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08. 5. 7.

2008/05/08 00:21

2008. 5. 3 ~ 5. 6. 두번째 일본여행. 후쿠오카, 구마모토, 나가사키를 둘러봤다.

나가사키의 평화공원과 원폭자료관이 내면에 새겨짐. 원폭자료관 앞, 머리 뒤부터 등쪽으로 섬뜩함과 차가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 보살. 15만명. 1945. 8. 9. 타버린 사람들. 녹아버린 유리병과 철구조물. 검은 땅. 생각보다 큰 원폭탄. 그리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보존한 원폭자료관

 

다녀와서...'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미친소 이야기들을 하루종일 둘러본다.

문득 태안앞바다 기름 덩어리는 어떻게 됐나......많은 사건들이 축적되고 그렇게 미래가 만들어진다.

 

빨래를 하고 손톱을 깍고 냉장고를 닦고 선풍기를 틀어 냄새가 없어지길 기다린다.

 

밤이 깊어간다. 삶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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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광우병과 "狂개발병" - 한국 지배층의 병리 현상들 

만감: 일기장 2008/05/05 02:28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3227 


이번에 광우병 발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지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전면 개방하겠다는 MB정권의 결정은 MB의 실체를 참 잘 보여줍니다.  MB 자신도 미국 재계 인사들 앞에서 그 결정을 발표할 때에 "FTA의 조속한 체결을 염두에 두고.."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이지요.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삼성전자의 휴대폰, 현대, 기아의 자동차를 미국 시장에 약간 더 내다파기 위해 국내 농민들을 울리고 모두들의 건강을 위험에 노출시켜도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1970년대 형의 "목숨을 건 수출 증가 작전"인 셈이지요. 물론 자신의 목숨은 아니고 "밑에것"들의 목숨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운하를 파서 금수강산을 다 파괴하든 미친 소의 고기를 들여 사람들을 병나게 만들든 무슨 수를 써도 건설, 전자, 자동차 부문 재벌들의 이윤을 높이겠다는 이 "狂개발주의자"들은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는 것입니다.  제품을 무조건 많이 내다팔 수록 해당 수출국이 "선진국"이 되고 세계모범생이 되는 그 "자본의 황금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새로운 시대, 즉 만성화된 식량 위기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3억 명씩이나 되는 인도, 중국의 신흥 중산계급들이 구미인 만큼의 육류 등 프로테인 섭취를 하자면, 그리고 식물 재료로 연료를 만들자면 커다란 양의 곡물은 식량용이 아닌 사료용, 재료용으로 쓰이게 되는 것이고, 그 만큼 곡가가 계속 올라가게 돼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상 기후에 의한 지속적 흉작들, 중국 등지에서의 공업에 의한 농지 잠식 효과 등을 가산해보면 "싼 식량"의 시대가 지났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선진국이란 휴대폰을 마구 만들어 내다파는 "수출 공장형" 국가가 아닙니다. 일단 필요한 식량을 자국민에게 공급해주고 잉여를 팔아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나라는 이제 패자 (覇者)가 되죠. 한국이 과연 그러한 나라의 대열에 속하고 있나요?


우리가 미국 본 받기를 하도 좋아하는데, 미국의 식량 자급률은 125%입니다. 그 부분부터 본 받음은 어떨까요? 광활한 토지 덕분이라 하겠지만 토지가 광활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식량 자급률을 70%선 이상으로 올리고 또 전략적으로 계속 올립니다. 식량 자급률 132%인 프랑스는 토지가 광활하나요? 식량 자급률 96%인 독일은 인구 과밀 지역 중의 하나 아닌가요? 식량 자급률이 유럽에서 낮은 편에 속하는 영국에서도 그래도 74%에 달합니다. 유럽 농정의 최근 추이를 보자면 그 자급률이 꾸준히 높아져 갑니다. 독일에서 같으면 1970년의 서독에서 68%에 불과햇는데, 이제는 거의 100%를 향해서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이명박이 독일인에게 제대로 배우자면 운하만 보지 말고 농가 방문도 좀 하시지 그래요. 그런데 개발을 신격화시키는 자들은 농사를 천하게 여겨서 그런지 농가에 가서 보고 배우는 법이 없는 모양입니다. 한국 개발주의자들이 모통 모든 것을 배우는 건 일본한테 배우는 것인데 농정만큼은 일본적인 방법을 배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역시 모든 것을 "오로지 공업과 토건"에 건 일본에서는 1970년의 식량 자급률은 60%이었는데 그 뒤로는 계속 떨어져서 지금은 40% 정도가 됐습니다. 지금 그 쪽 밀 자급률이 14%까지 떨어져 세계 식량 위기 관련으로 상당히 위험한 입장에 처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밀 자급률이 0,1%인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일본의 식량 자급률이 40% 안팎이 돼서 일본 언론에서 커다란 문제가 제기됐지만 일본보다 일본적인 난개발, 묻지마 개발 길로 가버린 대한민국에서는 28%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로 산업화된 국가 치고는 그러한 국가는 어디에서도 없습니다. 지금도 반도체를 팔아 번 돈의 약 절반을 식량 수입에 쓰고 있지만 이제 몇 년후에 세계적 식량 위기가 조금 더 심화되면 그냥 거덜날 상황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도 운하를 파고 광우병 쇠고기를 사겠다는 통치자보고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국회다운 국회가 있었다면 벌써 탄핵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정부는 지금 "해외 식량 기지" 등 일종의 아류 제국주의적 프로젝트를 들먹이지만 이제 곧 도래될 신보호주의적 세계적 분위기에서 그러한 프로젝트의 성공률은 아주 낮아요. 이윤 문제를 떠나서, 단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 사회의 모든 가용 자원을 동원해 우리 농촌을 살려야 합니다. 유럽 연합의 전체 농산물 생산은 1년에 1200 억 유로 정도인데, 그걸 만들기 위해 370억의 직불제 보조금을 투입하는 것이지요. 즉, 보조금 액수는 전체 농산물 생산액의 약 30%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농민을 위한 재분배 정책이 없다면 어찌 저이윤 부문인 농업을 갖고 식량 독립을 이루겠습니까? 독립에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식량 독립이 되지 않으면 언제 기아의 위험이 닥칠지 모를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가격을 빠를 수록 지불하면 좋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좌파 정부, 즉 사민주의적 경향의 정부가 집권하게 되면 맨먼저 할 일은 대기업 법인세 인상과 그 인상분을 농업에 투입시키는 정책일 것입니다. 광우병 수입으로 휴대폰 수출을 늘리려는 이번 정권 정책의 정반대일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생존이 보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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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바로 휴식...

2008/05/07 00:23

[박노자] 나의 사랑, 列子 

만감: 일기장 2008/05/04 03:37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3213 


한번 제게 한 기자 분께서 "列子를 왜 좋아하느냐, 도교 철학에 무슨 진보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느냐, 고대, 중세 귀족들의 세상 도피의 방법이 아니었느냐"라고 물어보신 적이 있었어요. 글쎄, 특히 남북조 시대의 현학풍은 그랬다고 볼 수 있지만 도가 원전들을 보면 아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제가 학생 시절에 한문을 익혔을 때에 제게 가장 감동을 준 列子의 이야기 중에서는 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고은 공부에 지쳐 공자에게 고하기를 '쉴 곳을 원하옵니다'. 공자가 가로대 '인생에서 쉴 곳이란 없소'. 자공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제게 쉴 곳은 전혀 없단 말씀오리까?' 공자가 가로대 '저 무덤의 구덩이를 보라. 윤택해 보이지? 으뜸가는 것 같지? 크지? 아름다운 솥처럼 보이지? 그게 쉴 곳인 줄로 알라!' 자공이 말하기를 '크도다, 죽음이여! 군자는 당신을 휴식으로 알고, 소인은 당신에게 복종하도다. 공자가 가로대 '사여, 이걸 똑똑히 알라. 인간은 흔히 삶의 즐거움을 알아도 삶의 고통스러움을 모르고, 늙으막의 고달픔을 알아도 늙으막의 여유로움을 모른다. 죽음이 나쁘다고만 알지 죽어서 쉰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


"子 貢 倦 於 學 , 告 仲 尼 曰 : 「 願 有 所 息 . 」 仲 尼 曰 : 「 生 無 所

息 .」 子 貢 曰 : 「 然 則 賜 息 無 所 乎 ? 」 仲 尼 曰 : 「 有 焉 耳 . 望 其

壙 , 如 也 , 宰 如 也 , 墳 如 也 , 如 也 , 則 知 所 息 矣 . 」 子 貢

曰 : 「 大 哉 死 乎 ! 君 子 息 焉 , 小 人 伏 焉 . 」 仲 尼 曰 : 「 賜 ! 汝 知

之 矣 . 人 胥 知 生 之 樂 , 未 知 生 之 苦 ; 知 老 之 憊 , 未 知 老 之 佚 ; 知

死 之 惡 , 未 知 死 之 息 也"


이게 뭐가 진보냐고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조용한 태도는 "지욕" (止慾), "지족" (知足)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적당히 조절하고 남들의 욕망들도 나의 욕망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나의 욕망만을 주장하는 태도를 버린다는 것이지요. 죽음이 바로 휴식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서울대 입학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자본주의의 생산/소비의 주기는 바로 "극도로 발전된 자기 중심의 욕망"을 자극해 이용하는 것인데, 도가의 가르침은 이 욕망에 대한 조절권을 "나"에게 돌려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총체성"의 이해지요. 삶도 죽음도 "나"의 일부분이다, 죽음도 삶만큼 긍정시하고 좋게 여겨야 한다 - 이렇게 보는 사람은 결국 우주삼라만상 그 전체를 "나"와 같은 것으로, "나"를 만물 중의 유기적인 하나로 알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혐오스럽다기보다는 한같 무의미한 우둔한 이들의 작난일 뿐입니다. "국가 경쟁력", "국익", "우등반"... 이러한 언어 그 자체는 도가를 익힌 사람에게는 웃음을 자아낼 뿐이지요.


하여간 저는 마르크스와 열자, 그리고 법구경을 동시에 읽으면 오히려 제 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천적 운동을 하시는 분들께 열자와 장자 등을 적극적으로 권고해드립니다. 그러한 정도의 책을 읽어야 "무슨 단체/조직의 회원", "무슨 사상의 추종자"가 아니라 진짜 "생각하는 갈대"가 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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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미래로 가는 오래된 네 가지 철학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시나요?

사람들은 보통 자신에 초점을 두고 행복을 추구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둘의 사고를 종합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나도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윤리적 이기주의라고 말할 수 있고, 후자는 공리주의와 의무론적인 입장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묵자-남에게 잘 하면 결국 내가 행복하다

그리고 이 양자를 수용하면서 내가 남에게 베풀고 잘 하는 것이 결국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중국의 묵자가 대표적입니다. 묵자는 남을 사랑하는 이유를 결국은 내가 잘 되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남에게 행위하는 것에 어떤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소크라테스-누구나 윤리적 원칙에 따른는 삶을 실천해야 행복하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행복한 삶이란 자신이나 타인 모두가 똑같이 어떤 윤리적 원칙에 입각해서 성실하게 삶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적절하게 훈련을 받으면 선을 발견할 수 있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도 이러한 원칙에 따르는 삶을 죽을 때까지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원칙주의자로서 행복관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노자-유약함의 철학과 무위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다

절대적인 선과 그에 따르는 원칙을 강조한 소크라테스에 반해 노자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어떠한 일도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합니다. 노자에게 있어 이러한 자연스러운 삶의 상징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에 있습니다. 노자에 따르면 강한 것은 부러지기 쉽고 따라서 강한 것은 금방 죽어 없어집니다. 굳이 따지자면 노자는 강한 것을 상징하는 남성의 원리보다는 약한 것을 상징하는 여성원리에 입각한 삶과 정치가 오래갈 수 있으며, 이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스러운 삶으로서 조화와 균형을 중요시한 노자는 행복한 삶의 근거지로 소규모 농촌에서의 삶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 초기 기독교회-절대자와의 연관 속에서 의미를 발견함으로서 행복을 추구한다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한 반응은 노자와 같이 무위자연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절대자와의 연관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행복을 가꾸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형성될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은 언제 세상에 종말이 올지 모르는 긴박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종말의식이 신약성서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 16-18)


위 내용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의 결론을 보면, 주의 날이 임박했으니 깨어 정신 차리고 있으라는 교훈과 그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음으로서 현재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가지며, 그러한 의미가 있기에 현재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감수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와의 연관 속에서 보면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있기에 행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행복에 관한 철학은 누구에 가깝습니까? 오늘,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적용되고, 의미를 갖는 행복철학의 원리들을 참고하여 나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가꿔보는 것은 어떨까요?



- 서동은 <행복론의 철학적 탐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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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정신이 없는 시대

2008/04/17 17:59
 

[박노자] 정신이 없는 시대


[출처] “씨알의 소리" 기고문: 정신이 없는 시대 

만감: 일기장 2008/04/16 21:42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2875 


밑에다가 제가 방금 써놓은 <씨알의 소리> 200호 기고문을 첨부합니다. 비관적인 글로 보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요즘 특히 "학교 자율화"와 같은 망동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제게 고통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졸업 반 때에 입시 공부를 하긴 했는데, 길어야 하루에 3-4시간 동안 따로 집에서 자습하는 정도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낮 3-4시에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이 "입시 공부"를 하는 동안에 고대, 중세 아시아 지역의 "아세아적 생산양식"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의 글을 읽느라고 정신 없었습니다. 입시 공부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사학에나 한 눈을 팔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소련의 상황이었는데, 학교에서 하루에 15시간 정도 갇혀 있는 한국 아이들을 보면 "이게 그냥 범죄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무리한 노동으로 과로사나 당할 노동자들을 그렇게 키우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요... 하여간, 이게 제 글입니다


"요즘 필자에게 두려운 일이 하나 생겼다.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보기가 두렵다. 내가 3년이나 살았던 정겨운 나의 서울이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해 죽을 지경인데도, 신문을 보기가 두렵다. 신문을 볼 때마다, 인간으로서 참아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하도 많이 나오기에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다. 예컨대 학교에서 “자율화”가 이루어져 이제는 성적순으로 “열등반”과 “우등반”을 편성해도 좋다는 기사를 읽으니 정말이지 거의 심장이 마비되는 듯한 감이었다. “자율화”? 파시스트 독일의 수용소 대문에 “노동은 너희들을 자유로이 한다”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던데, 수용소에서 “자유”를 들먹이는 것이나 학생 사이의 “계급화”가 공식화된 학교에서 “자율”을 들먹이는 것이나 오십보백보인 듯하다. 다음 단계는 어디까지일 것인가? 전교 몇 등인가를 특별한 명찰에다 써놓고 이를 교복에다가 착용케 할 것인가? 아니면 “열등생”들에게 아예 교복을 다르게 입게 할 것인가? 이제는 “우등생”과 “열등생”의 급식과 학습 공간이 차별화되는 학교도 생긴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다음 단계는 더 과감하리라고는 쉽게 상상되어진다. 옛날에는 도스토에브스키가 “아이의 눈물 하나 흘리게 하는 대가로 천당에 가는 일이라면 차라리 천당을 거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의 눈물 따위는, 친구를 사귈 때에까지도 맨 먼저 성적 순위와 부모의 아파트 평수를 확인하는 것이 요즘 일반화돼 가는 나라에서는 별 것도 아니다. “열등반” 학생들이 하루 종일 울어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말을 잃는 그들의 부모 말고는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입시 지옥의 문제는 “눈물”의 문제가 아니고 “피”의 문제다. 한국 10대 후반기 청소년들의 사망 원인으로서는 교통사고 그 다음으로는 두 번째는 자살이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47%의 응답자들이 자살 충동을 느꼈고, 13%가 구체적인 자살 방법도 궁리해봤고, 6%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물론 미국만 해도 청소년 중에서의 자살 시도한 이들은 8-10%에 달하긴 하지만, “학업 스트레스”, “성적에 대한 교사와 부모의 꾸지람”이 자살 충동의 주된 원인으로 등장되는 것은 한국의 특징이다. “우등반”과 “열등반”의 세계에 갇혀 있는 아이들에게는 죽음만이 돌파구로 보이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그런데 성적을 비관한 아이의 자살이나, 입시에 “실패”한 아이의 자살은 대한민국에서 “충격적” 뉴스가 되어 지속적인 관심을 끄는 경우가 많은가? “실패자”가 – 비록 아이의 몸이라 해도 – 경쟁에서 치었으면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느 사이에 거의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몇 명의 낙오자가 자살하든 미치든 학교의 경쟁력, 나아가서 대한민국 전체의 경쟁력이 강화되기만 하면 뭐가 문제냐는 것은 다수의 사고 방식이다. 자칭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끔찍한 전체주의에 어울릴 법한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의 논리가 잘도 통한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도전을 직면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기적 위기와 지구 전체의 환경 위기가 서로 맞물려 미증유의 위기 상황을 유발한다. 한편으로는 무리한 도시화와 공업 시설의 농토 잠식, 연료 생산을 위해 곡물 재료의 무모한 남용, 이상 기온으로 빚어지는 흉작 등으로 말미암아 세계적 식량 위기가 도래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부실한 주택 금융 등과 같은 사기적 수법을 기반으로 했던 “금융 자본주의”의 신화가 산산 부서져 세계 자본주의 핵심부에서 금융 경색, 소비 위축, 장기적인 침체 내지 경기 후퇴의 조짐이 나타난다. 식량 자급률이 27%밖에 안되고 수출 의존률이 70% 넘는 한국은 지금 곧 “태풍의 눈”, 즉 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될 확률이 높다. 세계 곡물가격 폭등으로 인한 빈민층 (즉, 인구의 약 20%)의 생존 위협 가시화와 인플레이 압력 강화, 교역 조건 악화로 인한 수출 둔화 추세와 대기업 위주의 경제 구조에서의 신규 고용 창출의 침체, 늘어나기만 하는 청년 실업률…. 생계형 자살과 생계형 범죄의 대폭적 증가, 전체적인 사회적 불안의 확산 등은 이미 뻔히 내다 볼 수 있는 미래다. 위기와 불안의 늪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합리적으로, 상생적으로 사고한다면 마구 미쳐가는 “세계 시장” 대신에 우리 사회가 모두들의 이해 관계를 고려하여 시장 영역에 대한 통제를 대폭 높여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화가 빈민층 확대의 원인인 만큼 기업의 이윤율을 다소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비정규직 고용 사유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불가피한 경우 이외의 외주화를 법적으로 금하고, 부유층의 세금 부담을 대폭 늘리는 동시에 그 돈으로 빈민층을 위한 공공 고용도 늘리고, 군비 동결과 복지 비용으로의 점차적 전환의 쾌거를 이루는 등 “약자 중심의 경제”를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시대의 과제다. 우리가 자신들에게 고백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극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무한 경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피고용자, 즉 잠재적 약자가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 교육 정책으로 봐서는 이명박의 정부는 이 미증유의 위기에 정반대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약자에게는 경찰 국가의 총칼이 닥치고, 강자에게는 “경쟁”의 미명하에 그 영역의 무한 확충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백골단의 부활”과 재벌과 대통령 사이의 “핫라인 개통”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상징적이지 않는가? 이 길로 끝까지 가면 그 종착역은 브라질에서 볼 수 있는 현상, 즉 빈민굴들을 통제하는 마약 밀매 집단들과 경찰들 사이의 정기적이다 싶은 총격전이 벌이지고, 신규 고용이란 계약도 없는 “비공식 부문”에서만 이루어지고 소수의 정규 고용자가 계속 줄어들기만 하는 상황일 것이다. 아이들의 사교육비를 버느라고 부업 삼아 일본의 유흥가로 “갔다 오는” 한국 중산층 하부의 부인들을 보시기 바란다. 이와 같은 “부업”이 정상이 되고, 성매매와 각종의 범죄가 일상의 유기적 일부가 되는 것은 “열등반”과 “우등반” 사회의 미래다. 사실, 그 미래에 접어들어 “사회” 그 자체도 증발될 것이다. 제발 “열등반”으로 전락되지만 않기를 바라면서 끼라면 끼고 까라면 까는, “개성”을 “독특한 명품의 소지”나 “특별한 성형수술의 성공적 실시”쯤으로 아는 “절대 순응형” 인간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돈과 공포일 것이다. 표피적인 “민주”가 남는다 해도, 이 “사회성이 없는 사회”의 내면은 파시스트적일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미래를 원하고 있는 것인가?


함석헌이 옛날에 “평화”의 평 (平)자의 깊은 의미를 설명할 때에 “막힌 기운을 뚫게 하는 것”, “시원한 정신 상태”, “답답함이 없는 정신의 자유”라고 이야기했다. 시원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서는 평화가 있다. 아침 7시에 등교하고 저녁 10시에 귀가하는 청소년의 기운은 어떤가? 그가 – 아직 군대에 끌려가지도 않았지만 – 이미 “평화” 아닌 “전쟁” 중에 있는 것이고, 그를 이 전쟁으로 내몬 이 정신병적 “사회” 자체도 매일 매일씩 부단한 “자기와의 전쟁”을 치른다. 홉스가 “모두와 모두의 전쟁”이 원시 시대의 상황이라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후기 대한민국의 현실일 뿐이다. 고등 야만이라 할까? 결국 이 전쟁 판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따로 없다. 남는 것은 다수의 스트레스와 불쾌한 하루하루, 상당수의 고질적 우울증, 늘어나기만 하는 끔찍한 범죄, 마음 속에 누적된 분노를 풀어보려고 방화라도 할 수 있는 새로운 “남대문”을 찾으러 다니는 무수한 “원한 (怨恨)의 인간”들이다. “열등반” 출신들도, “우등반” 출신들도 똑같이 이 대한민국 (大恨憫國)에서 서로를 짓밟으려고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다가 고통스러운 노후를 거쳐 고통스러운, 한이 많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고득락 (離苦得樂)의 미거 (美擧)를 이루자면 똑같이 태어나고 똑같이 함께 살다가 죽는 중생 사이의 우열 (優劣)을 가리는 우 (愚)부터 벗어나는 것은 첫 순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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