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생활

2007/02/07 10:22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씻다가

 '나는 매일 같은 일을 하는 구나. 세수하고 담배피고, 지하철로 달려가는 나는 어제와 똑같구나.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퇴근하면 정말 끔찍하다. 이렇게 똑같은 일상이 평생 반복되면 어떻하지?' ......

 

 

차이 그 자체(즉자적 차이)...

대자적 반복...

반복 :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반복은 생성하는 가운데 소멸한다.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시간의 방향......

 

- Gilles Deleuze. [차이와 반복]. 2005. 김상환 옮김. 민음사.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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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선물’은 부족 공동체 묶는 끈 

- 마르셀 모스 <증여론>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미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까? 아마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을 것이다. ‘원시사회(promitive society)’라는 단어로 그들이 사는 세계를 표현하는 현재의 관습이 남아 있는 한, 그 단어를 통해 작동하는 ‘문법의 환상’은, 다시 말해 그 사회는 ‘원시적’이고, 따라서 뒤처진 사회며 미개한 사회라는 식의 환상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원시사회를 연구하러 그 속으로 들어갔던 인류학자들은, 그 세계가 '본원적(primitive)'일지언정 결코 미개하거나 뒤처진 사회가 아님을 발견한다. 가령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아직도’ 돌도끼를 사용하는 남미 원주민들에게 그보다 10배는 효율이 좋은 쇠도끼를 주었을 때, 그것으로 동일한 시간 일해서 10배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10분의 1시간만 일해서 동일한 물량만을 생산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뒤처진 생산력, 뒤처진 문화를 발견하겠지만, 그들은 거꾸로 반문할 것이다. “왜 10배나 더 생산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데 필요한 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물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다. “쓰고 남은 건 팔아서 돈을 벌면 되잖아. 그 돈으로 다른 것도 사고, 저축해서 재산을 모아도 되고.”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험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은 틀림없이 남들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데 사용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를 초과하는 생산은 윤리적으로 ‘나쁜 짓’이었다. 즉 필요 이상의 생산을 저지하는 것, 그것은 이런 점에서 미개함의 증거가 아니라 자연이나 인간을 대하는 그들의 ‘지혜’의 증거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생산력이 형편없이 뒤처진 그들의 경우, 가령 아프리카 부시맨의 경우 하루나 이틀 일하면 하루나 이틀 쉰다. 하루에 대략 3~4시간 일하는 꼴이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발전된 생산력을 가진 자본주의 세계의 우리는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사회가 더 ‘발전된’ 사회인 걸까?


이러한 사실은 한 두 사람이 지적하는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원시부족’들이 이런 식으로 산다. 그래서 그걸 조사하던 인류학자들 중 일부는 그 ‘본원적’ 세계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해체된 사실에 거대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기도 했고, 다른 일부는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은 그들 세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삭막한 삶을 대신할 ‘미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을 쓴 마르셀 모스 역시 ‘선물’로 특징지어지는 그 원시적 문화에서 자본주의를 대신할 미래적 세계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후 이 책은 바타이유처럼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실망한 좌파 지식인들이 새로운 종류의 미래를 구상 내지 상상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했다. 이 책에서 모스는 수많은 현지조사 보고서(‘민족지’)를 뒤져서 이른바 원시부족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선물’의 문화, 혹은 ‘증여’의 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포틀래취’와 ‘쿨라’일 것이다.


치누크 ‘인디언’의 말로 ‘식사를 제공하다’ 내지 ‘소비하다’를 뜻하는 포틀래취는 일종의 ‘선물게임’이다. 결혼식이나 성인식, 조상신에 대한 제사 등의 축제 때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을 실컷 먹이고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기에 초대된 사람들은 초대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게임’에서 진 것이 된다. 이는 대개 경쟁이나 전쟁처럼 격렬하게 진행되며, 종종 대대적인 물자의 파괴를, 특히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동판의 파괴를 수반한다. ‘이런 것쯤 얼마든지 내다버려도 돼’라는 듯이. 이러한 선물과 파괴는 명예 내지 권위로 되돌아온다. 다른 누구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쎄게’ 나간 사람이 최고의 명예와 권위를 얻어 추장이 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아마도 그는 자신의 재산의 대부분을 소모하여 별로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권위를 경제적 재산의 소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위가 하나로 겹쳐져 필경 남들을 지배하게 되는 국가적 권력이 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것이었을까?


쿨라는 트로브리얀드 군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선물이 증여자와 답례자 두 항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과 달리 섬 전체를 돌며 여러 항 사이에서 행해진다. 그것은 두 개의 정해진 물건을 선물하는데 하나는 음왈리라는 팔찌고, 다른 하나는 술라바라는 목걸이다. 가령 A가 음왈리를 B에게 선물하면, B는 그것의 답례를 A가 아니라 C에게 하는 것이다. C는 그것을 D에게 주고···. 이런 식으로 전해지는 음왈리는 아마도 하나의 순환을 그리며 A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술라바의 경우는 음왈리와 반대 방향으로 순환한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답례하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하는 것. 이것이 반복된다면 한 번의 선물은 대대적인 선물의 연쇄를 만들어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선물의 체제는 이들 원시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근대 이전 우리가 살던 세계에도, 모스가 살던 서구에도 있는 것이다. 포틀래취까지는 안 가더라도, 잔치를 벌이면 음식이 남도록 만들어 싫컷 먹이고 가는 손님에겐 음식을 싸주는 것은 이미 근대화된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이사만 가도 떡을 해 이웃에 돌리지 않던가! 모스는 이를 좀더 강하게 말하기 위해 로마 시대의 채권-채무관계조차 선물을 주고받는 의무체계로 해석한다.


이러한 선물의 체계는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분리된 가구나 가족들 사이에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쿨라에서 선물은 섬들로 분리된 마을이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증여되는 재화의 순환이 사람들을, 혹은 삶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마나’ 내지 ‘하우’라고 불리는 ‘靈’이 선물의 순환을 통해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며, 공동체에 하나의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의 삶은 어디든 증여의 양상을 취한다. 역으로 선물의 순환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물을 개념을 좀더 확장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아주 간단하게 도식화해서, 식물이 동물에게 산소를 선물하고, 동물이 식물에게 유기물을 선물하는 관계 역시 선물의 순환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서로 기대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싶다면, 어떻게 선물의 순환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모스는 ‘계산기’가 되어 버린 근대적 ‘경제동물’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꿈꾼다. 선물의 체제, 그것이 그 꿈을 향한 출구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물의 체제를 일반화하기 위해 교환이란 개념에 포섭한다. 선물에 대한 답례가 의무라는 것이 그 이유다. 답례가 의무라면, 선물과 답례란, 다시 말해 선물의 교환이란 상품의 교환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는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채권과 채무도 의무적으로 답례하게 되어있는 선물의 일종이 된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답례’하기 때문에 이를 일종의 ‘신용거래’라고 이해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선물을 교환이라는 ‘일반적’ 현상으로 포착하는 모스의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찾아내는 능력으로 격찬한다.


그러나 그 결과 선물이 사라지게 된다. 상품교환의 일종이 되어버린 선물은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채무의 일종이 되어버린 답례 역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을 받고 나중에 답례하는 것이, 그게 비록 의무라 해도 정말 교환일까? 일부러 등가성을 피해 다른 값어치의 선물을 하게 하고, 일부러 동시성을 피해 나중에 답례하게 하는데도. 답례가 의무라는 것이, 그것이 채무와 똑같다고 말할 이유가 될까? 갚아야 할 채무와 달리 어떤 종류의 등가성도 없는데. 이는 결국 ‘원시사회’의 선물을 우리가 익숙한 ‘교환’이란 개념 안에 끼워맞춰 무용하게 만드는 게 되진 않을까? 이를 놓치면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선물을 오해하는 일반적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책이 될지도 모른다.


 -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75446.html)

서평자 추천 도서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한길사 펴냄.

[폭력의 고고학] 클라스트르 지음, 변지현·이종영 옮김, 울력 펴냄.

[저주의 몫]바타이유 지음, 조한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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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죽은 사물의 부활

2007/02/06 10:37

- 죽은 사물의 부활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눈에 익숙한 사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지나쳐버리고 마는 '죽은' 사물들. 예술에서는 이렇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죽은 사물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 방식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는 주위의 사물을 기괴한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또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죽은’사물을 살려내려 시도했다.

 

마그리트는 ‘낯설게 하기’의 소재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을 사용했다. 난로, 나무, 사과, 유리잔 등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마그리트는 ‘낯설게 하기’의 소재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을 사용했다. 난로, 나무, 사과, 유리잔 등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옆의 그림은 마그리트의 ‘낯설게 하기’를 표현하는 ‘고립’의 방법이다. ‘고립’이란 어떠한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걸 말한다. 그림을 보라. 평범한 하늘이 보이는 방과 물고기 한 마리. 따로 떼어놓고 보면 어느 것 하나 낯선 사물이 없지만 천장을 향해 서있는 물고기 한 마리에서 오묘하고 신기한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원목재가 깔려있고 빛이 잘 드는 방 한 칸과 커다란 풋사과가 있다. 역시 눈에 익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빛을 잘 받은 푸릇한 사과가 묘한 위압감을 풍긴다. 이 방법은 ‘크기의 변화’다. 이처럼 사물의 크기만 바꾸어 놓아도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마그리트는 유사의 방식을 취하지만 유사를 거부하면서 상사를 지향한다. 그의 작품에 ‘닮음’이 있다면 시뮬라크르들 사이의 닮음일 뿐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시뮬라크르 놀이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이 은폐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준다.

 

진중권 <현대미학-숭고와 시뮬라크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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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민중"에 대한 생각 | 만감: 일기장  2007/02/05 00:54 

 [출처: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304]



1970년대부터인가 "저항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테마는 한국 "진보" 진영의 가장 큰 화두가 됐지요. 장길산의 미륵신앙이 꼭 "공산당의 선언"처럼 읽혀지고, 동학 농민의 "제폭구민"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처럼 들리고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물론 "지금, 여기"의 현실 속에서의 "저항의 주체"들이 열성적으로 탐색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동일방직이라는 유명한 방직업체에서 민중 중의 민중이라 할 예비역 출신의 남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선 여성 노동자들에게 오물을 투척하고 있는데도 말씀입니다. 물론 1987년 창원 등지에서 노조를 설립하겠다고 파업에 나선 삼성 중공업의 노동자들은 "투쟁하는 민중"이었지만 과연 구사대는 민중이 아닌 사회 귀족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제발로 삼성의 문에 들어와 이건희의 어록을 외우는 이들은 과연 민중의 일부분이 아닙니까? "민중의 저항성"이라는 문제는, 사실 생각보다 단순하지가 않더랍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대중의 사고 역시 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말이 역시 마음 아픈 진리입니다. 대체로 어릴 때부터 벌어서 쓰는 "생산, 소비" 순환의 맛을 몸에 들이고, 서민까지도 가질 수 있는 돈의 힘을 알고, 학교에서 "잘 사는" 것의 미덕을 익히고,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보다 훨씬 못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영식이나 John은, 아주 특별한 생활의 여정을 밟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극단"을 반대해도 자본주의 그 자체에 "자연발생적으로" 의문을 가질 확률은 높지가 않아요. 꼴보기 싫은 상사에게 굽신거리는 것도 자본주의지만, 김태희의 새로운 드레스의 노출도를 눈으로 확인하는 재미나, 월드컵 때에 힘껏 외쳐보는 재미도 자본주의 아닙니까? 부동산, 은행 빛, 사채 빛, 아이 사교육비 - 이 걱정거리의 더미 밑에서 사는 이들은 무슨 "대안"을 찾을 만한 여유도 없지요. 무론 여기에서 지역별 차이가 좀 있어요. 예컨대 선거때마다 노동당을 찍는 노르웨이의 노동자는 자신의 실질 임금이 그래도 해마다 1-2% 올라가는 이 복지 자본주의에 반대가 없어도 일단 "계급 의식"이 아주 강한 반면, 이쪽에서 삼성의 사가를 제창하고 회장님의 어록을 외우다 보면 "삼성가의 충신" 의식이 트일 수도 있고 순전히 생존본능대로 살아갈 수도 있지요. 그러나 노동당의 지지자든 회장님을 모시려는 일편단심의 소유자든 "평상시" 자본주의하의 대중들을 진정한 반자본 투쟁에 이끌기가 매우 힘들지요. 경제 투쟁이야 당연히 빈번히 일어나고 또 대중의 좋은 학습 기회가 되지만, 이건 "반자본의 투쟁"이라기보다는 자본과의 공존의 조건을 좀 개선시키기가 위한 투쟁이지요. 물론 그러한 투쟁이라도 없으면 노동자가 한국의 1980년대초처럼 한달에 200달러나 받고 쪽방에서 새우잠을 자게 돼 있지요. 다만, 한국처럼 주인네들이 노동자들에게 학교/군대 시스템을 통해 "복종 훈련"을 시켜 대중을 원자화시킨 뒤에 정규직/비정규직 등을 잘 분리 통치하고 조합 관료들을 계속 매수하면, 경제 투쟁조차도 참 외롭고 어려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상황을 바꾸는 것은 자본주의의 온갖 균열의 시공간과 불경기의 시공간이지요. 자본주의는 늘 "전쟁"을 의미하는데, 이라크 등지에서 수십 만 명의 무고한 이들이 죽는 모습은 아주 배부른 노르웨이 노동자에게도 결국 "도대체 이게 무슨 세상이야?"라는 생각을 심어주지요. 또 1973년 이후에 유럽에서 점차 불경기가 심화돼 결국 "복지"를 놓고 주인네와 머슴네가 아죽 격렬한 "겨루기"를 하게 되지요. 작년 불란서의 젊은이 반란이나 독일의 공무원 장기 파업 등을 참고하시기를. 이러한 시공간들은 결국 "순응하는 민중"을 "투쟁하는 민중"으로 조끔씩 바꾸는 효과를 갖고 있어요. 문제는, 이 "투쟁하는 민중"을 조직, 이념적으로 응집시킬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조직체가 필요한데, 유럽에서는 나라마다 몇 군데의 급진적 정당들이 있다 해도 거의 그 역량이 많이 제한돼 있는 것 같아요. 또 섹트적인 근성이 너무 강하거나, 그 반대로 "사민주의의 재탕삼탕"밖에 제안하지 못하거나.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세계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의 균열이 계속 심화될 듯하고 아마도 결국 "파열"로 갈 것 같은데, "세계 혁명"이 안될 경우 그 대신에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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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보고싶은 조선배에게

2007/02/02 12:08

보고싶은 조선배에게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선배 생각을 하다 울었습니다.

당신을 떠난 보낸 후, 참 오랜만에 인사를 합니다. '잘 계시지요?'

저는 당신과 헤어진 후 서울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갑작스런 서울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쳤는지 이번에 많이 아팠습니다.

쉬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참 많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조선배,

당신이 학교를 떠난 뒤에 저에게는 온통 슬픔만 남았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도 힘들고 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날마다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당신이 그리워 많이 울었습니다. 서울은 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참견하는 사람이 없었고, 지하철에서 갑자기 질질질 울어도 창피하지 않았습니다.


조선배,

가끔 당신이 꿈에 나옵니다. 꿈에 당신이 나타나면 저는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고, 사람이 어디를 가면 간다고 말을 하던지 해야지, 혼자 말도 없이 갔다가 이렇게 오면 어떻게 하냐고...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그렇게 무심하게 하냐고" 성질을 내면서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꿈에서 화를 잔득 내다가 잠을 깨면 참으로 허망했습니다.

선배는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떠났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눈을 보면 첫사랑 같은 달콤한 로망을 생각하지만 저는 선배 생각이 먼저 납니다. 그래서 저는 눈이 많이 내리면 슬픕니다.

조선배, 이제보니 당신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어때요? 거기도 살 만 한가요? ... ...
그저 선배가 보고 싶고...선배는 참 무심하게 떠났습니다. 진짜 무심한 사람입니다.

조선배, 저도 이제 잘 살겠습니다.


p.s.

당신은 생전에 외롭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그곳은 외롭지 않나요?



2007. 2. 1. 서울 충무로에서 만복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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