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te, stratification   
    
층(strate) ― 동질적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물리-화학적 층, 유기적 층, 인간적/문화적 층이 가장 큰 세 층을 형성한다) 인간이 개입될 경우,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이질적/다질적 조성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기관들’은 반드시 신체의 기관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의 ‘부’들, 대학의 ‘과’들, 관료조직에서의 ‘국’, ‘처’, ...등도 모두 ‘기관들’이다)은  ‘탈기관’ 상태 또는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가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자연적인 또는 문화적인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재구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articulation, segmentarite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é) ― 삶을 일정한 단위들로 가르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이다.
분절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plan d'immanence


들뢰즈의 내재면의 사유는 초월자를 거부하는 것이지만 그런 거부는 이미 예전에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오늘날 특별히 실효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초월적인 것"에는 여러 가지 맥락이 존재한다.

1. 신이나 이데아 등의 초월자.(이데아가 과연 그런 초월자인가는 자체로서 논쟁거리가 된다.)
2. 세계에 내재적이지만 개별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을 넘어서 있는 초월자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주자의 리 등) 3. 선험적 주체. 경험적인 것들을 넘어서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자.(칸트의 선험적=초월론적 주체 등)
4. 관계망. 관계망이 그 자체로서 고착될 때 그것은 또한 초월자의 성격을 띤다.

 

1이 이미 전개된 사상이라고 해서 "내재면"이 유효한 사상이 아니라는 것은 "초월적인 것"이 이런 다양한 맥락을 띤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2, 3, 4의 초월성은 지금도 우리 삶과 사유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내재면은 단지 초월자가 없는 면이 아니라 2, 3, 4의 초월성이 성립할 수 없는 면(지평)이다. 그것은 어떤 절대적 실선도 그어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점선으로만 존재하는,
즉 모든 A는 dA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d=differentiation, differentiel)면이다. 그것은 개방계(open system) 자체라고 할 수 있다.

 


"le possible"과 "le virtuel"      
  
베르그손이 "Le possible et le reel"에서 사용한 "le possible"은 사실상 "le virtuel"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그손은 여기에서 "추후적 사고(pensee retrospective)"를 비판한다. 무엇인가가 현실화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그 전에 "가능했기" 때문에 현실화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는 세계에 대한 고전 역학적 개념의 거의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다고 하겠다.

베르그손은 "가능하다"라는 말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1) 소극적 의미: 불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소극적 규정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만 의미할 뿐이다.
2) 적극적 의미: 그렇게 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의 "가능"이란 사실상 "잠재"이다.

결국 베르그손이 말하려는 것은 잠재적인 것은 그것이 오로지 현실화되었을 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화되기 전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화됨으로써 비로소 그 때 "가능했던" 것이 "되는" 것이다.
<가능과 현실>은 지금 읽어보아도 참으로 뛰어난 글이다.

 

 

 plan de consistance      
 
 'plan de consistance'는 들뢰즈/가타리 개념들 중 특히 까다로운 용어들 중 하나이다. 다음은 간단한 정리이다.
 
 ‘plan de consistance’는 ‘plan d'organisation’(또는 ‘plan de dévéloppement’)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생물학’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던 ‘조직화의 도안’(또는 그 후에 등장한 ‘발생의 도안’)은 형식(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의 발생과 실체(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의 형성(형식화)를 지배한다. 이로써 ‘유기체’가 성립한다. 조직면, 발생면은 정합성의 면이다. ‘plan de consistance’ 또는 ‘plan de composition’ 즉 ‘planomène’는 조직면, 발생면을 일탈하는 존재들이 성립하는 면이다.(결과적으로 조직면/발생면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들이 이 면에서는 공존할 수 있다.

‘plan de consolidation’에서의 공존

즉 기존의 종/유 체계에서 볼 때 기형으로 간주되는 ‘괴물들’, 기존의 존재론으로 포착되지 않는(기존의 존재론은 배제해 온) ‘이것’들(‘유목적 본질들’), 비물체적 변환으로서의 ‘사건’들, 상수들과 변수들을 일탈하는 ‘연속적 변이’=‘강도 연속체’들, 일반성과 특수성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되기’들, 홈 패인 공간을 가로지르는 ‘매끄러운 공간’들.

때문에 ‘plan de consistance’는 중간(milieu)이 아닌 어떤 시원에서 시작하게 만드는 ‘원리면(plan de principe)’, 또는 어떤 궁극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목적면(plan de finalité)’, 복수성들을 정합적으로 통일되게 만드는 ‘통일면(plan d'unification)’/‘총체화면(plan de totalisation)’에 대비된다. 우리는 ‘plan de consistance’가 ‘virtualité’의 또 다른 개념화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plan de consistance’는 ‘잠재면’/'혼효면'으로, (조직화의 도안에서는 불가능한,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plan de consolidation’은 ‘혼효면’으로,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함축하는) ‘plan de composition’은 ‘조성면’으로, ‘noumène’을 대치하는 ‘planomène’(‘물자체’에서 ‘잠재성’으로)는 ‘잠재계’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

 

 

***이정우의 소운서원http://www.sowoon.org/ [21세기존재론] 게시판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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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07. 8. 8.

2007/08/08 21:21

0.

 '내가 갈대처럼 흔들릴때조차 결코 전진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미 내가 애초에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존재임을 알아버렸기때문이다.

하여 나는 난 날도 모른다. 돌아갈 날에도 무심하다.

그리고 다만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사랑하는 사람아.'

 

 

1.

하루종일 비가 왔다

無心하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가

'인간이 자신의 죄업을 씻고 참회하는  방법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인가'라는 말을 했다

같이 마주 서 있는 동료가

'그것은 자기 만족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네'라고 답을 했다.

 

2.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언제 끝이나 어디로 갈 지도 無願하다

단지 두려울 뿐이다 !

平常心은 사라지고 妄想만 지배한다. 안타깝다.

 

3.

나는 지금 전진하지 않고 있다.

전진하는 힘이 없는 것인지 나아갈 방법을 모르는 것인지 아무튼 멈춰있다.

나는 無力하다.

 

4.

인간의 존재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가끔 '끝'을 생각해 본다. 역시 두렵다.

 

5.

다시 날고 싶다. 이것이 진짜 이유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생명체들에게 깊히 감사한다 

죽을 때까지 反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6.

두려움이 사라질 때 비로소 '나는 무한한 자유와 대자비의 화신'이 된다.

공포는 정신의 무능력에서 생긴다.

두려움 너머에 생동하는 反省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제낄 것이다. 그러면 열린다.

 

 

 

 

 

* '내가 갈대처럼...~...사랑하는 사람아' : 조문익 선배의 시에서 인용

* 공포는 정신의 무능력에서 생긴다 : 스피노자 [에티카] 제4부 '인간의 예속 또는 정서적 힘에 대하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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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진언

2007/06/13 09:15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

 

- 인간의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반배 염송하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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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거절의 미학

2007/06/04 11:06

"거절"의 미학 | 만감: 일기장  2007/05/30 22:34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6491   

 

저는 "한국이 이렇다, 한국인이 저렇다"는 식의 일반화 방식을 매우 싫어합니다. 개인마다, 세대마다, 계층마다 다 제각기 다르기에 어떻게 "국적"/"민족"이라는 기준으로 이렇게도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가 라는 것은 저의 반대 논리입니다. 그런데, 지나친 일반화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문화 차이"를 이야기하자면 예컨대 "거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야 없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거절"이라는 것은 제가 아는 다른 문화들 (예컨대 러시아문화나 북구 문화)에 비해서 한국에서 조금 더 하기 어려운 행위인 듯합니다. 초면이면 그나마 비교적으로 쉽지만, 구면일 때에는 아주 불가피한 사정을 자세히 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킬 수 있어도 그래도 왠지 미안한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수직성이 있는 관계라면 - 특히 사제지간은 좀 그렇습니다 - 아주 우회적인 형태의 거절이라 해도 때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더랍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하면, "안그런 데가 어디 있느냐"는 식의 반응이 나올 것을 충분히 예상합니다. 그런데 장담컨대 안그런 데가 있긴 있습니다. 러시아만 해도 비교적으로 권위주의가 강한 분위기에다가 특히 학계의 조직에서 위계성이 철저한데도, 저만 해도 한 번 한국에서 온 한 목사에게 좀 도와주라는 제 지도 교수의 요청을 - 물론 꽤나 우회적으로 - 거절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절했을 때에는 느낌이 좀 좋지 않았지만 결국 다행히도 스승과의 관계는 그대로 잘 유지됐습니다. 노르웨이에서 같으면 제게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을 한 제 제자도 꽤 있었습니다. 한 석사과정의 제자에게 학위 논문을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제출할 것을, 기존의 한 전례에 입각해 요청을 했을 때에는, "그럴 수 없다, 이와 같은 요청이 반복될 경우 상급기관에 법적 해결을 요청하겠다"는 답을 받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 답을 받아 '법적 해결'과 같은 문구를 접했을 때에, 제 기분은 약간 묘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런 방식은 사람 살기 좋은 방식이란 결론이 나서,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한국 같으면 특히 서비스부문의 노동자들이 고객에게 어떤 이유로든 거절을 할 때에 비상하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우곤 하는데, 노르웨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약 6년 전에, 경험이 좀 없었을 때에 신분증 없이 은행에 가서 돈을 빼려 했는데, "신분증 제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은행 직원은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더랍니다. 그 때에 기분이 비상히 안좋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직원이 과연 미안할 이유가 있었나 싶었습니다. 규칙을 모르는 게 고객의 잘못이 아닙니까?

 

하여간 노르웨이가 "거절이 좀 쉬운" 풍토라면 한국은 거절이란 외교적으로 잘 하지 않으면 안될, 외교적으로 잘 해도 안통할 수 있는 중대한 사항이더랍니다. "관계 문화", 집단에서 낙오되거나 관계망에서 차질이 생기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문화, 거기에다가 사회나 국가가 개인의 생존을 공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사회적 "정글" 현실이다 보니 대인 관계가 "외교화"될 수밖에 없지요. 노르웨이에서 자기 스승(? - 사실, 그런 개념도 아닌데 말씀입니다)에게 "무리하다 싶은 요구를 하면 법적 해결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 석사과정생 뒤에 그녀의 미래를 책임질 사회와 국가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어려운 관계"일 때에 거절하면 "내 미래가 불안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6-25 이후에 "가족끼리 튼튼히 뭉쳐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생존 도모'의 가족주의적 형태도 공고화된 부분이 있고 하니까 "거절"이나 "거부"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같으면 매우 독선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전통시대 지배계층, 사대부의 문화는 "대의명분"에 관련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필요할 때에 "거절"이 잘 통하는 문화이었지요 (그것도 미화만 할 수 없지만). 그런데 이제는 우리 이상은 "둥글게 둥글게" 관계를 잘 관리하면서, "거절"로 거래처들을 화나게 만드는 "무례함"을 잘 보여주지 않는 "민간인 외교관"인 셈입니다. 신자유주의로 가면 갈 수록 이와 같은 풍토가 심화되지 않을까 싶어요. "모나지 않게, 둥글게, 사이 좋게, 원만하게"... 이러다가 무슨 재미로 살다 가려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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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아침에

2007/06/04 08:44

6월 아침. 눈뜨기 전에 문득

 

참 많은 잡념과 미련과 미움과 기대감이 나를 잡아 흔들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회문을 외우고 삼배를 했지요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며, 참 많은 복이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출근 길. 걸어가면서

 

'인간은 누구나 분명히 '존재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 모든 생물체가 존재하므로  조심조심 잘 살펴서 살아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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