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니체가 말하는 참사랑

2007/02/20 10:29
 

[니체가 말하는 참사랑]


비둘기 걸음으로도 폭풍을 불러올 줄 아는 사람, 혁명에 웃음을 선사한 사람, ‘신은 죽었다!’ 라는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은 사람, 하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숫기 없는 사람.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에게는 도덕사학자 파울 레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살로메와의 관계에서 연적이기도 했다. 니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살로메에게 편지를 직접 전해줄 용기가 없어서 레에게 대신 전해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연적에게 편지를 전해줬으니 그 편지가 살로메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었고 당연히 니체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현실적인 사랑에는 서툰 니체였지만 이론으로는 사랑에 대한 장광설을 펼쳐놓았다. 니체가 말한 사랑에 대해 한번 들어보자.


흥미롭게도 니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소유욕이자 상대방을 자기화 시키려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소유(Property)라는 단어를 보면 소유라는 뜻 외에도 재산, 고유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은 없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도둑질하여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소유는 한 마디로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도둑질을 은폐하기 위해 정체성이니 고유성이니 하는 말들을 끼워 넣어 신비화 시켜버렸다.’ 라고 니체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니체는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리를 사랑스럽게 창조하고 정말 친구를 사랑한다면 사랑할 친구를 만들어라. 즉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사랑할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만드는 것이다.

니체의 사랑은 놀랍고도 힘들다. 하지만 그만큼 아름답다.

- 고병권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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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남쪽으로 튀어 !

2007/02/19 00:09

 

어른이 아이의 세계에서 무력하듯이 아이는 어른의 세계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다. (p. 304)

 

인간이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자신이 안전할 때 뿐이다. (p.  348)

 

마치 내일 또 만날 사람 같은 인사였다. (p. 395)

 

센티멘털한 기분에 빠지는 건 대부분 어른들이다. 어린이에게는 과거보다 미래가 훨씬 더 크다. 센티멘탈한 기분에 빠질 틈이 없는 것이다. (p. 397)

  

- 오쿠다 히데오. 양윤옥 옮김. 2006. [남쪽으로 튀어! 1]. 은행나무

 

 

"집도 사람이나 매한가지야."

"사람이 와서 살아주지 않으면 금세 늙어버려. 그러다가도 사람이 들기만 하면 갑자기 젊어지거든" (p. 45)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속이지 않는다, 질투하지 않는다, 위세부리지 않는다, 악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지키며 살아왔어. 단 한 가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면 그저 이 세상과 맞지 않았던 것 뿐이잖니?"

 

"아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 줄 뿐이야." (p. 287)

 

인류는 돈을 지닌 시대보다 지니지 못했던 시대가 훨씬 더 길었다. 그러한 인류 끄트머리의 기억이 000에게만 진하게 남은 것이다. (p. 299)

 

힘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은 영혼이 지금도 저 먼 남쪽에서 바람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p. 310)

 

 

- 오쿠다 히데오. 양윤옥 옮김. 2006. [남쪽으로 튀어! 2].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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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묵고] 몇가지 생각들

2007/02/15 00:57

오늘 그동안 계속 밀려왔던 일들을 일단락했다

그래서 술한잔 기분좋게 먹었다

 

술먹고 생각해보니

내가 서른다섯이 넘어서

'나도 참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구나'

 '살려면 어쩔수 없지'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변한다. 나도 변한다.

나는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내가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좀 더 깊은 생각과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내일도 행복을 기약할 수 없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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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운]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2007/02/14 13:03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지난주에 열린 한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 갔었다. 곧 복학할 제자가 복싱을 배워 처음으로 하는 경기라서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요사이 케이원(K-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격한 운동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줄 알지만, 그런 싸움질은 복싱과 크게 다르다. 순수한 아마추어 복싱도 잊혀진 스포츠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시 신인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는 아마추어 복싱연맹 주최로 신인을 위해서 일년에 한번 열린다. 한번 출전하면 다시는 출전할 수 없는 것이 대회의 규칙인 모양이다. 전국 신인 아마추어 복싱대회가 있지만, 권투 체육관이 주로 서울에 있기 때문에 서울 대회는 아마추어들을 위한 전국대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대회가 열리는 대학 복싱체육관은 낡고 비좁았다. 선수들은 구경 온 이들과 함께 바닥에 누워 쉬면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서서 몸을 풀어야 했다. 이들이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곳도 없어 보였다. 연맹이 구청의 체육관을 빌려서 진행해도 이것보다는 나은 대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은 죄다 완강하게 주먹을 쥐고 링에 올랐다. 서툰 선수들이지만 허투로 하는 시합은 없었다. 어둠 속에 눈이 빛나 보였지만 몸은 얻어맞고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했다. 링 아래에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선수들이 늙은 코치가 되어 자신의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어린 아마추어 선수와 늙은 코치는 희망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복싱이 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혼자 추는 춤도 아니고 둘이서 추는 춤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싱은 격한 스포츠이긴 하지만 삶의 격정과 슬픔이 묻어 있다. 아마추어 복싱은 육화된 순수이다. 젊은 아마추어들 선수들에게 복싱은 삶의 동력과도 같아 보였다. 말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좁은 링에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피한다. 상대방과 갈등하는 복싱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의 소산일 터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아마추어 복싱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야말로 링 위에 오른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일 터이다.


복싱을 즐기는 제자를 보면서 삶과 연극 그리고 복싱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의 결과이고, 말과 같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어떤 것을 생산하는 씨앗이다. 그러므로 삶과 연극 그리고 복싱에서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삶의 큰 자장이며 밑변이다. 말 없는 삶이 있을 수 없고, 삶 없는 연극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복싱은 육체적 긴장을 넘어서는 절실함이다. 내 앞에 바로 상대가 있고, 나와 상대는 서로 뚫어지게 쳐다보아야 한다.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눈은 링 위에 없다. 연극은 말하는 예술이되, 말하는 이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재의 예술이다. 복싱은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저 아마추어 선수들은 2분 4회전 동안 쓰러지지 않은 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쓰러져 지리멸렬해지면 금세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링 위의 삶은 눈물겨운 좌초이며 끝장이다. 한 생애가 몸부림치는 것이 아마추어 복싱이다.


연극이 말하는 이들을 위해서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처럼, 복싱은 링이라는 공간 위에서 벌어진다. 복싱은 주먹 이전에 링이라는 공간의 역사이다. 연극은 사람이 사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독백, 방백, 고백, 침묵 등. 이 모든 것이야말로 연극이 말하는 형식들이다. 복싱에서 주먹을 내미는 잽, 훅, 어퍼컷이라는 것은 주먹으로 말하는 형식이다. 선수마다 주먹을 내미는 특기가 다른데, 그 이유는 개인의 기억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수마다 다른 주먹의 형식은 그가 관계맺고 있는 가족과 사회라는 그물망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격렬하게 내미는 주먹이 있고, 공허하게 주고받는 주먹이 있다. 말의 형식은 삶의 형식이고, 집단적 기억의 형식은 연극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복싱은 지극히 개인적 삶의 형식과 형식의 대결이다.


말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 삶을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싱에서 발을 움직이고 주먹을 내미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생각해 보라, 제 삶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며, 말하기는 곧 자신에게 말걸기가 아닌가. 제 삶은 모두 제 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복싱에서 주먹은 말이고, 주먹을 내미는 것은 말걸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복싱에서 링은 큰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작은 세상이다. 여기서 각자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복싱의 미덕은 마지막 종소리가 울린 후, 뜨거운 눈물과 땀, 증오가 아닌 피로 범벅이 된 몸들이 첫사랑의 연인들처럼 껴안으며 서로 상대방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이다. 이 순간 얕은 패배도, 초라한 승리도 없다.   


제자는 이제 자신을 겨우 말하기 시작했다. 제 삶을 말하기 위해서 그는 힘들게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했고, 그것을 몸으로 말하기 위해서 링에 올랐다. 그가 치른 첫 번째 경기는 그가 육체로 구현한 삶의 연극이었으리라. 그의 삶과 아마추어 복싱은 짝패이다. 처음으로 링에 올라 타인들 앞에서 경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야만 하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래서 권투하는 이들의 시선은 낮은 곳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반목이 없는 그들은 언어의 순수성과 같은 것을 고민한다. 제자도 어느 날 링에서 육체가 몰락하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더 크게 그의 생애를 알 것이다.


안치운/호서대학교 연극학과 교수, 연극평론가

(출처 : 한계레 신문 2007. 2. 9. 책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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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하나님과 거울

2007/02/14 09:30

1.

아침 지하철 출근길.

기계음과 숨소리와 답답함만 들리는 비좁은 공간에서 어느 젊은 분이

 "......하나님은 온세상에 충만해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이 어쩌면 하느님이 자신의 내부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충무로역에는 공중전화 박스 밑에서는 가끔 노숙자가 늦잠을 자기도 한다

그는 이불을 덮고 잔다

볼때마다 '관세음보살'하며 기도한다

 

2.

나는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은 타인과의 타협의 결과물이며, 그로 인한 이미지이다

진실은 자신만이 알 뿐이다

어쩌면 주관이 객관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지하철의 노숙자가 편하게 늦잠을 잘 수 있고, 젊은 전도사가 악을 쓸 수 있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면서 말하기'에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거짓을 진실인양 고귀하고 강력한 목소리로, 때로는 요염한 목소리로 말하는 자들을 보면 나는 분노한다.

대통령, 대변인, 국회의원, 정부부처 고위공무원, 판사, 검사, 변호사, TV에 연예인처럼 나타나는 박사들, 연예인, 뉴스 아나운서들이 그렇다. 가끔 자기욕심이나, 돈에 다급하여 말하는 내 주변과 내가 그렇다.

 

나는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볼 줄 안다고 생각한다

 

 

- 2007. 2. 14.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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