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명랑국토부]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 우석훈/성공회대 외래교수


리빠나 모노 데스네, 리빠나 모노 데스네

낚싯대 접고, 고무 장화 벗고

순천의 특급 호텔 싸우나에 몸 풀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써비스 한 번 볼만한데 음, 음

환갑내기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그저 아이스 박스 가득,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

(정태춘, <나 살던 고향> 중)



국토라는 말을 듣자마자 어떤 생각이 들까? 조국강산이라는 말이 생각나고, 시인 서정윤이 노래하였던 먼 옛날 만주벌판을 지나 이 땅에 정착했던 그 옛날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국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개발해야 잘 산다”는 붉은 글씨로 논밭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와 “xx지역 개발 막는 정부는 각성하라”와 같은 날선 구호들이 연상된다. 내가 사는 집 앞의 “지주들 단결하여…”라는, 문정 법조단지에 보상금을 높여달라는 구호들이 국토와 관련되어 있고, 골프장, 임도, 경마장 등등 전국 그 어느 곳이든 개발이익과 관련해서 몸살을 앓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런 현장은 한 편으로는 “대한민국은 공사중”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며, 차를 세우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태춘의 해금 반주와 함께 애절하게 울려펴지던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는 노래 가사를 가슴에 떠올리게 한다.


서양에서 가장 먼저 화폐를 사용한 사람들은 페니키아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또한 가장 먼저 창녀 제도를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오따르는 상품화폐가 아닌 진짜 화폐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기 딸을 창녀로 팔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뭔지 아는” 사회에서야 비상품 화폐라는 제도가 도입될 수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딸을 파는 비정함과 물건이 아닌 화폐를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내어주는 정신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선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아버지가 딸을 내어주고 몸값을 받는 것과 똑같은 원시적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국토를 혹은 고향을 내어주고 외지에서 온 골프장 주인이나 건설업체에 동네마다 환영 깃발을 걸어놓고 있는 저 사람들이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의 진짜 아버지일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리스 시대의 페니키아처럼 결국 사라지고 말 타락한 문명의 길 한 가운데 들어서 있는 셈이다. 정부는 “돈돈”하고 외치는 건설업자의 입에 새만금을 내주었고, 지방정부는 인천 계양산부터 제주도 한라산까지 마찬가지 방식으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생태계를 내어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신석기부터이든 아니면 요즘 얘기하듯이 구석기 문명부터이든 이 땅에 깃들어 산 것은 긴 땅의 역사에 비하면 찰라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 민족은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비장한 심정의 아버지처럼 “단돈 육만엥”에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있다.


몸서리치는 이 국토 인신매매의 현장에서 우리는 딸을 내어주는 아버지 또는 주5일제를 내세우며 “나에게 놀 곳을 내놔”라고 말하는 비정한 성매매범과 논리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지방정부는 포주고, 중앙정부는 더 큰 포주고, 손님들은 “이렇게 지저분해서 내가 돈 쓸 맛이 나겠어”라고 외치는 관광객이다. YS가 사투리로 “강간 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실수를 했다고 했는가? 현실은 ‘관광입국’을 꿈꾸는 온 국민이 ‘강간입국’을 철학적으로 외치는 셈이다.


이걸 눈 앞에 보면서 경제학자가 왜 “육만엥 밖에?”라고 질문하는 것은 정신분열증이다. 이 사태를 보고도 정신분열증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있을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이 상황에서 뇌구조가 붕괴하지 않을 수 있는 알리바이는 딱 하나다. “저들은 지방토호들이다.” 그리고 “저들은 지방토호”들이다를 입증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상황을 보면 어머니처럼 그 지역에서 살포시 살았던 주민들 중에 돈 독 오른 사람은 없다. 이 싸움은 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랑이 같아 보이지만, 만약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현실을 훨씬 부드럽고 정신분열증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명랑해질 수 있다. “저 가짜 아버지에게 짱돌을” 퐁당퐁당 던져줄 수 있게 된다. 돈독오른 아버지를 비판하기 어렵지만, 돈독 오른 날강도와 포주를 비판하기는 너무 쉬울 뿐 아니라 즐겁기까지 할 수 있다. 지역별로 좀 다르지만, 돈독 올라 지역의 생태계를 외지에 팔아넘기는 지역의 외지인 토지소유 비율은 60%가 넘는다. 부재지주와 악덕지주 그리고 그들과 붙어먹었던 마름들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한 것이 바로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의 정신이다. 왜 아버지는 딸을 이렇게 파실 수밖에 없느냐고 비장하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저들은 조선조부터 이 땅과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근본정신을 배신한 바로 그 내부 부패세력, 친일파 그리고 유신세력과 연결된 악질들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점점 명랑해진다. 멀게는 몰리에르의 코메디와 가깝게는 아르헨티나 에두아드 갈레아노의 글들과 만나게 된다. 몽환적이거나 명랑하거나 두 가지의 방식이 있는데, 판소리와 마당극에 등장하는 우리의 “가짜 아버지” 다루는 방식은 명랑한 방식이다.


그런게 내가 생각하는 명랑국토의 정신이었다. 진짜 아버지를 비난하는 컴플렉스 가득한 시리적 증후군의 두려움 없이 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는 가짜 아버지를 두둔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명랑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진취적인 미래 자세이며, 또한 판소리의 즐거움과 만나고 장터의 흥을 만나는 흥겨운 길이 아니겠는가. 여러분들도 “돈이 뭔지 아냐?”는 지방토호와 건설업자들에게 어깨에 힘빼고 “명랑이 뭔지 아냐?”는 작은 돌덩이를 퐁당퐁당 던져주시길 바란다. 이 시대에 국토가 장터처럼 흥겹게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파놉티콘(panopticon) 뒤로 숨은 권력의 전략! - 감시를 통한 훈육



“죄인의 가슴과 사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하고,국왕을 살해하려 한 단도를 집어 유황불로 지지고…(『감시와 처벌』1부「신체형」 중)”


법률 기록에 의하면 ‘감금’ 이전의 형벌은 ‘수형자의 신체’, 즉 끔찍한 체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들은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였고, 비용 부담이나 집행 절차에 있어 국가가 관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또한 잔혹한 처형 장면으로 대중의 폭동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권력은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된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차츰 과시적 의식으로서의 체형, 그리고 감금형과 강제노동 등 새로운 형태의 형벌이 도입된다. 이것을 진보된 형태의 형벌로 보고 인본주의적인 변화로 진단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푸코는 그것에 회의적이었다. 형벌의 변화는 한계에 부딪힌 권력이 그 대안으로 전략 · 전술을 바꾼 결과일 뿐이라고 보았다.


일망 감시체제: 파놉티콘


18세기 말 영국의 제레미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이름의 아주 특수한 건축 설계도를 고안했다.


독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하나는 안쪽을 향하여 탑의 창문에 대응하는 위치에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에 면해 있어서 이를 통하여 빛이 독방을 구석구석 스며들어 갈 수 있다. …역광선의 효과를 이용하여 주위건물의 독방 안에 감금된 사람의 윤곽이 정확하게 빛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탑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망 원형 감시의 이 장치는 끊임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있고, 즉각적으로 판별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적 단위들을 구획 정리한다. …충분한 빛과 감시의 시선이, 결국 보호의 구실을 하던 어둠의 상태보다 훨씬 수월하게 상대를 포착할 수 있다. 가시성의 상태가 바로 함정인 것이다. (『감시와 처벌』중)




애초에 파놉티콘은 감옥 건축을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파놉티콘이 감옥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병원, 정신병동, 공장, 병영, 즉 개인들의 감시와 거기와 관련된 조직의 문제를 전제하는 모든 기관들의 구축에도 확대 적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상에서 흔히 시간을 보내는 거의 대부분의 기관들이, 권력으로 하여금 우리를 감시하기 쉬운 구조로 지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러한 감시 형식은 놀라운 훈육효과를 허용한다. 개인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계측과 검증이 가능하며 보다 쉽게 통제가 가능한 개인들을 추출해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파놉티콘은 학생, 수감자, 병자, 혹은 광인에게 빛 속에서 항시 그들을 염탐하는 감시인들이 있고, 잠재적으로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준다. 이러한 가시성의 체제 하에서 매 순간 감시 받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각각의 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억압한다.

덕분에 권력은, 감시를 통해 생명을 가두거나, 제거하거나, 억압하지 않고서도 개인의 신체와 행동에 훈육효과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감옥의 구조로 권력의 숨은 의도를 파헤친 푸코의 놀라운 연구 성과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권력에 훈육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자각을 깨우쳐준다.

--- 심세광 <미셸 푸코 가로지르기> 중에서 (출처 :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보르헤스] 죽지 않는 사람

2007/03/19 09:54

보르헤스는 [죽지 않는 사람]을 빌어 불사에 대해 말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불사의 존재임을 확인한 후, "불락에서 [천일야화]를 필사하기도 하고, 사마르칸드의 감옥에서 장기도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하며 수많은 삶을 산다. 불사의 존재란 이처럼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죽는 존재고, 그 모든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삶 안에 담을 수 있는 존재다.

죽음을 거부하고 기존의 동일한 삶을 지속하려는 집착을 던진다면, 사실은 우리 모두가 불사의 존재임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 한계레신문 2007. 3. 16. [책과 지성], 이진경 [고전다시읽기] 소설로 담은 '색즉시공 공즉시색'(보르헤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박노자] 제가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만감: 일기장  2007/03/17 17:11 

  

 출처: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980   


사람이 왜 신을 찾게 됩니까? 레닌의 고전적인 설명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탐색하지 못한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원시공동체 해체기의 인간의 집단을 갖고 이야기한다면 맞겟지만 이미 완숙한 계급사회 안에서의 한 개인의 다양한 내면적인 움직임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종교발생론이 아닌 듯합니다. 붓다가 병들고 가난하고 노년이 된 사람의 모습,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직면한 것이 수행의 계기가 됬고, 예수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의 "악마"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또 하나의 목소리겠지요?) 속삭임에 유혹을 받았다가 결국 세속의 권력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 계기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모순이든 계급 사회의 현실적인 모순이든 우리가 당장 현실적으로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할 때에 인간에게 종교심, 즉 자기 내면 안에서의 "신성한 것", 모순 해결의 능력을 갖는 "영원하고 안락스러운 것"을 찾으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저 같으면 제가 부딪쳤던 모순이 "폭력"이라는 사회의 현상이었는데, 그 시기는 아주 일렀습니다. 지금 기억 같으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한 번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위대한 조국 전쟁" 관련의 영화가 또 방송됐습니다. 소련이 철저하게 군사화된 사회이었는데, 텔레비전의 일정표 중에서 상당부분은 소독 전쟁 ("위대한 조국 전쟁") 때의 소련군을 찬양하는 "국책 영화"들이 차지했지요. 대체 전쟁 영화란 다 폭력적이지만, 그 때에 제가 본 영화는 개중에서도 좀 특별했어요. 감독에게 무슨 사디즘 취향이 있어서인지 그 영화의 여러 "클라이막스" 중의 하나는, "영웅적인 소련 군인"이 독일 여군의 가슴에 칼을 꽂아 그 여군을 "장렬히 처단"시키는, 꽤나 긴 장면이었지요. 죽어가는 "적"과 그 옆에서 "아, 참, 내가 수고했구먼!'과 같은 만족스러운 표정의 "아군의 용사"를 카메라가 약 5분간 클로즈업한 것이에요. 그런데 제게 있어서는, 그 장면의 효과는 감독이 의도한 바와 정반대이었어요. 제 어머니와 같은 중년의 여성을 근육질의 남성이 칼로 찔러 죽이기에, 저는 "불쌍하게 죽은" 그 여성에 대한 동정과 함께 제 어너미도 누군가가 이렇게 죽여 제가 고아가 될 것 같은 절망과 공포만을 느꼈을 뿐이지요. 그러다 영화를 보다가 씩씩해야 할 남아 초등학생답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 후로는 "국책 영화" 시청을 가급적 피했는데, 학교에서 교련을 시키고 전쟁게임까지 시키는 것이 하도 부담이 되기에 근육질의 남성들이 무기라는 나쁜 노리감을 갖다가 남을 괴롭히는 일이 없는 좋은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한 번 이렇게 "국책 영화"의 폭력성에 놀란 뒤에는, 제가 이 세상에 폭력을 금하는 윤리체계가 있는가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어요. 소련의 공식 윤리체계는 "적군의 살해" 정도를 당연지사이자 "남자다운 일"로 봤기에 제가 기독교에 눈을 돌렸는데, "애국애족"을 외치는 것은 주류 기독교 집단, 즉 희랍정교회도 마찬가지이었어요. 그러다가 병역거부의 전통을 자랑하는 비주류 교파 - 소련말기에는 그게 주로 침례교파이었어요 - 에 관심을 가졌다가 그 쪽의 아주 엄격한 "집단적 규범"에 압박감을 느껴서 결국 원시 불교의 경전을 읽는 것을 본업으로 삼게 됐어요. 저는 고교시절에 <법구경>과 <숫타니파타>의 초역본을 읽고서야 자기 내면에서의 분노와 그 분노의 원천인 탐욕, 아집, 어리석음을 없애고 자기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역시 "남성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을 찾았어요. 남을 칼로 찌를 생각과 능력이 없는 저 같은 사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결국 제게 종교적 심성을 심어준 것은 "폭력", 그것도 알고 보니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었던 셈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미 고교시절부터 인식한 이 문제의 복합성은, "폭력"의 사회적인 연원에 있었던 것이지요. 군대를 운영하는 국가,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계급, 지배계급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계급적 지배 질서가 있기에 결국 칼침 놓는 일을 찬양하는 영화들이 만들어져 저와 같은 사람들을 울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불교 같은 종교의 경전들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는 내면의 길, 즉 팔정도를 가르치지만, 내면이 아닌 외면의 차원에서는 불교가 역사상 한 번이라도 계급적인 평등을 외치거나 승려가 아닌 속인의 병역거부를 제창했던가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삼계도와 같은 특수 불교 종파, 그리고 일부 특수 개인 빼고는, 불교는 일부 성직자의 평화로운 "내면의 구도" 가능성을 지배계급의 폭력자로부터 보장 받기 위해 폭력자와의 대결/투쟁은 물론 폭력자에 대한 솔직하고 바른 말까지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지요. 사상으로서의 불교는 제 초발심에 그대로 맞지만 제도로서의 불교에 대해 늘 느끼는 것은 심한 배신감일 뿐입니다. 종교적 심성의 초발점은 "모순"과의 만남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만남의 과정에서는 종교적 심성은 생기지만, (계급 사회의 하나의) 제도로서의 종교는 이 "모순"의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금으로서는 주로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를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여 절에 가지 말자!"라고 외치면 제 자신도 마음의 일면에서 미안함을 느끼지만 사실 부처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승방에서 예비군 군복이 걸려 있다는 것이 어쩔 수없다는 셈친다 하더라도 <법구경>을 갖다가 설법하시는 분들이 총들고 살인 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계속 하시고 계시다면 - 즉 병영화된 사회와 불교 교의의 기본적 충돌에 대한 의식조차 없다면 - 이건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초발심도 배반하고 짓밟는 "가사 입은 도둑"의 집단일 뿐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고전다시읽기] ‘사화’ 판치던 절망시대 정치권력 정당성 묻다

고전 다시읽기 / 조식 <남명집>



지·리·산이란 ‘앎이 다른 산’(智異山)이다. 앎이 다르면 꿈이 달라지고, 꿈이 다르면 삶이 달라진다. 이미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은 도회나 들에서 살 수가 없다. 지리산은 앎과 삶이 다른 사람들을 품어온 산이다. 파르티잔, 이현상과 남도부가 지리산으로 숨어든 까닭도 그 산이 ‘앎이 다른’ 이들을 품어온 이력 때문이리라.


16세기 조선 중엽, 도회(서울)와 들(김해)을 벗어나 지리산 밑으로 파고든 이가 있었다. 짱짱한 유교의 시대였음에도 짐짓 ‘다른 생각’을 품은 <장자>에서 이름을 따 남명(南冥)으로 자호한 이였다. 조식(1501~1572)! 이황과 한 해에 태어난 유자가 그였다. 하나 고작 책상물림의 백면서생은 아니었다. 방울을 옷 춤에 달아 거기서 나는 소리로 제 행동거지를 단속한(敬) 엄한 ‘선비’였으면서 동시에 칼로써 정의(義)를 세우려던 ‘사무라이’이기도 했다. 곽제우가 그의 제자였음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유자로서의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비틀어버린 것은 연이은 사화였다.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송인수를 비롯한 많은 벗들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으며 몰살을 당했다. 그에게 이 시대는 실로 절망의 시대였다. 마치 ‘광주사태’가 1980년대 젊은 지식인들에게 물었듯, 연속된 사화는 당시 살아남은 유자들에게 물었다. “정당한 권력이란 무엇이냐?” 라고.


적어도 이황과 조식에게 중년이후의 삶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황이 스스로 퇴계, 즉 ‘골짜기로 물러난 사람’으로 정의하고 긴장된 삶을 살았다면 조식은 남명, 즉 딴 세상으로 떠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황이 정권으로부터 물러서긴 했으나 돌아서지는 않았다면, 조식은 끊고서 다시는 돌아서지 않았다. 미진한 듯 도회에 끈을 남긴 동년배, 이황을 그가 힐난한 것도 그래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 사태는 유자였던 조식에게 몇 가지 선택적 질문으로 와 닿았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아버지와 숙부를 죽인 정권에 충성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 사이에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유교이념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 관계는 천륜(운명)이요, 국가와 신민의 관계는 인륜(계약)이다. 부모를 죽인 정권에 저항은 못할망정 참여하는 것은 유교의 기본원리에 어긋난다. 이것이 조식이 유자였으면서도 장자풍의 은둔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다. 유교적 이념에 충실할수록 도교적 실천으로 빨려드는 아이러니, 아마 이것이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든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둘째, 정치사상의 차원에서 사화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연이은 살육의 사태에 대한 궁극적 책임자는 누구인가. 조식은 그 근원적 책임이 군주에게 있다는 점을 단단히 못 박는다. 숨어사는 그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면서 손길을 내민 군주에게 이런 날선 언어로 응대한 터다.


“나랏일은 벌써 결단이 났소이다. 신하와 관리들은 둘러서서 쳐다보기만 할 뿐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소. <논어>에서 말하듯 ‘어쩌면 좋을까’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시점은 진작 지나가버린 거요. 그런데도 임금이 이 꼴을 보고서도 모른 척한다면 장님이요, 알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이 나라의 소유자가 아닌 것이외다.”(“음식물을 베풀어준 것을 기화로 올리는 상소문”)


정책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는 자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의 형국이라는 것. 유교이념에 의하면 군주란 ‘하늘 아래 자기 땅이 아닌 데가 없고, 인민 가운데 자기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는’ 국가의 소유권자다. 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데 지금 조선의 국왕은 정책적 결과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중종, 명종, 선조는 옳은 군주가 아니다. 섭정의 명목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문정왕후(명종의 모친)에 대해 “궁궐 속의 한낱 과부에 불과하다”(즉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는, 사적 존재다)라는 파격적인 비판을 행할 수 있었던 것도 ‘정치가는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인식의 선상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는 그 책임의 소재를 더욱 분명히 한다. “내가 권할 말씀은 단 한 마디, 군의(君義)라는 글자올시다. 이 글자로써 임금의 몸을 닦고 나라를 잡는 근본으로 삼기를 권하외다.”(상동) 여기 ‘군의’, 즉 “임금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은 거꾸로 ‘임금이 의롭지 못해 빚어진 사태에 대해 통절히 반성하라, 또는 문제의 핵심은 곧 임금이 의롭지 못한데 있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임금이 정의로워야 한다’라는 이 한마디에 그의 정치 생각이 응축되어 있다. 당시 정치의 실패와 천륜 파괴의 궁극적 책임이 ‘임금의 불의’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조식에게 정치는 적법한 행정절차, 분배의 정의, 사건 처리의 효율성 따위가 아니었다.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도덕적 행위였다. 이것은 군주뿐만 아니라 정치참여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그가 “선비의 가장 큰 일은 정치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그 순간에 있을 따름”이라고 지적한 것도 정당성에 대한 판단과 선택에 정치성의 핵심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선비들을 다 죽여 놓고도 뻔뻔하게 왕정의 이념을 내건 정부와 그런 정부에 눈을 질끈 감고 꾸역꾸역 참여하는 지식인(선비)들의 몸짓, 두 방면에 대한 문제제기다.


셋째 ‘폭력집단으로 타락한 국가에 대해 지식인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실천적 질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선택을 가상할 수 있다. 망명, 혁명 그리고 은둔의 길이다. 첫째, 망명이란 춘추전국시대처럼 유동성이 강한 사회는 몰라도 반도의 갇힌 지형에다 이미 중앙 집권력이 강고해진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둘째, 혁명은 내심으로야 강한 충동을 가졌을지 모르나(그의 ‘칼’에 대한 깊은 욕망을 두고 보건대) 실제로는 행동으로 드러낼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소극적이긴 하지만 은둔 외에는 정치적 불만을 표현할 길이 봉쇄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은둔은 정치적 영향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힘을 발휘할 계기일 수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는 조선이 유교경전을 통치정당성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조식의 행동이 근거하고 있는 경전 구절은 “천하에 도가 있으면 출사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논어>)는 대목인데, 이것은 권력자에게 당혹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은둔 자체가 ‘도가 없음’ 곧 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숨은 선비가 신망을 얻을수록 권력의 부당성은 더욱 짙게 채색된다. 즉“정당하면 나아가고, 부당하면 곧 숨는다”는 선비의 출처(出處) 구도는 은둔자의 도덕적 파워에 따라 정권의 정당성이 결정되는 곤혹스런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둔은 겉으로는 도피일지 모르지만, 안으로는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 된다.


요컨대 조식의 행동과 언설은 여러모로 정치사상적 문제를 제기한다. “유교국가에서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서 비롯하는가”라는 주제 아래 (1) 충성과 효도 사이의 선택문제, (2) 정치적 실패(사화)에 대한 책임의 문제, 그리고 (3) 부당한 권력에 대해 신민은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문제가 그것들이다.


조식은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호한한 연구를 남긴 이황에 비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도리어 그는 글에 파묻히는 것을 경계하였다. 각인이 처한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령이라고 믿었다. 현인이 남긴 전적이나 성인의 경전마저도 나의 성찰과 실천을 위한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실천지향의 노선은 그에게 ‘칼을 찬 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넉넉한 것인데, 임진왜란을 맞은 그의 제자들이 각처에서 의병으로서 활동한 것도 이런 가르침 때문이리라. 본시 스스로 남긴 자료가 적은데다, 훗날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그의 제자들이 몰락하는 와중에 또 남은 글마저 덧칠을 당하면서 그의 생각의 전모를 알기 어렵게 된 점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