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쿠르베와 밀레의 풍경화

2007/02/13 09:34
 

[ 같은 소재로 다른 느낌을 주는 쿠르베와 밀레의 풍경화 ]



19세기 중반,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활을 꾸려 나가기에도 힘든 민중들은 가난에 허덕였지만 부르주아들은 미술과 음악 등 문화를 마음껏 영위했다. 주 고객층이 부르주아들이다 보니 예술의 흐름도 부르주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점차 흘러가게 되었다. 하지만 쿠르베는 그런 부르주아들의 취향에 어긋나는 그림을 그려 화제가 되었다.

쿠르베를 스캔들 메이커로 만들어놓은 것이 바로 이 <석공>이라는 작품이다.


당시에 이 그림을 본 부르주아들은 그림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인물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위협적인 느낌을 받는데다가 노동자들이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 그림이니, 부르주아에게는 더욱 꺼림칙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 속 시야가 막혀있어서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거리감이 사라지고 내가 ‘그 안에 있다’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위의 <석공>과 비슷한 소재를 다뤘지만 평가가 완전히 반대로 나뉘었던 작품이 있다.

바로 농민생활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밀레의 <이삭줍기>(왼쪽)와 <만종>이다. 이 그림이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풍경 때문이다. 그림은 전체적인 자연과 더불어 인물들을 보게 한다. 게다가 <만종>의 주인공들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들의 노동하는 험한 옷차림들까지도 그 풍경의 일부로 만들어 경건하고 평화로운 의미를 띠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현실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미적인 형태로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그림의 특성 덕분에 <이삭줍기>와 <만종>은 최고의 명화로 칭송받으며 부르주아들에게 사랑받았던 것이다.

- 채운 <풍경을 보는 여섯 개의 시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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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2007/02/12 13:40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is to have to love someone.


The second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is to have someone love you.


The third most important thing is to have the first two happan at the same time.


 

 

[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1872~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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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법, 매카시즘, 그리고 뉴라이트  [한계레 신문 2007. 2. 9.책과 지성]

2006년부터 한국사회는 뉴라이트 운동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뉴라이트 운동의 중심에는 교회세력이 있다. 교직자들은 지금까지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점잖음을 유지하던 종래의 태도를 버리고 아주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사학 개방이사제를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미군이 계속 한국에 주둔해야 한다며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에 되돌려주지 말도록 간청했다. 그리고 북핵문제가 불거지자 이제는 반미를 매국으로 몰아가고 여당과 대통령을 무능하다고 몰아붙였다.


미국의 금주법은 식량을 절약하고, 공장의 작업능률을 향상시킨다는 목적 외에 맥주를 제조하는 독일인들에 대한 반감 등을 배경으로 ‘미국 영토 내에서 알코올의 제조 판매, 유통 수출입을 금지한다’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8조로 1920년 1월에 발효되었다(법안 명칭은 법안 제안자인 하원의원의 이름을 따 ‘볼스테드 액트’라 붙였다). 미국 중산층에 속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침례교) 교인들, 일부 농민들, 일부 여성들, 보수적인 정치인들과 일부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금주법의 입법화를 적극 지지했다.


당연히 금주법 시행은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금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주를 제조하거나 비싼 값을 주고 외부에서 은밀하게 반입한 알코올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밀주단속을 위해 연방정부는 1500명의 공무원을 고용했지만 미국의 국경과 해안선을 모두 감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층민들은 공업용 알코올을 물에 타서 마셨고 대략 2천만 가구의 중산층이 가정에서 비밀리에 배스터브 진(bathtub gin)을 제조했는데 이들을 모두 단속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주법 실시와 함께 확산된 밀조 밀매로 범죄도 증가했다. 알 카포네 같은 범죄자들이 만든 폭력단체들은 밀주수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애주가들은 술을 구입하기 쉽지 않자 술 마실 기회가 오면 한꺼번에 많이 마셔두려고 했다. 공업용 알코올을 마시던 노동자들은 건강을 버렸고 숨지기도 했다. 가장 큰 피해는, ‘선량한’ 미국인들이 이중적 사고를 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공개적으로는 금주법을 지지하면서 몰래 술을 구입해 가까운 친구들과 숨어서 술을 마셔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주법은 쉽게 폐지되지 않았다. 금주법에 대한 반대도 많았지만 금주법을 호전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1929년 경제공황의 여파로 1933년 제정된 수정헌법 제27조에 의해 비로소 금주법은 폐지되었다.


금주법 제정으로 기세를 올리던 당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세력은 막강했고 전 세계에서 전도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특히 동양의 조용한 나라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개신교가 오늘날 강한 보수성을 띠고 민족 정체성과 관계없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금주법 시대의 복음주의가 한국에 상륙하여 오늘날까지 교회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금주법은 음주 자체의 범위를 넘어서는 전통과 현대 간의 갈등으로 파악해야 한다. 1차 세계대전 뒤의 산업화와 도시화, 공장 노동자의 대두 등은 전통세력에게 생소했다. 더구나 일요일 교회에 가는 대신 팝에서 술을 마시는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질적인 도전문화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아메리카의 구 지배세력은 미국사회가 이제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그 수단으로 죄없는 알코올을 찍었고, 음주를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것, 다시 말해 도시의 악으로 선전한 뒤 금주법으로 자신들의 힘을 결집시키고 사회의 주류자리를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미국사회 지배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금주법 제정으로 사회적 경비가 얼마나 소모되든, 미국인들이 위선적인 삶을 살든말든 그것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대원으로 참전했다가 1946년 위스컨신 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1908-1957)는 1950년 2월 상원 비미국활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자 적색분자 추방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화당 여성당원대회에서 매카시는 수첩을 꺼내 흔들면서 “미국 국무부 내에 공산당원들이 205명이나 근무하고 있다”고 폭로 아닌 폭로를 하자 미국사회는 반공광기로 치달았다. 그가 특정인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을 때마다 대중들은 열광했고,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매카시는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것은 공산주의요, 공산주의는 미국의 국익을 해친다.”는 등식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1946-1956년 10년간 등 뒤에서 빨갱이란 손가락질을 당한 1만2천명이 직장을 잃은 채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사람들은 단체나 모임에 가입하지도, 감히 호소문에 서명을 하지도 못했다. 미국인들은 집단광기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매카시는 1952년 상원의원선거에서 상대후보를 빨갱이로 몰아 다시 당선됐다.


흔히 매카시즘을 소련의 핵보유,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 등으로 전 세계에 공산화가 진행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미국 시민들이 지지한 운동이라고 말한다. 매카시즘이란 사회적 병리현상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사회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사회와 2차대전을 치른 후의 미국사회는 달라졌기 때문에 당연히 사회는 재편되어야 했다. 하지만 재편을 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도 종교인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도덕이 땅에 떨어진 데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익숙하지 못한 보수세력이 반공의 이름으로 결집하여 사회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매카시즘은 소련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조국을 지키자는 애국운동이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매카시즘을 정착시키기 위해 차관과 원조를 이용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세계 각국에 설치한 미국 문화원을 통해 문화로 포장한 매카시즘을 전파했다. 같은 시기에 한국의 미 공보원은 매카시즘을 <논단>을 통해 전파했다. 당시 대학교수들은 <논단> 기사의 번역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나오면 폼을 잡을 수 있었다. 미국이 알아주는 한국인이고 무엇보다 원고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포장된 매카시즘을 CIA 공작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하자 미 공보부 잡지들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하지만 한국의 <논단>은 장수했다.) 문제는 매카시즘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미국 정부는 2차대전의 여파가 채 가지지 않았지만 매카시즘 덕택으로 큰 어려움 없이 미국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가들은 방향성이나 한국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 효순이 미순이 촛불시위를 반대하고, 미군 철수를 반대하고, 교육법 개정을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 이들이 기획하는 교과서포럼 내용을 보면 친일, 친유신, 친독재, 친시장주의다. 그런데도 이들은 우파 언론에 의해 한국사회를 선도하는 인물들로 평가되었다. 이들은 부패한 사학은 극소수라며, 사립학교법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학교를 사유물로 생각하는 이들은 약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동원하는 삭발, 단식까지 하고 여당과 정부를 사악한 무리라고 비분강개했다.


이들은 초절정 코미디언이 되었을까? 코미디라니! 그들에겐 처절한 몸부림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움직여온 주류인 자신들이 한국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을 온몸으로 감지했다. 더 이상 한국사회가 자신들이 정해준 아젠다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자 이들은 ‘고상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과 그들의 행동은 얼핏 보면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오죽했으면 정용섭 대구 성서학아카데미원장이 “한국 보수파가 보이는 모습은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임상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역사에 교훈이란 없는 것이어서 세상은 정말 언제나 몇십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걸까?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의 가운데에는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가 격렬한 어조로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기독교계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통와위기(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이후로 기독교계는 신도수와 헌금액수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립학교법이 터지게 되었고 이는 교계 전체의 이익을 건드리는 일이었으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셈이었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도 미국 사립학교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했을 때 복음주의 신도들이 굳건한 복음주의 신앙을 지닌 그한테서 등을 돌리고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는 바람에 낙선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사학법 문제에서 교회와 보조를 같이하겠다는 것은 득표와 연결되는 현실적 전술을 구사하겠다는 메시지다.


미국의 금주법과 매카시즘,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의 공통점은 사회의 주류였던 사람들이 사회가 변화하고 패러다임이 바뀌자, 변화를 수용하지도 않고 주류에서 비주류로 밀리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는 점이다. 대안을 제시하는 건전한 보수가 아니어서 무조건 저항하다 보니 사회적 병리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역사의 도도한 변화 물결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이학수 /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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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박노자 |만감: 일기장  2007/02/07 20:59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379


요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라는 신간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반갑게 느껴지는 측면은, 정 교수께서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정의하시면서도 일단 트로츠키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무오류의 교황"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역시 꽤나 야만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타개하려 했던 그들의 자기 모순 투성이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닌과 트로츠키가 잘한 부분 - 예컨대 처음에 멘세비키들이 추진했던 "소비예트식 노동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적어도 이론상 수용한 것 - 도 배워야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정 교수께서 1920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가 하나의 오류이었음을 매우 옳게 지적하시더랍니다 (445-446쪽). 물론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한 상황의 영향", "레닌, 부하린 등 다수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차원의 착각" 등의 여러 가지 단서를 달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오류의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츠키와 레닌 등이 왜 그러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한번 깊이 고심해보고, 그 당시에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세력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이론상으로 주장했던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기관으로 만들어 그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징집하여 군대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요충지"에 배치하려 했을까요? 노동자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같으면 '징집'되어 가족과 헤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노동자의 심정을 이해해서라도 진시황의 부역 노동 징발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안할 터인데, 트로츠키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단순히 국방부 장관이라는 벼슬의 포획력일까요?


물론 국방부 장관으로써 가지게 돼 있는 "행정 편의주의"란 부분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의 한 가지 비극적인 파행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 정당"을 이끌었던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과연 하루라도 "노동"해본 적이 있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80년대식의 유행어로, 다들 "학출 군단"이었지요. 그들 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짧은 스탈린이라 해도, 그래도 신학 대학을 좀 다녀본 사람이었고 그루지아어로 꽤나 괜찮다는 시 몇 편을 잡지에 싣는 등 "문단 데뷰"까지 했었지요. 상트페데르부르그 제국대학의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해본 레닌 정도며는, 형님이 황제 암살 음모 혐의로 사형집행돼서 그렇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출세를 크게 할 수 있는 "먹물"의 대열에 속했어요. 고급학력이 하도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는 "문단 데뷰"나 "변호사 경력"은 별 것처럼 안보이지만, 인구의 70%가 아예 글을 몰랐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는 레닌/트로츠키와 일반 공장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거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었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글쎄, 1920년대의 조선에서 고급 한문 문장을 잘 구사했던 조공의 최초 책임비서 (1925년) 김재봉선생과 일선 노동자의 "관계"의 형태를 생각해보시기를. 그러니까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지도하의 전위당" 이론은 운동판에서의 "학출 군단"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그들의 "지도, 계몽"에 피로를 느꼈던 많은 일선 노동자 활동가들이 차라리 조직 형태가 조금 더 느슨한 멘세비키 쪽을 택하기도 했었어요. 일찍부터 현장 활동을 한 일도 별로 없이 노동자들을 "조직, 지도"해온 트로츠키 같은 "고급 학출"에게는,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대오로 세워 노동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꽤 쉽게 들 수 있었어요. 즉, 그의 "노동의 군사화" 망상의 근원을, 실제로 자본주의적 사회의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운동판의 정치 역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참, 지금의 한국의 운동판은 좀 달라졌나요?


그러면, 이 망상에 맞선 이들은 누구이었을까요? 1921년3월의 소련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의 "노동 군사화"에 반대한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는 슬랴프니코프 (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1885-1937)이었지요. 최종 학력은 보통학교 3학년 퇴학, 12살부터의 공장 노동, 1890년대 후반에 노동자 파업 주도, 현장 운동하다가 1901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08년 해외 망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레닌과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독일 사민당의 후원금을 받거나 "문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슬랴프니코프는 프랑스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거기에서도 노동 운동의 현장 지도자가 됐지요. 그가 1918년부터 인민위원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늘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서 "벼슬"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국 금속노조의 집행위원을 하는 등 "현장"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에거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독재 아닌 당의 독재를 겪게 되는 감이다"라고 일갈하고 "당의 관료화 위험"에 대해 - 트로츠키보다 훨씬 일찌기! - 경고하고 당과 국가 관료들을 일정 기간의 만료 이후에 다시 공장의 현장으로 보내고 현장 노동자들을 관료를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리고 공장에 대한 관리권과 소비예트 공화국 공업 전체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노조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었지요.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경제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즉,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 그렇게 됐다면 그나마 소비예트 민주주의를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학출" 출신의 고급 "직업 혁명가"들은 어찌 보통학교 출신의 노동자들의 감독을 달게 받겠습니까?


레닌이 슬랴프니코프에게 "신디칼리즘"같은 딱지를 붙였고, 당 대회는 슬랴프니코프와 그 동지들의 주장을 부결한데다 아예 당내의 "종파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후로는 일선 노동자보다 당 관료들이 당의 주인이 되고 말았지요. 트로츠키가 1923년에 정신을 차려 당의 관료화 위험을 눈을 떴을 때, 이미 다 늦었어요...그런데, 우리 주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많이 볼 수 있어도 "슬랴프니코프주의자"들은 별로 없어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갈구했던 보통 학교 출신의 슬랴프니코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안보이나요?


 슬랴프니코프: 그는 1920년대에 혁명사에 대한 좋은 책을 꽤 썼어요 (물론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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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의 원죄

2007/02/0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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