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념] 눈부처

2007/11/21 02:18

술 먹고 집까지 걸어올때까지만 해도 차갑게 춥기만 했는데 문득 창밖을 보니 눈이 온다

 

눈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

 

당신은 눈처럼 내려서 눈처럼 사라졌다

 

당신은 눈부처

 

아니면, 바다로 나리는 소금인형

 

참 그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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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특이한 것과 특수한 것

2007/11/20 17:09

들뢰즈/가타리 정치철학에 대한 글들을 읽다 보면 "특이한 것"과 "특수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le singulier"를 "특수한 것"으로 번역한 경우들을 가끔씩 본다.

그러나 "le singulier"와 "le particulier"는 정확히 구분되어야 할 개념들이다.

 

특수성이란 고전적인 개념, 특히 헤겔의 "Besonderheit"에서 유래한 개념으로서, 일반성(Allgemeinheit)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은 "종과 유"라는 고전적인 개념쌍의 한 변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수한 것들의 집합이 일반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 두 개념 사이에서는 "매개"라는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헤겔 정치철학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매개"로서 대의정치를 상기해 볼 수 있다)

 

반면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특이성(singularite)"은 일반-특수라는 계통학적 질서를 모두 지워버리고 내재면(plan d'immanence) 위에서 점선(點線)으로 그려지는 존재들, 즉 '이것(haecceitas)'으로서의 존재들을 뜻한다.

 

비유컨대 특수성들은 대학의 학과들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인문사회와 자연, 인문과 사회, 문학과 역사와 철학,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등등의 특수-일반의 수목형(樹木型) 구조가 성립한다.

 

이에 비해 특이성이란 이런 구분을 모두 지우고 "학문"이라는 내재면 위에서 문자 그대로 "특이한" 전공을 점선으로 만들었을 때 성립한다.

이것은 대학이 아니라 국가라는 전체를 두고서 생각했을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국가라는 체계 내에서 모든 것들은 결국 "특수한" 것들이기에 말이다.

 

어떻게 "특이한 것들"을 창조할 것인가, 여기에 정치의 핵심이 있다.

 

 

* 출처 :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http://www.sowo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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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닷물

2007/11/16 02:20

0선배가 나한테 물었다

 

바닷물이 왜 짠지 아냐?

원래 바닷물은 짜지 않아요

 

바닷물이 왜 짜다고 생각하냐?

글쎄...나트륨...잘 모르겠는데요

 

바닷물은 3%의 소금끼 때문에 짜다.

......

 

난 생각했다.

맞아. 바닷물이 짠 이유는 3%의 소금끼 때문이야.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태운다'  바로 이거야~!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

'바닷물이 3%의 소금끼 때문에 짤까'

'바닷물이 3%' 때문에 짤 수 있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

.

.

 

이제 비로소 알았습니다.

바닷물은 3%의 소금끼 때문에 짤 수 있는 이유는 나머지 97%가 소금끼를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코가콜라에 3%의 맹물을 넣어도 97%의 콜라는 변하지 않습니다.

 

3%가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유는 남은 97%가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97%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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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어떤 것

2007/09/14 17:24

죽지 않는 어떤 것


두려움 없는 사람,
이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
죽지 않는 어떤 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내면의 존재, 불멸의 존재, 내면 깊숙한 곳의
영원한 존재를  안 사람이다.
그때 그곳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

- 오쇼 라즈니쉬(Osho Bhagwan Shree Rajneesh). 류시화 옮김.  2006. [장자, 도를 말하다].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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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역설-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되 거북이를 조금이라도 앞에 보낸 상태라면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제일 처음 거북이가 있던 제1의 지점까지 가는 동안 거북이 역시 나름대로 더 가게 되고,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더 간 제2의 지점까지 가는 동안 거북이 역시 나름대로 더 가게 되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북이를 조금이라도 앞서 보내주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고대 헬라스 지역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C.)의 제자, 제논(Zenon, 490-430 B.C.)의 역설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니 정말 그럴 듯한데 현실에서는 완전히 모순되지 않는가? 제논의 이러한 역설은 일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낯설고 이질적이며 한편으로는 폭력적이다. 논리적 사유가 평범한 일상을 치고 들어와 뒤집는 폭력적인 힘,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제논의 역설에 숨은 비밀

처음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던 지점까지 간 것을 <사건 1>이라 하고, 거북이가 다시 앞서 간 지점까지 아킬레스가 간 것을 <사건 2>라 해보자. <사건 1>과 <사건 2>는 계속되긴 하지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은 그 자체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같은 나무를 꽃이 피기 전의 나무와 꽃을 피운 나무로 나누게 되면, ‘지속’이 사라짐으로써 나무는 전혀 다른 각각의 나무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의미로 <사건 1>과 <사건 2>는 전혀 다른 거북이들과 전혀 다른 아킬레스들 간의 두 경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을 극단적으로 밀고 들어가 아주 극미한 무한소의 영역에 적용시키면,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완전한 정지가 나타난다. <사건 1>과 <사건 2> 뿐만 아니라, 몇 억분의 1초, 아니 그보다 훨씬 잘게 쪼개면 시간이라 부를 수도 없는 무시간의 시간성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지속’은 사라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나름의 새로운 역설을 생각하게 된다. 정지된 상태로 계속 유지되는 것 또한 지속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완전한 정지와 완전한 지속(자신 속에 정지의 계기를 전혀 갖지 않는 지속)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역설이다. 만약 이를 영원이라고 한다면, 영원은 이렇듯 완전한 역설이다. 완전한 정지를 영원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변화가 전혀 없기에 영원이라 하는데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완전한 정지이기 때문이다. 즉, ‘완전한 정지’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하는 데서 영원을 말하게 되기 때문에 역설인 것이다.

  

영원의 역설은 죽음의 추상화

제논의 역설이 지니고 있는 낯선 폭력적인 힘은 이렇게 시간을 파괴하고 역설 중의 역설인 영원한 정지이자 정지된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죽음의 폭력성을 암암리에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의 폭력성은 정지의 폭력성이고, 영원의 폭력성 역시 정지의 폭력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폭력성은 영원의 폭력성에 근거한 것임을 혹은 그 반대로 영원의 폭력성은 죽음의 폭력성을 추상화한 데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열리는 영원과 영원을 통해 열리는 죽음의 역설을 말이다.

  

- 조광제 <시간, 철학을 만나다-플라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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