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2007/03/09 12:56
 

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 만감: 일기장 

 출처 :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862   

최근 며칠 도올의 "구약 폐기론"으로 세상이 약간 시끄러웠습니다.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구약을 읽었을 때에는 가끔 가다 이게 무슨 대량 학살 찬양서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의 땅을 정복했다는 걸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몇 백 명을 칼에 맡겨라고 분부하셨다"는 이야기가 하도 자주 나와서 제 어린 심정으로는 가히 공포없이 읽기가 어려웠어요. 실제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에 가나안의 정복이 없었다는 사실 ("원 유대" 부족들이 원래 주민들과 실제 "섞인" 것이지요)과 야훼가 원래 벼락과 전쟁, 무사의 신이어서 야훼의 숭배에 남성 우월주의적, 폭력적 요소가 강했지만 이는 고대 유대인의 문화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는데, 구약에 대한 반감은 오래 갔습니다 (<아가> 정도는, 여성 가슴에 대한 관능적인 묘사를 포함한 애로틱한 요소도 있고 해서 참 좋았지만....). 결국 종교의 텍스트란 해석 나름이고 구약의 살인주의적, 선민주의적, 폭력주의적 요소들을 "해석"을 통해 어느 정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예컨대 상징적으로만 이해하기를 촉구할 수 있지요) 이걸 인생의 지침서로 삼으면 큰일 나지요. <법구경>이나 신약, <도덕경>과 같은 수준의 보편주의적인 종교 텍스트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수준이기에 구약과 같이 논하기도 어렵지만 제가 봤을 때에는 내부적 모순이 적지 않고 일부는 아나코코뮤니스트로서의 예수의 본격적인 주장과 거리 먼 주장들도 수록된 듯합니다. 예컨대 재판관에게 가지 말라고 하여 사법부 권력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이 세상 (즉, 현존하는 계급 사회)이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부 축적의 부도덕성을 강조하는 예수는, 갑자기 "황제 (시서)의 것을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주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물론 어디까지 예수 본인의 행적에 대한 (이미 애매해진) 기록이고 어디부터 성경 편찬시의 가탁인지 알 게 없어서 "예수의 말"이라고 단정짓기 어렵지만 이게 참 모호한 표현에요. 당장에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일단 바치고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모르지만 만약 보다 깊은 차원에서 "황제에게의 충실한 신민 의무 다하기와 하나님 섬기기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면 이는 원시 기독교의 일부 "반란적" 주장들과 잘 안맞아요.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 전시에 전쟁 자금으로 쓰인다면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의 입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사실, 일반 선남선녀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나라"의 충실한 신민으로 살아가기가, "하나님"을 자기 마음 속에서 찾는 것보다 훨씬 쉽지요. 학교의 상황을 생각해보시지요. 자기 성적을 올리려고 자기의 등수를 높이려고, "황제의 나라" 규칙대로 "열심히 사는" 아이들이 많지만, 서열화된 등수 체계의 비윤리성, 반교육성을 반대하고 탈학교 운동을 벌이고 대안 학교를 찾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있긴 있어도 아직 소수지요. 즉, 이미 우리 마음까지도 상당부분 다스리는 "황제"를 받아들이기는, 무형 무성, 불가시, 불가문의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폭력들을 다 거부하는 "하나님"을 위주로 종교를 조직하자면, "황제"에 대한 거부의 수위를 조금 더 높이는 것이 적절치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거부 수위를 높여도 어차피 대다수가 마음 속의 하나님을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보다 "다들 가는" 군대에 순순히 가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 불가피하다 해도 - 하나님의 논리를 배반하는 행위라는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저 같으면 예수의 "황제와 하나님"의 담론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을 것입니다: "저항할 만한 자신이 없으면 황제에게 당신의 것이 빼앗기도록 일단 두라.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만하지 말라. 황제의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수 없는 것이고, 황제를 거부하는 자만이, 최소한 마음으로라도 황제를 떠난 자만이 하나님에 접근할 수 있다".


제 종교도 아닌데, 이렇게 종교의 경전을 고쳐보는 것이 외람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산 종교가 되자면 그 경전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 계속 이루어지고, 예수 그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 일부의 "빈란적인" 의지와 성경 편찬 당시의 순응주의적 분위기 사이의 차이도 명확히 밝혀져 원시 기독교의 "참신한 반란"에 대한 사상사적 복원도 좀 이루어져야 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종교란 믿는 자의 것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이가 결국 황제에 대한 보다 강력한 거부에 개인적으로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의 대형 교회 같으면 하나님 자체도 이미 황제화됐으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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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구슬픈 肉體

2007/03/06 08:53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자체(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통각(統覺)과

조화(調和)와 영원(永遠)과

귀결(歸結)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大地)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一體)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不屈)의

의지(意志)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天上)의 무슨 등대(燈臺)같이

까마득히 사라져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海底)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대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調和)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될 것이지만
천사(天使)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肉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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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새가 나는 이유?

2007/02/28 11:07

 

뉴질랜드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5종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관찰해 본 결과 뉴질랜드에는 새의 천적이 없어 새가 굳이 땅을 박차고

힘차게 비상할 이유가 없어서 오랜시간 날지 못하는 새로 진화되었다고 한다.

 

절대절명의 위기와 긴장감이 새가 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매너리즘과 나태한 일상의 수레바퀴에 젖어 있는 한 영원히 날 수가 없다.

마치 날개가 있어도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 뉴질랜드의 새처럼 말이다.

 

 

- lifephilo 카페 [마주보기]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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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든 안락한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그 반대의 생활로 떨어져 버렸다면, 그 떨어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서』)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 ‘중국의 기상나팔’로 불리는 루쉰은 1881년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고 아버지가 병환을 얻으면서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루쉰은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약방으로, 돈을 구하기 위해 전당포로 뛰어다니게 되었는데 약방 계산대와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이 느끼는 세상의 벽만큼이나 높은 것이었다.


“약방 계산대는 내 키만큼 높았고, 전당포의 계산대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었다” (『자서』)


약방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도 익숙했던 현학적인 전통의 세계였기에 루쉰의 눈높이를 뛰어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 화폐의 소중함, 그리고 더러움을 동시에 알게 해준 곳이므로 심리적으로 훨씬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루쉰이 느꼈던 세상의 두 가지 벽이다. 또한 이것은 전통적인 낡은 시대의 유물(약방), 그리고 자본주의적 질서인 서구의 문명(전당포) 사이의 긴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루쉰은 성인이 되어 이 두 가지 것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게 된다.


성장한 루쉰은 양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의학을 통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겠다는 결심으로,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곳에서 인생의 길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바로 ‘환등기 사건’이었다. 수업시간에 환등기로 뉴스필름을 보여주었는데 어떤 중국인이 군사재판을 받고 있고 그 주위에 다른 중국인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이었다. 그 중국인은 곧 일본인에 의해 총살되었고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중국인들을 욕하고 있었다. 루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수련하는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 환호할 수 있는가?’ 라는 분노와 함께 자기 동족이 죽는 것을 둘러서서 가만히 보고 있는 중국의 무지몽매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자신도 무지한 중국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술을 통해 몸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의 낙후된 정신을 각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사의 길을 포기한 채 비로소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허구를 비판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들로 10억 중국인을 깨어나게 한 ‘중국의 기상나팔’ 루쉰이 탄생한 것이다.

- 권용선 <루쉰을 읽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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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문화] 새해 다짐

2007/02/23 17:13

새해 다짐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가지런해야겠다
세상이 어지럽지만
내가 단정하지 못했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고요해져야겠다
세상이 시끄럽지만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멀리 내다 봐야겠다
세상이 숨가쁘지만
내가 호흡이 짧았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간소하고 나직해야겠다
세상이 온통 대박행진이지만
내가 먼저 비우고 나누지 못했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홀로 외로워져야겠다
좀 흔들리고 눈물도 흘리고 가슴아파하면서
내 사람이 온유해져야겠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나의 하루 하루가
좀 더 치열해져야겠다
과녁을 향해 팽팽히 당겨진 화살처럼
하루 하루를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온전히 집중해야겠다
 
 
- 새해에는 더 해맑은 다짐으로 더 진실한 성취와 향기나는 사람의 꽃을 피우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나눔문화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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