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민족적" 자위와 카타르시스: "주사"의 정치 

만감: 일기장 2008/03/20 19:42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2160 

 

 며칠전 주위의 소위 말하는 "주사파"에 평소에 많이 시달려오신 한 지인 분과 점심 하면서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 알 것을 다 알게 된 요즘 세상에서 1980년대말의 이 정치적인 "유물"이 어떻게 이렇게 잘 "보존"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은 저희 두 사람의 공동된 궁금증이었습니다. 같이 생각하다 보니 현실과 "주사파"의 상상 세계가 사실상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현실이 아무리 바뀌어도 "주사파"는 바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사파"의 "상상의 정치"를 표현하자면 이게 성교 상대방의 실질적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종의 "자위 행위"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성욕을 극복치 못하는 보통 중생이 실질적인 성행위를 못하는 경우에는 대개 자위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러한 표현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실제로 성인의 절대 대다수는 자위의 경험이 있는 것이고, 이는 정상적인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상 (내지 상상)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할 수 없는 이들은 대개 상상 속에서 가상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그 완벽한 유토피아에 대한 찬양을 하면서 충성을 다짐하지 않습니까? 일부 서구 중산층 출신의 불자들이 보는 "오로지 명상에만 잠기는, 평화로운 샹그릴라와 같은 티베트"도 그러한 유토피아에 속하고 (실제로는 티베트 역사는 전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후반의 서구 마오이스트들이 생각했던 "혁명적 열정에 가득찬 신 중국"도 그랬고 (실제로 문혁은 "혁명"이라기보다는 대규모의 야만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조선 사대부들의 "요순시대"나 "세종대왕 시대의 치국"도 그러한 "행복한 상상"에 속합니다. 세상이란 바로 고(苦) 그 자체라는 진리, 중생이 있는 곳에 모순과 갈등이 늘 있다는 진리, 국가라는 폭력 조직이 - 그게 달라이라마의 국가든 모택동의 국가든 -  그 성질상 "아름다울 수" 없다는 진리는 인간에게 참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안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지요. 가는 데마다, 심지어 본인이 속하는 집단에서까지 모순을 발견하고 자아를 집단과 분리시켜야 하니까요. 그러기에 차라리 집단적인 "행복한 상상", 어디에선가의 유토피아 찾기에 정신을 파는 게 더 쉽습니다. 그것이 광의의 집단적 자위 행위가 아니라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민족"이라는 코드가 아주 잘 통하는 병영형 국가주의적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집단적인 사상적 수음의 행복한 시간"은 필연히 "민족"을 그 소재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기꾼과 각종 소인배들이 제 이익을 추구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서울 한복판에 앉아서 "어진 어버이 수령님", "완벽무구한 사회주의 조국", "어버이다운 배려에 감사를 하면서 조화롭게 사는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인민", 그리고 "미제를 언제나 쳐부쉴 수 있는 민족의 귀중한 핵"을 상상하며는 얼마나 행복해집니까? 특히 저 악취나는 앙키놈들을 일격에 박멸할 수 있는 "민족"의 페티쉬, 핵 미사일을 상상하면 아마도 진정한 극렬 민족주의자라면 거의 클라이막스로 갈 듯합니다. "남"들을 언제나 제압할 수 있는 "우리" 강성대국의 "힘의 잔치"... 현실 속에서는 그 놈의 영어와 씨름하면서 나날을 보내야 하지만, "외래어를 더 걸러낸 순수한 우리 말"과 "충성/효성" 그리고 핵무기의 고장을 수시로 염하면 절로 혈액 순환이 빨라집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보고 인민의 아편이라 했지요? 요즘은 그 아편이 다양화, 다변화돼 꼭 정통 종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보면 자위 행위가 성생활의 필수적 일부일 것입니다. 집단적인 "사상적 자위"는 어떤가요? 아마도 특정 제도 내지 정치적 장치에 대한 비현실적인 집단적 미화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대다수에게 거의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학교에 올 때마다 성조기라는 역겨운 페티쉬 앞에서 "충성 맹세"를 하는 미국 아이들을 보시기를... 그런데 수천만 명이 아사, 폭사했던 모택동 시대의 중국이나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정치수가 존재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오늘날 북한을 집단적인 "사상적 자위" 대상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도덕적으로 죄가 됩니다. 아무리 폭력적 포르노를 좋아한다 해도, 사람을 진짜 죽이면서 촬영하는 "snuff film"을 그래도 보통 안보는 것이지 않습니까? 북한에서 사람이 죽는 것이 가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문제이기에 "민족의 핵"을 운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해서 안될 행위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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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일행은 북경의 선무문 안 상방에서 그리고 한 번은 열하의 선무문 안 상방에서 코끼리를 직접 볼 기회를 가졌었다. 연암은 서적이나 소문으로만 듣던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을 직접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상기에 코끼리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는 등 그 충격어린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빨도 다 아래로 드리워져 막대기를 짚은 것만 같고, 갑자기 앞으로 향할 때는 환도를 잡은 것 같기도 하며, 갑자기 마주 사귈 때는 예자같이도 보여 그 쓰이는 법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당 명황 때에 코끼리 춤이 있었다는 말이 사기에 있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의심을 했더니, 이제 보아 사람의 뜻을 잘 알아먹는 짐승으로는 과연 코끼리 같은 짐승은 없었다.

 

“승정 말년에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코끼리 우리를 지나갈 때에 뭇 코끼리들은 눈물을 지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대체로 코끼리는 꼴은 둔해 보여도 성질은 슬기롭고, 눈매는 간사해 보이면서도 얼굴은 덕스러웠다. “코끼리는 새끼를 배면 다섯 만에 낳는다.” 혹은 “열두 해 만에 낳는다.”한다. 해마다 삼복이면 금의위 관교들이 의장 깃발을 늘인 노부로 쇠북을 울리면서 코끼리를 맞아 선무문 밖을 나와 못에 가서 목욕을 시킨다. 이럴 때는 구경꾼이 늘 수만 명이나 된다.

 

코끼리의 지혜와 재주, 그리고 충성심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물론 연암의 관심이 이런 신기한 이야기들에서 멈출 리가 없다. 그의 상상은 훨훨 나래를 펴 코끼리를 통해 천지자연의 원리를 사유하는 장으로 나아간다. 그 구체적 결과물이 <상기>이다. 오히려 초월적 존재를 초월한 코끼리.

 

코끼리는 범을 잡고, 범은 쥐를 잡으나 코끼리는 오히려 쥐에게 잡힌다. 그러니 이 셋의 관계를 하나의 척도로 재단하려 한다면 필연코 궤변에 빠지고 만다. 즉 이들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척도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조건의 네트워크에서 만남에 의해 척도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상대주의로 판단하게 되면 모든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허무주의적 사유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절대주의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의 척도나 이치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궤변이 됨은 코끼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연암은 자신의 사유를 그 사이에 놓고 있다. 이는 관계나 배치 속에서 가치나 이치가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는 만남에 의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만나야 하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코끼리에 대한 상상을 통해 ‘주역’의 오묘한 원리를 엿보는 것, 이것이『열하일기』가 자랑하는 명문 <상기>의 결말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요점은 간단하다. 세계를 주재하는 외부적 실체란 없다. 고정불변의 법칙 역시 있을 수 없다. 무상하게 변화해 가는 생의 흐름만이 있을 뿐! 그런데도 사람들은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이거야말로 번뇌를 자초하는 꼴인 셈이다.
만물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차이들, 거기에 눈감은 채 한 가지 고정된 형상으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 비유하자면, 그건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는 꼴에 다름 아니다.

 

-출처 : 고미숙 <『열하일기』, 숨은 보석을 찾아라!> 제10강 상기(象記): 하늘이 코끼리를 낸 뜻은?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노자』 7장 中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너르고 오래갈 수 있음은, 자기의 삶을 조작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무(無)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무의 상태란 아무 것도 없음이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엔 담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두 털어냄으로써 그 어떠한 것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능히 사사로운” 것들을 담아낼 수 있게 된다.

 

생의 사사로움 이란 무엇일까?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그 식단 안에 3대 영양소를 골고루 배합하는, 더 나아가 3대 영양소를 포함하면서도 혀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혀를 만족시켜 주는 것과 동시에 분위기 있는 장소에서 근사한 옷을 맘껏 뽐내며, 멋스러운 여유를 즐기는 것. 그런데 그것은 한이 없다. 근사한 치마를 사면 그에 따르는 근사한 구두를 신어야 하고 또 그에 걸 맞는 핸드백과 스카프라든지 어울리는 아이템을 걸쳐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있다. 한 끼 식사에는 분위기 있는 장소와 근사한 옷과 신발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이것들은 분명 사사로운 것들이리라.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시기하며, 반대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 또한 ‘사사로움’ 혹은 ‘덧없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좋음’ 또는 ‘싫음’ 감정 자체는 사사로운 것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생기는 그야말로 사사로운 감정의 격변들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의 사소한 행동과 습관까지도 거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슬림’은 자신의 행동과 마음까지 바꿔놓게 된다. ‘있는 대로의 현상과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대로 주위의 환경과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짓는 데서 사사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노자는 “몸을 내져짐으로 해서 몸이 존하고, 새로이 존한 몸으로 모든 사사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해탈’의 경지와 다름 아니다. 지고의 득도에 의한 어려운 해탈이 아니라, 나와 너를 이해하고 ‘너의 사사로움’을 인정할 때 생기는 작은 인정의 샘이 바로 무한의 그릇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몸을 내던지는 것만큼 어렵고도 쉬운 것은 없다. ‘될 대로 되라’의 자포자기적인 내던짐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삶의 작은 모든 것을 담을 소박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미 ‘무한그릇’의 초벌굽기는 마친 셈이다.

 

-출처 : 김시천 <도가사상과 현대철학: 노자부터 데리다까지> 제13강 형이상학에서 은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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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221번지

2008/02/04 12:22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221번지

 

내가 잠시 머물렀던 곳.

출장 다녀 오는 길에 사진에 담아왔다

이제는 애틋한 기억만 남아있다

 

 

논실마을 학교이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깨끗하지만 봄부터 시작해서 가을까지는 풀이 운동장에 가득했다

어느 때 여름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갈매기 선생님은 학교 운동장을 걷다가 뱀을 보았다고 했다

여름에 학교 운동장을 멀리서 보면 잔디밭 같지만, 학교에 손님이 오거나 수련회 따위를 오면 풀 베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내가 남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형수가 운동장 한켠에서 쪼그려 앉아 풀베는 모습이 기억난다

운동장에 비하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교실이나 숙소를 청소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규모가 크다 보니 여러 사람의 손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전라도 말로 '테'가 나는 곳이다

 

 

내가 살았던 관사이다

별과 달이 그려져 있으며, 방이 두개인데, 난 달이 그려진 방에서 살았다

별과 달은 성매매 여성들이 학교에 와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뒤 편에 보이는 화장실과 관사에 그린 것이다

내부에는 화장실이 있고 싱크대가 있어 밖에 나가지 않고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겨울에는 방안의 수도관은 물론이고 화장실 물까지 모든 것이 얼어버린다

밤에 술을 먹고 관사 앞에서 운동장을 눈 밑으로하여 하늘을 보면 별이 너무 좋다.

검은 밤의 빛나는 별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뚜렷하다

 

출근시간에는 용화나 용창이가 달려와서 나를 깨웠고,

늦은 밤에는 전주나 남원, 장수시내를 나갔다가, 5인승 1톤 트럭의 뽕짝 테이프 음악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조선배가 들러서 하루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 하는 곳이었다

형수가 동네 어른들 몰래 담배 피는 장소이기도 했다.

 

 

 

현관 앞에 앉아 있으면 햇볕이 참 따뜻하다

겨울에는 그 고마움이 더하고, 초봄에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아 그냥 지금 여기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가끔 바람이 불면 생각도 같이 날라간다

교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보니, 풀을 베거나 청소를 할때도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곳이다

풍경이 달려있어 바람이 불면 그 소리가 청정한데, 나른한 봄날 오후에 담배 피기에는 지구에서 최적의 장소라 생각된다

 

이제 이 모든 기억이 저편으로 넘어갔다

학교를 떠나면서는 혼자 속으로, '언젠가는 다시 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 생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공간은 시간과 함께 변하며, 시간은 그것을 재거나, 영위하는 인간이나 생물들과 함께 변한다

언뜻보면, 그대로 인 것 같지만, 이제 공간과 시간과 사람이 변하여 사뭇 낮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情)은 사람이나 키우는 개들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땅이나 건물과도 나누는 것인데, 이제 내가 매정하게 이별했으니 할 말이 없다.

 

20008. 2. 1. 점심때를 약간 넘은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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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점심을 먹다가

2008/02/03 16:43

혼자 생활하다 보니 주말에는 혼자서 식당을 찾아 밥을 먹는다

 

설렁탕 한 그릇 떠 먹다가 우연히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졸업할 날, 간짜장을 사주었고, 중학교를 졸업할 날, 육개장을 사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때는, 졸업식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새벽에 집에 왔는데, 아버지는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밥을 먹다 보니 그 생각이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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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사용했던 블로그 이미지

2008/02/03 16:39

 

그 동안, 몇 년 동안 사용해던 블로그 이미지 이다

대학 다닐 때인가, 대학원 다닐 때인가 인터넷에서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그 뒤로 출처가 어디인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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