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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6/12

1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6/12
    아포산 6
    봄날
  2. 2005/06/12
    아포산 5
    봄날
  3. 2005/06/12
    아포산 4
    봄날
  4. 2005/06/12
    아포산 3
    봄날
  5. 2005/06/12
    아포산 2
    봄날
  6. 2005/06/12
    아포산 1
    봄날
  7. 2005/06/12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봄날

아포산 6

산의 한쪽에서는 아직도 '화산의 흔적'들이 내뿜어지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코와 눈을 자극해왔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서있는 동안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아가야했다.

 

물이 다 떨어졌다.

아니 물을 이고가기엔 7시간에 걸친 산행으로 몸이 벼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바위틈으로 피어난 '와일드 베리'를 따먹으며 갈증을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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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5

화산폭발의 흔적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었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4시간 남짓 갔을 때 만난 것은 돌산이었다.

화산의 흔적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암벽'과 '돌'로 만들어놓았다.

장엄한 산의 흔적은 여기서부터 드리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구름위에 서 있었다.

저 고개를 넘어서 끝도 없이 위로 위로 올라갔다.

구름을 밟고 또 구름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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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4

길이 없었다.

필리핀에서 가장 높고(해발 2,984), 그 정상에서 민다나오 섬이 다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필리핀 산악인과 사람들의 자존심이면서도

산 정상에 이르는 길하나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해서 가이드 없이는 아포산을 오를 수 없다고 했다.

나무를 헤치고 길을 만들고 또 나무를 넘으면서 조금씩 산의 기운을 맛보았다.

첫날과 달리 잠시 해가 그 모습을 수풀 사이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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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3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결국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만에 오늘의 일정을 접었다. 

인근의 유일한 집의 아랫담에서 그집 가축들과 함께 비를 피했다.

그때가 오전 10시... 점심부터 챙겨먹고 12시부터 필리핀의 술 '단두와인'을 먹기시작했다.

어찌나 취했던지 하루내내 술만 먹고 자고, 또 술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결국 다음날 아침 일출을 볼 수 있을만큼 일찍 깼다.

 

산행을 위해  짐을 꾸리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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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2

화물차에서 해뜨는 것을 보며 2시간 남짓 달렸을까?

아포에 들어가는 초입 마을에 도달했다.

이곳의 주요한 교통수단은 말..

아이들도 말을 타고 다녔다.

 

몽골도 이런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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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1

아포산을 향해 출발했다. 길떠난 시간이 새벽3시..

 

다바오 시내에서 키다파완으로 가는 차를 탔다.

버스라 짐작했었는데 우리가 오른 차는 대형화물트럭 뒷칸이었다.

이곳에서는 큰 화물트럭도 사람이 타는 대중교통일 뿐이다.

 

우기시즌이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자 트럭 승무원들이 천막을 치기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천막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화물칸에 벌러덩 누었다. 그리고 비오는 하늘을 보았다.

별이, 그리고 새벽 달이 눈에 들어왔다.

'삶은 이렇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도 이어지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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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지난 4월 26일 밤 12시경 필리핀 마귄다나오(Maguindanao)의 한 마을에서 무장 군인들이 부인과 그의 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앞에서 하킴(가명)을 체포했다. 군인들은 3일 동안 하킴의 온 몸을 꽁꽁 묶고 조사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자 되돌려 보냈다. 물론 군인들은, 체포영장 제시는커녕 체포 이유에 대하여 전혀 고지하지 않았으며, 체포 당일에는 하킴을 고문했다. 같은 날 그 무장군인들은 하킴 집 근처에 있는 두 집에 영장도 없이 무단 침입하여 무기를 찾는다며 가재도구를 헤집어 놓았다. 사건 내용만 보자면,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피킷에 있는 코코넛 나무. 맨 앞에 있는 나무는 온 몸에 총알 흔적 투성이다. 윗 부분은 폭탄으로 잘려졌다.

그러나, 이곳 피해자들은 동트기 전 자신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로 도망가야만 했다. 언제 또 군인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고 살던 이들은 동네를 떠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집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떠나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과의 인터뷰가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 이루어졌는데, 그 때까지도 그들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민다나오의 국내 난민들

민다나오 섬은, 1997년·2000·2003년 정부와 이슬람해방전선(MILF,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사이의 세 차례 큰 내전을 겪었다. 민다나오 섬에 가면 아직도 전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총알 흔적이 남아 있는 코코넛 나무들과 완전히 전소해 버린 집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직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수만 명의 국내 난민들(Inernally Displaced Persons, IDPs, 아래 상자설명 참조)이 전쟁의 비극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2003년에는 약 20만 명의 국내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피투폰(pitoopon)에 있는 난민센터

무고한 이들은 생명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쟁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는 친척집으로 피난갔으나, 대다수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의 학교나 관청 마당에 모였다. 몇 개월 그곳에서 피난 생활을 한 후 부근 빈터에 임시 처소를 짓고 공동생활에 들어갔다. 식량 배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선단체에서 식수를 위한 우물을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많은 아이들이 설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농민인지라, 피난과 동시에 일자리를 잃었다. 아이들은 피난 생활 초기에는 교실이 없어 학교에 못 갔고, 계속되는 피난생활 기간 동안에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이 종료 된지 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더라도 마땅히 먹고 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전쟁으로 경작지와 경작에 사용한 동물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도 이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실제로 지난 2월, 격전지 중 한 곳이던 피킷(Pikit)에서 불발탄이 터져 밭에서 일하던 주민이 큰 상처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난민센터이든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아이들이었다.

하킴의 가족들과 난민센터에서 만난 분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을 멈추기 위해 나선 사람들

민다나오 섬에 사는 국내 난민들은 난민에 대한 지원과 안전한 복귀를 주장하는 시위를 통해 그들의 힘(Bakwit power, Bakwit은 따갈로그어로 국내난민을 의미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의 피해자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전쟁 감시 역할을 자처하며 주민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전쟁 감시를 위하여 주민들이 '반타이 시스파이어'(Bantay Ceaserifre, 전쟁감시)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지역 주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전쟁과 군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전쟁과 인권침해에 상당 부분 노출되어 있다.

"평안하셔야 합니다. 제발…아무 일 없어야 합니다." 하킴 부인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민다나오=이상희]

국내 난민에 대하여

'국내 난민'(IDP, IDP가 국내유민, 피난민, 국내 유랑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은 '무력충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상황, 인권침해, 자연 또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기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거나, 떠나도록 강요받은 사람들'로서, 국경 안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반면, '난민(refugee)'이라 함은 국경 밖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999년 발표된 미국 난민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국내 난민 발생률이 4위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국내 난민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무력충돌(특히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이다. 그리고,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나 경제 특구 등의 정부계획으로 도시 빈민들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경작지를 비경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또는 다국적 기업의 광물 채취과정에서 많은 국내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국내 난민들이 불안, 공포, 충격, 산만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유엔은 국내 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내 난민 가이드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internal displacement)을 제정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민들이 비자발적이고 무분별하게 주거지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부 당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난민이 발생하더라도 난민기간 동안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복귀나 재정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위 원칙에서 금지하고 있는 비자발적 이탈에는, 1)정치적 분리나 인종 청소, 기타 민족적·정치적·인종적 구성인원을 변경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이탈 2)무력충돌 상황에서 안전보장이나 군인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탈 3)강제와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4)피난을 갈 정도로 안전이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재앙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5)대규모 처벌로 이루어지는 이탈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매해 발생하는 수재민은 국내 난민으로서 위 원칙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또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전 예정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하여 국내 난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위 원칙의 적용을 검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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