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panopticon) 뒤로 숨은 권력의 전략! - 감시를 통한 훈육



“죄인의 가슴과 사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하고,국왕을 살해하려 한 단도를 집어 유황불로 지지고…(『감시와 처벌』1부「신체형」 중)”


법률 기록에 의하면 ‘감금’ 이전의 형벌은 ‘수형자의 신체’, 즉 끔찍한 체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들은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였고, 비용 부담이나 집행 절차에 있어 국가가 관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또한 잔혹한 처형 장면으로 대중의 폭동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권력은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된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차츰 과시적 의식으로서의 체형, 그리고 감금형과 강제노동 등 새로운 형태의 형벌이 도입된다. 이것을 진보된 형태의 형벌로 보고 인본주의적인 변화로 진단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푸코는 그것에 회의적이었다. 형벌의 변화는 한계에 부딪힌 권력이 그 대안으로 전략 · 전술을 바꾼 결과일 뿐이라고 보았다.


일망 감시체제: 파놉티콘


18세기 말 영국의 제레미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이름의 아주 특수한 건축 설계도를 고안했다.


독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하나는 안쪽을 향하여 탑의 창문에 대응하는 위치에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에 면해 있어서 이를 통하여 빛이 독방을 구석구석 스며들어 갈 수 있다. …역광선의 효과를 이용하여 주위건물의 독방 안에 감금된 사람의 윤곽이 정확하게 빛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탑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망 원형 감시의 이 장치는 끊임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있고, 즉각적으로 판별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적 단위들을 구획 정리한다. …충분한 빛과 감시의 시선이, 결국 보호의 구실을 하던 어둠의 상태보다 훨씬 수월하게 상대를 포착할 수 있다. 가시성의 상태가 바로 함정인 것이다. (『감시와 처벌』중)




애초에 파놉티콘은 감옥 건축을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파놉티콘이 감옥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병원, 정신병동, 공장, 병영, 즉 개인들의 감시와 거기와 관련된 조직의 문제를 전제하는 모든 기관들의 구축에도 확대 적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상에서 흔히 시간을 보내는 거의 대부분의 기관들이, 권력으로 하여금 우리를 감시하기 쉬운 구조로 지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러한 감시 형식은 놀라운 훈육효과를 허용한다. 개인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계측과 검증이 가능하며 보다 쉽게 통제가 가능한 개인들을 추출해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파놉티콘은 학생, 수감자, 병자, 혹은 광인에게 빛 속에서 항시 그들을 염탐하는 감시인들이 있고, 잠재적으로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준다. 이러한 가시성의 체제 하에서 매 순간 감시 받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각각의 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억압한다.

덕분에 권력은, 감시를 통해 생명을 가두거나, 제거하거나, 억압하지 않고서도 개인의 신체와 행동에 훈육효과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감옥의 구조로 권력의 숨은 의도를 파헤친 푸코의 놀라운 연구 성과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권력에 훈육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자각을 깨우쳐준다.

--- 심세광 <미셸 푸코 가로지르기> 중에서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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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죽지 않는 사람

2007/03/19 09:54

보르헤스는 [죽지 않는 사람]을 빌어 불사에 대해 말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불사의 존재임을 확인한 후, "불락에서 [천일야화]를 필사하기도 하고, 사마르칸드의 감옥에서 장기도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하며 수많은 삶을 산다. 불사의 존재란 이처럼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죽는 존재고, 그 모든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삶 안에 담을 수 있는 존재다.

죽음을 거부하고 기존의 동일한 삶을 지속하려는 집착을 던진다면, 사실은 우리 모두가 불사의 존재임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 한계레신문 2007. 3. 16. [책과 지성], 이진경 [고전다시읽기] 소설로 담은 '색즉시공 공즉시색'(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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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제가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만감: 일기장  2007/03/17 17:11 

  

 출처: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980   


사람이 왜 신을 찾게 됩니까? 레닌의 고전적인 설명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탐색하지 못한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원시공동체 해체기의 인간의 집단을 갖고 이야기한다면 맞겟지만 이미 완숙한 계급사회 안에서의 한 개인의 다양한 내면적인 움직임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종교발생론이 아닌 듯합니다. 붓다가 병들고 가난하고 노년이 된 사람의 모습,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직면한 것이 수행의 계기가 됬고, 예수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의 "악마"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또 하나의 목소리겠지요?) 속삭임에 유혹을 받았다가 결국 세속의 권력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 계기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모순이든 계급 사회의 현실적인 모순이든 우리가 당장 현실적으로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할 때에 인간에게 종교심, 즉 자기 내면 안에서의 "신성한 것", 모순 해결의 능력을 갖는 "영원하고 안락스러운 것"을 찾으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저 같으면 제가 부딪쳤던 모순이 "폭력"이라는 사회의 현상이었는데, 그 시기는 아주 일렀습니다. 지금 기억 같으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한 번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위대한 조국 전쟁" 관련의 영화가 또 방송됐습니다. 소련이 철저하게 군사화된 사회이었는데, 텔레비전의 일정표 중에서 상당부분은 소독 전쟁 ("위대한 조국 전쟁") 때의 소련군을 찬양하는 "국책 영화"들이 차지했지요. 대체 전쟁 영화란 다 폭력적이지만, 그 때에 제가 본 영화는 개중에서도 좀 특별했어요. 감독에게 무슨 사디즘 취향이 있어서인지 그 영화의 여러 "클라이막스" 중의 하나는, "영웅적인 소련 군인"이 독일 여군의 가슴에 칼을 꽂아 그 여군을 "장렬히 처단"시키는, 꽤나 긴 장면이었지요. 죽어가는 "적"과 그 옆에서 "아, 참, 내가 수고했구먼!'과 같은 만족스러운 표정의 "아군의 용사"를 카메라가 약 5분간 클로즈업한 것이에요. 그런데 제게 있어서는, 그 장면의 효과는 감독이 의도한 바와 정반대이었어요. 제 어머니와 같은 중년의 여성을 근육질의 남성이 칼로 찔러 죽이기에, 저는 "불쌍하게 죽은" 그 여성에 대한 동정과 함께 제 어너미도 누군가가 이렇게 죽여 제가 고아가 될 것 같은 절망과 공포만을 느꼈을 뿐이지요. 그러다 영화를 보다가 씩씩해야 할 남아 초등학생답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 후로는 "국책 영화" 시청을 가급적 피했는데, 학교에서 교련을 시키고 전쟁게임까지 시키는 것이 하도 부담이 되기에 근육질의 남성들이 무기라는 나쁜 노리감을 갖다가 남을 괴롭히는 일이 없는 좋은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한 번 이렇게 "국책 영화"의 폭력성에 놀란 뒤에는, 제가 이 세상에 폭력을 금하는 윤리체계가 있는가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어요. 소련의 공식 윤리체계는 "적군의 살해" 정도를 당연지사이자 "남자다운 일"로 봤기에 제가 기독교에 눈을 돌렸는데, "애국애족"을 외치는 것은 주류 기독교 집단, 즉 희랍정교회도 마찬가지이었어요. 그러다가 병역거부의 전통을 자랑하는 비주류 교파 - 소련말기에는 그게 주로 침례교파이었어요 - 에 관심을 가졌다가 그 쪽의 아주 엄격한 "집단적 규범"에 압박감을 느껴서 결국 원시 불교의 경전을 읽는 것을 본업으로 삼게 됐어요. 저는 고교시절에 <법구경>과 <숫타니파타>의 초역본을 읽고서야 자기 내면에서의 분노와 그 분노의 원천인 탐욕, 아집, 어리석음을 없애고 자기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역시 "남성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을 찾았어요. 남을 칼로 찌를 생각과 능력이 없는 저 같은 사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결국 제게 종교적 심성을 심어준 것은 "폭력", 그것도 알고 보니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었던 셈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미 고교시절부터 인식한 이 문제의 복합성은, "폭력"의 사회적인 연원에 있었던 것이지요. 군대를 운영하는 국가,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계급, 지배계급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계급적 지배 질서가 있기에 결국 칼침 놓는 일을 찬양하는 영화들이 만들어져 저와 같은 사람들을 울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불교 같은 종교의 경전들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는 내면의 길, 즉 팔정도를 가르치지만, 내면이 아닌 외면의 차원에서는 불교가 역사상 한 번이라도 계급적인 평등을 외치거나 승려가 아닌 속인의 병역거부를 제창했던가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삼계도와 같은 특수 불교 종파, 그리고 일부 특수 개인 빼고는, 불교는 일부 성직자의 평화로운 "내면의 구도" 가능성을 지배계급의 폭력자로부터 보장 받기 위해 폭력자와의 대결/투쟁은 물론 폭력자에 대한 솔직하고 바른 말까지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지요. 사상으로서의 불교는 제 초발심에 그대로 맞지만 제도로서의 불교에 대해 늘 느끼는 것은 심한 배신감일 뿐입니다. 종교적 심성의 초발점은 "모순"과의 만남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만남의 과정에서는 종교적 심성은 생기지만, (계급 사회의 하나의) 제도로서의 종교는 이 "모순"의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금으로서는 주로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를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여 절에 가지 말자!"라고 외치면 제 자신도 마음의 일면에서 미안함을 느끼지만 사실 부처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승방에서 예비군 군복이 걸려 있다는 것이 어쩔 수없다는 셈친다 하더라도 <법구경>을 갖다가 설법하시는 분들이 총들고 살인 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계속 하시고 계시다면 - 즉 병영화된 사회와 불교 교의의 기본적 충돌에 대한 의식조차 없다면 - 이건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초발심도 배반하고 짓밟는 "가사 입은 도둑"의 집단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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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사화’ 판치던 절망시대 정치권력 정당성 묻다

고전 다시읽기 / 조식 <남명집>



지·리·산이란 ‘앎이 다른 산’(智異山)이다. 앎이 다르면 꿈이 달라지고, 꿈이 다르면 삶이 달라진다. 이미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은 도회나 들에서 살 수가 없다. 지리산은 앎과 삶이 다른 사람들을 품어온 산이다. 파르티잔, 이현상과 남도부가 지리산으로 숨어든 까닭도 그 산이 ‘앎이 다른’ 이들을 품어온 이력 때문이리라.


16세기 조선 중엽, 도회(서울)와 들(김해)을 벗어나 지리산 밑으로 파고든 이가 있었다. 짱짱한 유교의 시대였음에도 짐짓 ‘다른 생각’을 품은 <장자>에서 이름을 따 남명(南冥)으로 자호한 이였다. 조식(1501~1572)! 이황과 한 해에 태어난 유자가 그였다. 하나 고작 책상물림의 백면서생은 아니었다. 방울을 옷 춤에 달아 거기서 나는 소리로 제 행동거지를 단속한(敬) 엄한 ‘선비’였으면서 동시에 칼로써 정의(義)를 세우려던 ‘사무라이’이기도 했다. 곽제우가 그의 제자였음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유자로서의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비틀어버린 것은 연이은 사화였다.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송인수를 비롯한 많은 벗들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으며 몰살을 당했다. 그에게 이 시대는 실로 절망의 시대였다. 마치 ‘광주사태’가 1980년대 젊은 지식인들에게 물었듯, 연속된 사화는 당시 살아남은 유자들에게 물었다. “정당한 권력이란 무엇이냐?” 라고.


적어도 이황과 조식에게 중년이후의 삶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황이 스스로 퇴계, 즉 ‘골짜기로 물러난 사람’으로 정의하고 긴장된 삶을 살았다면 조식은 남명, 즉 딴 세상으로 떠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황이 정권으로부터 물러서긴 했으나 돌아서지는 않았다면, 조식은 끊고서 다시는 돌아서지 않았다. 미진한 듯 도회에 끈을 남긴 동년배, 이황을 그가 힐난한 것도 그래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 사태는 유자였던 조식에게 몇 가지 선택적 질문으로 와 닿았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아버지와 숙부를 죽인 정권에 충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 사이에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유교이념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 관계는 천륜(운명)이요, 국가와 신민의 관계는 인륜(계약)이다. 부모를 죽인 정권에 저항은 못할망정 참여하는 것은 유교의 기본원리에 어긋난다. 이것이 조식이 유자였으면서도 장자풍의 은둔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다. 유교적 이념에 충실할수록 도교적 실천으로 빨려드는 아이러니, 아마 이것이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든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둘째, 정치사상의 차원에서 사화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연이은 살육의 사태에 대한 궁극적 책임자는 누구인가. 조식은 그 근원적 책임이 군주에게 있다는 점을 단단히 못 박는다. 숨어사는 그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면서 손길을 내민 군주에게 이런 날선 언어로 응대한 터다.


“나랏일은 벌써 결단이 났소이다. 신하와 관리들은 둘러서서 쳐다보기만 할 뿐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소. <논어>에서 말하듯 ‘어쩌면 좋을까’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시점은 진작 지나가버린 거요. 그런데도 임금이 이 꼴을 보고서도 모른 척한다면 장님이요, 알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이 나라의 소유자가 아닌 것이외다.”(“음식물을 베풀어준 것을 기화로 올리는 상소문”)


정책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는 자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의 형국이라는 것. 유교이념에 의하면 군주란 ‘하늘 아래 자기 땅이 아닌 데가 없고, 인민 가운데 자기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는’ 국가의 소유권자다. 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데 지금 조선의 국왕은 정책적 결과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중종, 명종, 선조는 옳은 군주가 아니다. 섭정의 명목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문정왕후(명종의 모친)에 대해 “궁궐 속의 한낱 과부에 불과하다”(즉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는, 사적 존재다)라는 파격적인 비판을 행할 수 있었던 것도 ‘정치가는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인식의 선상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는 그 책임의 소재를 더욱 분명히 한다. “내가 권할 말씀은 단 한 마디, 군의(君義)라는 글자올시다. 이 글자로써 임금의 몸을 닦고 나라를 잡는 근본으로 삼기를 권하외다.”(상동) 여기 ‘군의’, 즉 “임금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은 거꾸로 ‘임금이 의롭지 못해 빚어진 사태에 대해 통절히 반성하라, 또는 문제의 핵심은 곧 임금이 의롭지 못한데 있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임금이 정의로워야 한다’라는 이 한마디에 그의 정치 생각이 응축되어 있다. 당시 정치의 실패와 천륜 파괴의 궁극적 책임이 ‘임금의 불의’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조식에게 정치는 적법한 행정절차, 분배의 정의, 사건 처리의 효율성 따위가 아니었다.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도덕적 행위였다. 이것은 군주뿐만 아니라 정치참여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그가 “선비의 가장 큰 일은 정치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그 순간에 있을 따름”이라고 지적한 것도 정당성에 대한 판단과 선택에 정치성의 핵심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선비들을 다 죽여 놓고도 뻔뻔하게 왕정의 이념을 내건 정부와 그런 정부에 눈을 질끈 감고 꾸역꾸역 참여하는 지식인(선비)들의 몸짓, 두 방면에 대한 문제제기다.


셋째 ‘폭력집단으로 타락한 국가에 대해 지식인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실천적 질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선택을 가상할 수 있다. 망명, 혁명 그리고 은둔의 길이다. 첫째, 망명이란 춘추전국시대처럼 유동성이 강한 사회는 몰라도 반도의 갇힌 지형에다 이미 중앙 집권력이 강고해진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둘째, 혁명은 내심으로야 강한 충동을 가졌을지 모르나(그의 ‘칼’에 대한 깊은 욕망을 두고 보건대) 실제로는 행동으로 드러낼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소극적이긴 하지만 은둔 외에는 정치적 불만을 표현할 길이 봉쇄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은둔은 정치적 영향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힘을 발휘할 계기일 수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는 조선이 유교경전을 통치정당성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조식의 행동이 근거하고 있는 경전 구절은 “천하에 도가 있으면 출사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논어>)는 대목인데, 이것은 권력자에게 당혹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은둔 자체가 ‘도가 없음’ 곧 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숨은 선비가 신망을 얻을수록 권력의 부당성은 더욱 짙게 채색된다. 즉“정당하면 나아가고, 부당하면 곧 숨는다”는 선비의 출처(出處) 구도는 은둔자의 도덕적 파워에 따라 정권의 정당성이 결정되는 곤혹스런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둔은 겉으로는 도피일지 모르지만, 안으로는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 된다.


요컨대 조식의 행동과 언설은 여러모로 정치사상적 문제를 제기한다. “유교국가에서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서 비롯하는가”라는 주제 아래 (1) 충성과 효도 사이의 선택문제, (2) 정치적 실패(사화)에 대한 책임의 문제, 그리고 (3) 부당한 권력에 대해 신민은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문제가 그것들이다.


조식은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호한한 연구를 남긴 이황에 비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도리어 그는 글에 파묻히는 것을 경계하였다. 각인이 처한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령이라고 믿었다. 현인이 남긴 전적이나 성인의 경전마저도 나의 성찰과 실천을 위한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실천지향의 노선은 그에게 ‘칼을 찬 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넉넉한 것인데, 임진왜란을 맞은 그의 제자들이 각처에서 의병으로서 활동한 것도 이런 가르침 때문이리라. 본시 스스로 남긴 자료가 적은데다, 훗날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그의 제자들이 몰락하는 와중에 또 남은 글마저 덧칠을 당하면서 그의 생각의 전모를 알기 어렵게 된 점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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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2007/03/09 12:56
 

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 만감: 일기장 

 출처 :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862   

최근 며칠 도올의 "구약 폐기론"으로 세상이 약간 시끄러웠습니다.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구약을 읽었을 때에는 가끔 가다 이게 무슨 대량 학살 찬양서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의 땅을 정복했다는 걸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몇 백 명을 칼에 맡겨라고 분부하셨다"는 이야기가 하도 자주 나와서 제 어린 심정으로는 가히 공포없이 읽기가 어려웠어요. 실제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에 가나안의 정복이 없었다는 사실 ("원 유대" 부족들이 원래 주민들과 실제 "섞인" 것이지요)과 야훼가 원래 벼락과 전쟁, 무사의 신이어서 야훼의 숭배에 남성 우월주의적, 폭력적 요소가 강했지만 이는 고대 유대인의 문화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는데, 구약에 대한 반감은 오래 갔습니다 (<아가> 정도는, 여성 가슴에 대한 관능적인 묘사를 포함한 애로틱한 요소도 있고 해서 참 좋았지만....). 결국 종교의 텍스트란 해석 나름이고 구약의 살인주의적, 선민주의적, 폭력주의적 요소들을 "해석"을 통해 어느 정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예컨대 상징적으로만 이해하기를 촉구할 수 있지요) 이걸 인생의 지침서로 삼으면 큰일 나지요. <법구경>이나 신약, <도덕경>과 같은 수준의 보편주의적인 종교 텍스트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수준이기에 구약과 같이 논하기도 어렵지만 제가 봤을 때에는 내부적 모순이 적지 않고 일부는 아나코코뮤니스트로서의 예수의 본격적인 주장과 거리 먼 주장들도 수록된 듯합니다. 예컨대 재판관에게 가지 말라고 하여 사법부 권력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이 세상 (즉, 현존하는 계급 사회)이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부 축적의 부도덕성을 강조하는 예수는, 갑자기 "황제 (시서)의 것을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주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물론 어디까지 예수 본인의 행적에 대한 (이미 애매해진) 기록이고 어디부터 성경 편찬시의 가탁인지 알 게 없어서 "예수의 말"이라고 단정짓기 어렵지만 이게 참 모호한 표현에요. 당장에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일단 바치고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모르지만 만약 보다 깊은 차원에서 "황제에게의 충실한 신민 의무 다하기와 하나님 섬기기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면 이는 원시 기독교의 일부 "반란적" 주장들과 잘 안맞아요.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 전시에 전쟁 자금으로 쓰인다면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의 입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사실, 일반 선남선녀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나라"의 충실한 신민으로 살아가기가, "하나님"을 자기 마음 속에서 찾는 것보다 훨씬 쉽지요. 학교의 상황을 생각해보시지요. 자기 성적을 올리려고 자기의 등수를 높이려고, "황제의 나라" 규칙대로 "열심히 사는" 아이들이 많지만, 서열화된 등수 체계의 비윤리성, 반교육성을 반대하고 탈학교 운동을 벌이고 대안 학교를 찾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있긴 있어도 아직 소수지요. 즉, 이미 우리 마음까지도 상당부분 다스리는 "황제"를 받아들이기는, 무형 무성, 불가시, 불가문의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폭력들을 다 거부하는 "하나님"을 위주로 종교를 조직하자면, "황제"에 대한 거부의 수위를 조금 더 높이는 것이 적절치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거부 수위를 높여도 어차피 대다수가 마음 속의 하나님을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보다 "다들 가는" 군대에 순순히 가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 불가피하다 해도 - 하나님의 논리를 배반하는 행위라는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저 같으면 예수의 "황제와 하나님"의 담론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을 것입니다: "저항할 만한 자신이 없으면 황제에게 당신의 것이 빼앗기도록 일단 두라.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만하지 말라. 황제의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수 없는 것이고, 황제를 거부하는 자만이, 최소한 마음으로라도 황제를 떠난 자만이 하나님에 접근할 수 있다".


제 종교도 아닌데, 이렇게 종교의 경전을 고쳐보는 것이 외람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산 종교가 되자면 그 경전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 계속 이루어지고, 예수 그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 일부의 "빈란적인" 의지와 성경 편찬 당시의 순응주의적 분위기 사이의 차이도 명확히 밝혀져 원시 기독교의 "참신한 반란"에 대한 사상사적 복원도 좀 이루어져야 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종교란 믿는 자의 것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이가 결국 황제에 대한 보다 강력한 거부에 개인적으로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의 대형 교회 같으면 하나님 자체도 이미 황제화됐으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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