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여성]


- 니체가 보는 세 부류의 여성

니체가 여성혐오주의자라는 오명을 얻게 된 계기는 비교적 명확하다. 여자는 봉사하며 행복을 느낀다느니, 학구적 성향의 여성들은 성적 결함이 있다느니! 그가 남긴 어록들로도 충분하다. 그의 험담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왜 그럴까?

니체가 생각한 세 부류의 여성, 거세된 여성과 거세하는 여성, 거세와 무관한 여성이다. 이 세 여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니체가 말하는 진짜 여성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니체가 본 첫 번째 여성: 여성을 누가 타락시켰는가

니체가 본 첫 번째 여성은 남성이 그려낸 이미지다. 그는 『즐거운 지식』에서 “남자들이야말로 여자를 타락시켰다. 남자들이 이미지를 만들었고 여자의 이미지도 거기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남성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내면화가 문제라고 했다. 니체는 여성의 이미지가 남자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이미지이고, 권력이 만들어낸 이미지이며 여성은 그 이미지를 연기한다고 했다. 내면화된 여성 즉, 남자들이 생각한 이미지를 연기하다가 내면화되어버린 여성이다.

이것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긍정적인 여성은 이미지를 전략으로 쓰지만, 부정적인 여성은 상상한 장소에 있으려고 한다. 니체는 이런 여성을 거세된 여성이라고 부른다. 거세된 여성은 연기하다가 자기 것이 되어버린 여성이다. 결핍으로 정의된 여성, 남근적인 사회 속에서 갖지 못한 존재로서의 여성, 뒤집혀있는 존재로서의 그것은 거세된 여성이었고 니체는 그것을 혐오했다.


- 니체가 본 두 번째 여성: 남성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

니체가 본 두 번째 여성은 남성들이 상상한 이미지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이다. 그들은 진정한 여성을 찾아 스스로 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니체는 그 예로 페미니스트를 든다. 이것은 남성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보고, 남성 같은 여성이라고 비판한다.

이미지에 갇힌 것도 문제지만 독단적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도 문제다. 그것은 남성적인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여성해방운동, 평등에 대한 권리와 요구의 문제점은 자신이 비판하고 싶어하는 남성의 어리석음, 독단적 이미지를 답습한다는 것에 있다. 영민한 여성이라면 분명히 본래 있던 남성들의 잣대를 부끄러워했을 텐데 이 여성들은 이것을 승리인양 취해버렸다는 것이다.


- 니체가 본 세 번째 여성: 삶과 구원을 낳는 역활

니체가 본 세 번째 여성은 거세와 무관한 여성이다. 니체는 세 번째 여성을 사랑했다. 여성의 생식기는 항상 거세와 관계되어 왔다. 남근이 상실된 마이너스 남근, 결핍 결여로써 해석되어 왔다. 거세는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생산이고 그것은 대지이다. 니체 메모 중 ‘무엇이 내 삶을 유지시키는가.’라는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 니체는 임신이라고 써 놨다. 차라투스트라를 보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구토가 무엇을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해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입덧을 했다. 임신을 한 것이다. 입덧이 심해질수록 아기를 낳는 것으로 나아간다. 위버멘시에 가까이 갈수록 새로운 것이 잉태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시를 원하는 아버지이고, 위버멘시인 자신이며, 자기 안에서 위버멘시를 낳은 자이다. 네가 너의 미래를 임신하고 있느냐라는 말은 너는 자궁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말이다.


니체의 말에는 여성을 폄하하는 얘기가 많다. 특히 학문하는 여성을 싫어했다. 물론, 그는 학자 자체를 싫어했다. 학자도 싫어했는데 공부하는 여성은 얼마나 싫어했겠는가?

하지만, 니체 철학에 깊숙이 다가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리와 동등한 자리에 여성을 올려놓기도 하고, 완전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도 말하며 여성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즉, 니체가 비판한 여성은 남성에 의해 그려진 여성, 남성의 이미지를 연기하고 나중에는 내면화하기까지 하는 그런 여성이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니체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을까?

- 고병권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중에서.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라!]


우리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규정 속에서 살아왔고, 규정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규정된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아직도 사실 너무나 힘든 일이다. 부모님의 마음에 꼭 드는 것,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 직장 상사의 말을 따르는 것, 인생의 진리를 따른다는 것 등은 너무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세계가 규정된 형태가 없고 변화만 하는 세계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어쩌면 더 힘들고 심지어 절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이를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즐거운 세상으로 생각한다. 니체가 말한 삶은 죄를 규정하는 보편적 규범을 제거한 하나의 놀이다. 자유라는 것은 환상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진정한 진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환상과 오류들을 활용해 내 삶의 재료로 삼는 것이라 정의한다. 즉, 니체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규범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자유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에서 그것을 벗는 것뿐만이 아니다. 색안경을 끼지 않고도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각자가 보는 방식으로 세상이 존재하고, 자신이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라고 말한다. 여태까지의 가치는 진리가 아니라 빈곤한 환상에 불구하기에 더욱 다양한 환상을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진리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풍부하게 만든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규정된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니체의 귀가 될 필요가 있다. 정상성을 깨고, 비정상적인 니체의 말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니체는 “나를 가장 즐겁게 만든 사람은 과일 행상 할머니들이었다.”라는 말을 한다. 그들은 자신이 과일을 살 때 가장 맛있는 과일을 찾아주려고 안절부절 못해 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좋고 나쁨의 기준을 확실히 가지고 있으며, 이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월적인 보편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 자신의 행복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철학의 목적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지, 형이상학적인 기준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것이 좋다, 이것이 나쁘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규범에 따라 죄를 규정하고 스스로 죄인이 될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를 받아들여 세계를 풍요롭게 받아들이고 풍요롭게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조원광 <니체로 세상 보기>중에서.



[나는 강자일까 약자일까?-강자와 약자의 구별]


우리는 흔히 지배자는 강자, 피지배자는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강자와 약자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면 강함과 약함은 무엇일까? 바로 주체와 활동이 결합되어 있느냐, 분리되어 있느냐의 문제이다. 선거 때마다 보면 알 수 있듯이 후보들은 대부분 국민을 위한 일꾼이 되겠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라면 결국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닌 국민을 위해 손발이 되어주는 일꾼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강자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 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가 그 힘과 결합되어 있느냐 분리되어있느냐의 문제를 놓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 힘이 작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체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강자인 것이다.


강함과 약함은 갖고 있는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분리된다. 근대는 약자가 승리한 역사이다. 어떻게 약자가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약자가 강해져서 강자를 이긴 게 아니라 강자를 약자가 되게 함으로써 이긴 것이다. 이것은 병든 자가 병을 퍼뜨려 건강한 자를 이길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즉 강자를 약자로 만듦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고, 그의 힘을 그와 분리하게 함으로써 부정의 권력의지가 작동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고병권은

“학교 다닐 때 단체를 조성해서 학생운동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여기서 적을 만났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적은 전경이 아니라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해봤는데 안되더라고 말하며 말렸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행동의지를 꺾는다.

나중에는 나 역시 말리던 그들과 똑같아지고, 그 세력은 점차 커진다. 그렇게 문화가 지배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가장 큰 적은 전경이 아닌 오랫동안 학생운동, 민중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니체의 표현을 빌려 ‘귀에 무거운 납 방울을 떨어뜨리는 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무거운 납덩어리가 내 몸을 짓누르면 어쩔 수 없이 몸이 가라앉고 마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능력 혹은 의지로부터 그것을 박탈시킨다. 사람들을 본인과 똑같이 만드는 것, 약자는 그렇게 이긴다. 강자를 약자로 만들어서 승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리학자들 사유를 보면 힘이라는 재미있는 개념이 있는데, 승패가 갈라지면 우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에는 양적 차이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모든 힘에는 내면적 질들이 있다. 내면의 질은 물리적 양과는 다르다. 결국, 강함과 약함은 지배와 피지배, 승리와 패배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자와 약자로 나뉘는 것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우리는 강자가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고, 승리하는 자가 꼭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약자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고병권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중에서.

 

*** 출저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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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상상적 동일시

2008/01/13 16:07
 

- 라캉의 상상적 세계

라캉은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의 길목에 있는 철학자다. 라캉의 사유는 굉장히 복잡하다. 현대사상에서, 가장 심오한 사람 중의 하나다. 라캉은 우리 인생의 출발점을 imaginary 한 차원, 상상적인 차원으로 본다. 상상적인 차원이라는 것은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차원이다. 보통 아기가 태어나서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기 전의 아기의 세계, 그것이 상상적인 세계다.


우리가 보통 imagination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사물을 지각해서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도 imagination이고,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그 이미지들을 변형시키는 것도 imagination이다. 지금 우리는 보통 후자로 사용한다. 그래서 라캉이 말하는 imagination도 지각한다는 뜻의 이미지이다. imaginary 한 차원은 어떤 이미지의 차원인데, 이 이미지의 차원은 상상적 동일시, 상상적 동일화, 상상적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 아기의 입장에서 상상적 동일시는 무엇인가?

아기는 태어나면 시간 대부분을 주로 엄마하고만 생활하게 된다. 이것이 양자관계 또는 이자관계다. 정신분석학에서 엄마, 아빠라는 말을 쓸 때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엄마, 아빠만 뜻하는 게 아니라 넓은 의미의 엄마, 아빠를 뜻한다. 예를 들어 옛날 황제는 거의 다 유모가 키운다. 보통 중국의 황제들을 보면, 엄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유모를 좋아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보통 할머니가 많이 키워준다. 이때의 엄마라는 말은 꼭 실제의 엄마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아기를 맨 처음 안고 키우는 그 사람, 설사 엄마가 없어 아빠가 키워도 정신분석학 이론적으로는 이게 엄마인 것이다. 그 아기와 엄마의 관계가 이자관계다.

아기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나고, 저 사람은 엄마라는 주객 이분이 없다. 주객 이분이 없는 관계가 이미지의 관계다. 객과 주의 거리가 생기지 않는, 그런 어떤 관계가 상상적 동일시라고 볼 수 있다.


- 상상적 동일시: 윤동주[소년]의 예

윤동주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윤동주의 소년이라는 시이다. 여기서도 상상적 동일시의 예를 볼 수 있다. 예컨대 내가 하늘을 봤더니 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들고, 볼을 쓸었더니 손바닥에 파란 물감이 묻어났다. 이 부분에서는 주객 분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하늘을 봄으로써 나도 하늘이 되고 하늘도 내가 되는 것이다. 이건 주체고 저건 오브젝트가 아니라 저것과 내가 이미지에서 얽히는 것이다. 이것이 imaginary 한 차원이다. 이것은 어떤 언어, 룰, 법, 주객 분리가 없는 세계다.


즉, imaginary 한 세계는 양자 관계, 이자 관계다. 그 단계에서는 어떤 언어나 룰이 개입하기 이전에 그 이미지들의 세계, 상상적 동일시의 세계다.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 이정우 <현대 사상의 ‘개념-뿌리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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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홍익인간의 바른 의미

2008/01/13 15:26

오늘날 한국인은 弘益人間을 흔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로 풀이한다. 우리가 ‘弘益人間’의 ‘益’에 해당하는 본디 낱말을 생각하지 않고, ‘益’을 ‘利’로 새겨서 弘益을 ‘널리 利롭게 한다.’로 풀이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한국인은 ‘益’을 흔히 ‘더할 益’으로 새기지만 有益, 國益, 益友 등에 쓰이는 ‘益’의 경우에는 ‘도울 益’으로 새겨야 한다. 有益은 ‘어떤 도움이 있음’을, 國益은 ‘나라에 도움이 됨’을, 益友는 ‘도움이 되는 벗’을 말한다. 이때 益은 단순히 어떤 것을 더하기보다는 더욱 좋아지도록 더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은 어떤 것이 더욱 좋아지도록 더하는 일을 ‘돕는 것’으로 말한다. 이런 까닭에 제헌절 노래에서 고조선의 건국정신을 기리는 부분에서 益을 ‘도우다’로 풀이하고 있다. 즉,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 예순 남은 일이, 하늘 뜻 그대로였다”에서 ‘인간을 도우셨다’는 부분에 나오는 ‘도움’은 홍익인간의 ‘益’을 풀이한 것이다.

한국어에서 ‘돕다’는 ‘되게 하다’, ‘답게 하다’의 뜻으로서 어떤 것이 본래의 속성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나를 도우는 일은 나를 나답도록 만드는 일이고, 너를 도우는 일은 너를 너답도록 만드는 일이다. 홍익인간에서 益은 바로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도록 도우는 일을 말한다.

사람들이 益을 利로 새기는 것은 利益, 즉 ‘利를 더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利益에서 益은 ‘돕는다’는 뜻이 아니라 ‘더하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홍익인간처럼 문장 속에서 益이 단독으로 쓰였을 때, 그것을 곧장 利益으로 풀이하는 것에는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도우는 일과 달리 이익을 더하는 일은 반드시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홍익인간의 益을 ‘利롭게’로 새겨서 弘益을 ‘널리 이롭게 한다.’로 풀이하면 본래의 뜻에서 크게 벗어나게 된다.

- 항공대 최봉영 교수 논문「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교육목적에 대한 검토」중에서 -

<요약>
弘益人間의 益의 개념
1. 益을 利로 새기는 것은 利益, 즉 ‘利를 더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利益에서 益은 ‘더하다’는 뜻을 지닌다. 利益을 더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이하 할 수 없다.
2. ‘益’을 ‘도울 益’으로 새겨야 한다. 有益은 ‘어떤 도움이 있음’을, 國益은 ‘나라에 도움이 됨’을, 益友는 ‘도움이 되는 벗’을 말한다. 이때 益은 단순히 어떤 것을 더하기보다는 더욱 좋아지도록 더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은 어떤 것이 더욱 좋아지도록 더하는 일을 ‘돕는 것’으로 말한다.

 

弘 : 클 홍,   益 : 도울 익,   弘益 : 크게 돕는다.

 

◈ 오늘 하루도 ‘크게 돕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 출처 : 사이버서당에서 제공하는 전자우편 [고전의 오솔길] www.cyberseod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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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용서의 유익

2008/01/13 00:39

용서의 유익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당신의 마음에서 놓아주라.
그 상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놓아줄 수 있는가?
용서하는 것, 그것만이 그들을 놓아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이 용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보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릭 워렌의《회복으로 가는 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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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천박한 욕망

2008/01/05 00:25

출장 다녀와서 집에 들렀다

전주에서 택배로 보낸 이불짐을 정리하니 제법 든든하다

달력과 무화과즙을 같이 보내준 전주식구들이 고맙다

 

한참을 뭘할까 하다가 오늘 또래 직원들끼리 술한잔 하기로 한 자리에 연락받고 나간다

저녁먹기에는 약간 늦은 시간이라 분식점에서 2500원짜리 라면 하나 먹고 지하철을 탄다

 

맥주를 세잔, 아니 네잔을 다 못 마셨나

그냥 서성거리는 듯한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오는데 따뜻한 하얀 쌀밥 한 상 먹고 싶었다

그렇게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없는데 따뜻한 뭔가가 느껴지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기어이 집 근처 순대국밥 집에서 5000원짜리 의정부순대국밥 한그릇 먹었지

 

다 먹고 걸어오는 길에 괜히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가 너무 부르기도 하고....

참 식욕이라는 것이. 천박한 식욕...

 

나는 아직도 욕망을 긍정하는가?

 

 

 

p.s. 내일이 토요일이라 금요일 밤은 마음이 참 한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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