼 민들민들하게 보이는 손, 그 손에 후시딘을 로션 바르듯 발라 손을 비비고는 손을 살짝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호근이가 나한테 어머니는 제 몸의 '모든 것을 다 연소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완전연소'

자기 몸의 모든 에너지와 마직막 호흡까지 다 써버리고 가는 것.

 

나는 내 몸을 불완전 연소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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