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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드무비]를 보고 ...


 

 

1893; Casein/waxed crayon and tempera on paper (cardboard), 91 x 73.5 cm (35 7/8 x 29"); Nasjonalgalleriet (National Gallery), Oslo

 

 

초등학교 교재 등에서 자주 접했던 Edvard Munch의 [The Scream (or The Cry)]입니다.

 

뭉크는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 사랑에 대한 고뇌 등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막연한 느낌들을 테머로 회화로 표현했습니다. 한마디로 유럽의 세기말을 대표하는 한 사람입니다.

 

고독, 병과 죽음, egoism, 性에 대한 고민 등, 누구나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회피하고 싶어 하는 문제들을 뭉크는 어떤 의미에서 노골적으로 회피나 애매함 없이 정면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민족과 시대를 넘어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주제로 표현한 것에 뭉크가 가지는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자신의 침실이나 거실 등에 장식해 두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보고 있으면 가슴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답답함은 불안때문인지 공포때문일지 모르겠지만 ... .. .

 

바다위에 설치된 다리 위에 귀를 막고 절규하고 있는 사람과 그 뒤의 뒷모습만 보이는 두 사람. 요동치듯이 묘사된 노을진 하늘, 강 위의 배 두척,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은 피요르도...

 

이 작품을 그리기 1년전에 작품에 뭉크 본인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해가 저물고 있던 거리를 나는 친구들과 걷고 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어 갔다. 나는 멈춰서서, 피곤한 몸을 난간에 기대었다. 검푸른 피요르도, 거리 위의 구름이 피나 불꽃처럼 옆으로 퍼져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강렬한 불안에 몸을 떨면서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크고 강혈한 영원한 소리를 들었다.

 

즉, 이 그림에서의 절규는 그의 절규가 아닌 것입니다. 자연의 절규를 그가 들었던 것입니다.

 

공포를 느낄만큼 조용함에 따른 불안. 아마도 뭉크는 이 조용한 풍경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자연의 절규를 들었는 지도 모릅니다. 귀를 막고 모든 소리를 밀폐하고 자연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귀에도 처음으로 자연의 절규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김인식감독의 [로드무비]를 봤다. 기대밖의 진정으로 찬사를 보낼 만큼의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괜찮은 영화였다. 분명히 이 영화도 상업성을 목표로 만들어 졌지만, 그 완성도의 놀라움은 상업성이란 딱지를 떼기에 충분했다.

 

일반적으로 [로드 무비]라는 말은 영화의 장르를 의미한다. 길에 관한 영화가 [로드무비]인 것이다. 여기에서의 길이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Thelma & Louise]에서는 자아의 발견으로, [Simple Men]에서는 가족제도의 허상을, [Drugstore Cowboy]에서는 한 인간의 성장을 의미한다.

 

영화 [로드무비]에서는 길이 소통을 의미한다.

 

무엇에 대한 소통인가? 바로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형식에 대한 것이다. 우리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이성간의 그것도 남자가 연상이고 여자가 연하인 언제나 정형화된 형상을 쉽게 떠 올린다. 하지만 주위를 곰곰히 살펴 보면 의외로 소수의 형태이지만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 미성년자와의 사랑, 혹은 해외 토픽으로 자주 나오는 사제간의 사랑 등등 ... .. . 이 영화는 그러한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경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동성간의 사랑을 주제로 내세운다.

 

동성애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의 반응은 어떤 혐오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아마도 동성애에 대한 선입관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사회의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이성애자들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동성애문제도 결국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차별에 관한 것이다.

 

UN의 인권위원회의 선언과 남아프카공화국의 헌법 등에는, 인간이 이성 혹은 동성의 어느 쪽을 연애의 대상으로 하는가에 의해서(성적 지향의 차이에 의해서) 차별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서구의 동성애자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의 사회에 스스로 맞춰서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권리 등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성에 눈 뜨는 10대의 경우에는 자신이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동성애자임을 알게 될 경우, 강한 거부감과 심한 고독감을 느낀다고 한다. 일전에 있었던 10대 동성애자의 자살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이다.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의 빈곤함이, 또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일방적인 편가르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억제하거나, 혹은 숨기고 살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또 한, 영화 [로드무비]는 동성애 외에도 우리 사회의 경직성이 가지는 소통의 부재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일주로 대표되는 몸을 파는 여자들, 거리의 부랑자 등과의 사회적 소통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민석(정형기)이 자살하기 전에 말들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계속 나는 길 위에서 생활했다. 이 길 위를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희망이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뿐이었다. 영화에선 자살 장면이 자주 나온다. 사회와의 소통의 부재에 따른 일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자살인 것이다.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은 가난도 육체적 힘겨움도 아니다. 사회와의 단절에 따른 불안과 절망을 이기지 못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로드무비]는 개인과 개인간, 개인과 사회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국도를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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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에 대한 잡생각들 ...


 

 

1457-60 ; Wood, 76 x 96 cm (30 x 38 in); Musee du Louvre, Paris

 

 

Andrea Mantegna의 [Calvary]입니다.

 

Mantegna는 르네상스 초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파도바파의 거장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장엄한 구도, 조형성이 강한 해부학적 인체 표현과 소실점을 밑으로 낮춘 독특한 원근법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를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구분시키는 중요한 것은 서양미술사에서 처음으로 환각기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환각기법의 사용에 의해 표현의 대상을 더욱 더 돋보이게 표현함으로서, 보는 사람들에게 대상을 마주 대하고 있는 듯한 생동감과 장중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역삼각형 구도를 채택함으로서, 보는 사람들에게 강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세밀하게 표현된 인물들의 표정과 길게 뒤로 이어진 원근법 등에 의해 그림에 생동감과 장엄함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병사들을 조각적으로 표현함으로서 강한 엄격함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는 이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우러르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한층 더 강한 비통감과 긴장감을 가지게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왜 중앙의 그리스도보다는 양쪽의 죄인들에게 눈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양쪽의 죄인 중의 하나가 사반일지도, 혹은 아하스 페레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하늘의 나라보다는 제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구현되기를 바라는 - 어떻게 보면, 매우 세속의 때가 잔득 묻어 있기 때문일지도 ... .. . 모르겠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 의견이 대립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찬성쪽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사형제도를 지지하는 이유로는,
1) 흉악범은 그의 목숨으로서 그 죄값을 치르야 한다.
2) 사형제도를 폐지할 경우, 그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해서
3) 사형제도가 폐지될 경우, 흉악한 범죄가 늘어날 것이다(사형이라는 강력한 형벌에 의해서 범죄가 예방된다).
4) 재범의 우려가 높다 등이다.

 

하지만, 강한 처벌이 범죄억제 효과가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므로, 사형제도가 가지는 의미는, 피해자를 대신해서 흉악범을 사회로부터 말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을 위한 사회적 보복인 이 제도가 사회의 필요악으로서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흉악범에게는 강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의견은 오로지 범죄의 책임은 그것을 행한 개인에게만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닌가? 실제로 대부분의 범죄의 내적인 원인은 그 사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사회적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는한 ... .. .

 

그리고, 강한 처벌만을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의 문제점들을 외면하고 단순히 그 개인의 인성 등에 책임을 전가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강한 처벌은 강력한 경찰국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한 움직임에 의해 개인의 자유 등이 무시되고, 획일화된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될 위험성도 있다.

 

피해자와 그 가족의 감정은 무시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우선 매스컴의 선정적인 보도의 규제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 제도의 확립 등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현실에서 합법적인 살인은, 사형과 전쟁뿐이다. 둘 다 국가가 강제하는 살인 행위이면서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국가에 의한 살인 행위는 일어나고 있고, 게다가 그것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얼마나 사형이 국가권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용되어 왔는가? 사형과 전쟁은 국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이용되어 왔다. 사형제도의 폐지는 무엇보다도 자의적인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한 국가권력에 의한 살인행위에 대한 폐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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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


 

 

1814 ; Oil on canvas, 104 3/4 x 136 in ; Museo del Prado, Madrid

 

 

Franceso Jose de Goya(1746-1828)의 [The Shootings of May Third 1808]입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거장인 고야. 원래는 초상화와 인물화를 그렸지만, 나폴레옹의 스페인침공에 의해 유명한 이 그림과 [전쟁의 참화]라는 판화를 연작으로 만들었습니다.

 

원래 고야는 자신의 출세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궁정화가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이 때, 고야는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직면하게 됩니다.

 

당시 스페인에서 화가로서 최고의 지위를 가졌을 때에 고열로 인해 목숨은 건지지만, 청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이라는 시대적 흐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그림은 포로로 잡힌 스페인인들을 학살하는 나폴레옹의 군대의 모습입니다. 총부리 앞에서 절규하는 사람,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두손으로 가리는 사람, 애절한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마드리드를 점령했을 때, 프랑스 군대에 대항한 마드리드의 시민들을 끌고 가서 총살하는 장면을 통해 고야는 애국심을 강조하기 보다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잔인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강력한 화력 등으로 스페인을 점령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정신을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죽어 있는 시체들과 양팔을 크게 펼친 사람과 죽음의 공포 앞의 다양한 포즈의 사람들을 통해서, 고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시대의 변화가 한 개인의 광기가 되어 버린 것을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떠한 명분의 전쟁도 그것이 반인간적이며 어떠한 정당성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동물인가를,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서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이 지금 시점에도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인간학살이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애국심 :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국가에 대하여 헌신하려는 의식/신념(출처 : naver).

 

[애국심]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고 하면 왠지 모르게 망설여지게 됩니다. [애국심]이란 단어를 접하고 들은 적은 많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받으면, 이것이 [애국심]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각자에 따라서 애국심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던지, 스포츠 등에서 한국과 다른 나라의 경기에서 한국팀을 열성적으로 응원한다던지, 세계적인 화가나 과학자 등이 한국 사람인 경우에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등을 [애국심]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애국심]이란 단어에서 국수주의와 군국주의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한국의 근대사에서 [애국심]은 하나의 국가주의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 혹은 국가에 대한 경례 등을 통해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여전히 군사문화와 국가주의의 잔재들이 남아서 활개를 치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에, 최근 냉전의 종식과 함께 [국익]이라는 이름의 [애국심]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사회를 냉전시대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별되었지만, 지금은 무한 경쟁시대라는 구호 아래 국가의 이익 추구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은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베트남에, 국제경쟁시대의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에 동참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이라고 칭한 법이 악법인지 어떤지를 떠나서, 악법임을 알면서도 법을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판단 역시 개개인의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악법인 것을 알지만 법을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그 악법을 바꾸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결정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 역시 다양한 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국가의 선택에 무조건적으로 국민-혹은, 각 개인이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군사정권에 대항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무조건적인 충성이 아닌 [자유]와 [평등], [공존] 등을 우선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구에 하나의 정부가 있다면, [애국심]이란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애국심]이나 [국익]이라는 제로섬논리-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는 죽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 [인류애]를 추구하는 세계로의 발상의 전환은 불가능한 것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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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한. 민. 국. 당신들이나 똑바로 하세요 ..


 

 

1937 ; Oil on canvas ; 349.3 x 776.6 cm ;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입니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라고 이름 붙여도 부족한듯한 느낌이 드는 Pablo Picasso(1881~1973)의 [Guernica]입니다. 피카소에 대해서 제가 아는 여담은 그의 본명-호적상의 이름이 너무 길어서 자신조차도 자신의 본명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게르니카]는 설명이 필요없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피카소가 그리게 된 것은, 1937년 파리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의 벽화를 의뢰받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주문에 의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싫어했던 피카소로서는 도무지 진척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모국인 스페인으로부터의 뉴스를 듣기 전까지는 ... .. .

 

당시 스페인은 인민전선과 독재자 프랑코간의 내전 상태에 있었습니다. 프랑코를 지원하고 있었던 히틀러의 독일군이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를 폭격합니다. 3시간 15분의 폭격으로 2000명에 가까운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이 죽고 마을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피카소는 20일남짓만에 이 그림을 완성해서, [게르니카]에서 있었던 야만적인 사실을 역사의 증거로서 남겼던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가장 극한 폭력 앞에서 죽은 아이와 울부짖는 어머니, 우는 여인 ... .. . 그리고 말과 황소, 죽은 군인 ...

 

사실 [게로니카]를 그리기 전까지 피카소 자신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게르니카]에서 있었던 만행을 접하고 나서, [스페인내전은 인민과 자유에 대한 반동적인 전쟁이다. 나의 지금까지의 예술적 세계는, 단지 예술의 죽음과 반동에 대한 싸움이었을 뿐이었다. ... (중략) ... 스페인을 공포와 죽음의 바다로 빠지게 하는 군사력에 대한 나의 공포감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그림의 특징은 흑과 백, 단 2가지 색만이 사용된 것과 상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폭격에 의해서 파괴된 도시 속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을 사람들과 화염들이 흑과 백으로만 묘사된 것은 사진의 영향 때문이라고 합니다. 흑백사진 속에서는 아무리 붉은 색이라도 검게만 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와 말은 야만의 상징입니다. 말과 소 아래에 사람들이 짓밟혀 있는 것처럼 그렸기에, 말과 소는 독일의 히틀러(나치)와 스페인의 프랑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쟁의 야만에 대한 증거입니다. [게르니카]의 학살에 당시 세계는 독일과 프랑코를 비난했고, 미국의 후버대통령은 [비전투원인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하는 것은 부정한 행위]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습니다. 그런 미국이 한국, 베트남, 남미, 유고, 이라크 ... .. . 온세계의 시민들을 폭격해 왔고, 지금도 학살하고 있고, 앞으로도 Made in U.S.A가 붙은 무기 아래 죽을 것입니다.

 

[게르니카]라는 마을은 20세기를 넘어서 지금도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매우 절친한 친구 중에 한창 미국에 의한 일방적인 이라크침공이 있을 때에 반전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넘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라크의 후세인정권은 독재정권으로서 이라크민중들이 모진 탄압과 학살을 당했기 때문에, 단지 죄 없는 이라크 민중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반전집회의 영향으로 후세인정권이 건재하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옳바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반전집회 소식이나 이라크인들의 피해에 대해서 애써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부시도 싫지만, 후세인 역시 천하의 독재자이기 때문에 [이라크에 대한 침략을 중지하라]는 구호 아래에 침략이 중지되어서 독재정권이 유지되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독재정권 ... .. . 비민주적인 국가 ... .. .

 

미국과 유럽과 한국 등의 선진국(한국을 선진국이라고 해야될지는 모르겠지만)들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아랍이나 아프리카, 남미 등의 국가는 인권이 유린되고 비민주적이고 독재국이라는 환상을 우리들은 어쩌면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상에 많은 국가들중에 소위 말하는 자유와 인권 등이 보장되는 나라가 있을까?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라크의 민주화를 침략의 깃발로 사용한 미국만큼 비민주적인 국가도 드물 것입니다. 인권유린과 인종에 대한 차별 등이 [자유의 국가]라는 허상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은 이제 비밀 아닌 비밀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랍권에서 가장 선진적인(?)-서구적인 정치형태를 갖춘 나라는 이라크였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그들의 특별한 동맹국들은 이라크의 비민주성을 말하기 전에 자신들의 비민주성에 대해서 고민해야만 할 것입니다.

 

친군부와 미국에 의해 자행된 야만적인 광주학살의 주모자들이 전직대통령으로 예우받는 대. 한. 민. 국.
박정희라는 독재자를 그리워하고 그와 같은 존재의 출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 한. 민. 국.
외국인노동자의 차별과 착취에 대해서 우리도 그랬는데 뭐로 당연시 되는 대. 한. 민. 국.
가정내 폭력은 가족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등의 가정폭력이 폭력이 아닌 대. 한. 민. 국.
국가보안법이라는 구시대적인 악법으로 학술활동조차 구속시키는 대. 한. 민. 국.
아무리 많은 뇌물과 비리를 저질러도 정치적으로 해결되는 대. 한. 민. 국.
생계형 자살과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살기 힘든 대. 한. 민.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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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한. 민. 국. 당신들이나 똑바로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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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라는 이름의 비상식


 

 

1537-41 ; 1450 x 1300 cm ; Sistine Chapel of the Vatican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의 [The Last Judgment]입니다.

 

몇년 전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서도 종말론이 유행했고, 지금도 믿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기가 바뀌기 전인 1999년에는 프랑스의 예언계의 슈퍼스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의 공포에 숨 죽였던 것이 바로 어제였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최후의 심판]이나 [종말]이란 것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달에 인간이 갈 경우에 세계는 종말한다고 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갔을 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1999년이 아닌 999년에도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행해진다고 해서 사회적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시작한 것은 60세때부터라고 합니다. 완성했을 때에는 66세였다고 하니 그의 정력과 열정에 감탄할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4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미켈란젤로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실존인물들이 모델로서 이용되었듯이, 아마도 각각의 모델들이 미켈란젤로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는 전부 다 나체로 그려졌지만, 후에 비속한 표현이 금지되어서 미켈란젤로의 제자에 의해서 성기 부근이 덧그려졌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도 그려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우측에 있는 노인- 쩝 ... 이름난 성자인데 ... 이름을 까먹었습니다. -이 형벌로서 자신이 겉가죽이 벗겨졌습니다. 노인이 잡고 있는 겉가죽을 자세히 보면, 노인의 얼굴 형태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겉가죽이 미켈란젤로 자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자부시이 무지 강했던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이런 모습으로 그린 것은 자신의 위선과 나약함을 겸허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겸허함과 성실함이 생각나는 그림입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상식(常識) :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및 사려분별.

 

상식(常識) : 상식이란 깊은 고찰을 하지 않고서도 극히 자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식도 과거의 철학자들의 독창적인 사색과 고찰 결과 얻어진 것이 허다하다. 철학은 누구나 다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전복하고 처음부터 다시 고찰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얻어진 결과가 다시 상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어떤 기인(奇人)의 비상식적인 말이 오늘의 상식이 될 수 있고 과거의 상식이 오늘날에 와서는 진부하고 괴이한 비상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출처 : naver)

 

[상식]이라고하면 일반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보편성이 결여된 [상식]도 생활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식적인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상식]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나라에서는 [비상식]이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상식이라는 것도 문화적 종교적 환경적 등의 요소에 의해 통용되는 사회도 있지만, 그것이 비난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에게는 [상식]인 것이, 다른 사회(집단)의 눈에는 [비상식]으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회(집단)의 [상식]은 거기에 소속된 구성원들에게는 진실이고 올바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회(집단)의 눈으로 보고 그 [비상식]을 거론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그는 그 사회(집단)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비상식적인 그 사회(집단)만의 [상식]이 보편 타당한 것으로 그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전까지 대선자금을 둘러싼 문제들이 이슈가 된적이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후보의 당선이 유력했기 때문에, 아마도 천문학적인 기업 비자금이 선거자금으로 제공되었을 것입니다. 하긴 선거자금 문제에 있어서 때묻지 않은 정치인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국제경쟁력과 파업 등으로 인해 죽는 소리만 하던 대기업들이 100억이라는 로또복권의 대박의 금액을 꺼리낌없이 사용해왔습니다. 일반 국민들의 눈에는 정치권과 경제인들의 [비상식]에 놀라움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정치권과 경제권이라는 집단의 [상식]에 맞는 짓을 한 것에 불과하고, 일반 국민들의 시각에 불만을 느낄 것입니다.

 

정치권이 자신들의 [상식]이 사실은 [비상식]인 것을 깨닫지 않는 한, 어떠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도를 보완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더라도, 개혁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은 혁명적인 제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정치자금법을 개혁한다고 해도, 무수한 탁상공론 속에서 지금까지의 제도 속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논의가 도출되면서, 오히려 개악될 것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상식]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소위 말하는 고문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몸 어딘가가 불편하게 되거나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과는 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각종 고문으로 병들게 하거나 죽이거나 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의 문제일까요? 사실 이것은 그들의 인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상식]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인도 그들에게는 [상식]적인 행동이었기에, 일말의 죄의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각종 고문으로 인간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비상식]이었습니다.

 

[상식]의 무서운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상식]이란 것이 만들어지면, 그 구성원들은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비상식]적인 행위도 아무런 죄의식없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상식]과 [비상식]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사회(집단)의 눈으로 보는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부안과 NEIS, 노동문제와 파병을 [상식]으로 믿는 참여라는 이름의 정부, 자신들의 기득권옹호를 위해서 한나라당과 탄핵을 시도했던 민주당의 [상식], 그리고 [몰상식]이 그들의 [상식]인 한나라당 ... 여전히 이 사회의 [상식]은 그들만의 [상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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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꿈 권하는 사회 ...


 

 

1851 ; Oil on canvas, 55.5 x 46 cm (21 7/8 x 18 1/8 in)

 

 

한국의 이발사들이 가장 좋아했던 화가인 Jean F. Millet(1814~1875)의 [The Walk to Work (Le Depart pour le Travail)]입니다.

 

밀레는 Gustave Courbet를 이어받아서, 도미에와 함께 사실주의 화풍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파리에 진출했지만, 경제적 곤란때문에 누드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밀레는 나부밖에 그리지 못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바르비종으로 이주하기 전에도 농민들의 삶을 그린 그림들이 있지만, 바르비종으로 옮긴 후, 그의 그림은 현실-그것도 힘든 노동과 빈곤에 허득이던 농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밀레의 그림에는 어떤 영웅도 역사적인 사건도 없지만, 이름 없는 농민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에게 노동의 아름다움을 전해 줍니다.

 

그림은 아침에 일하러 걸어 가고 있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르비종의 거친 대지밖에 의지할 곳이 없지만, 농부의 굵은 다리와 힘찬 걸음에서 변혁의 주역으로서의 민중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 조잡한 의복과 신발, 그리고 왠지 보는 사람들을 우수에 젖게 만드는 분위기 연출은 당시-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만 - 농민들의 힘든 삶을 느끼게 해줍니다.

 

밀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노동이 보여주는 모습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신문기사를 보면, OO열풍, OO붐 등의 제목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전국민의 한방부르스 로또열풍, 미국의 서부시대를 능가하는 폐광에서 금 찾는 정선카지노, 재건축아파트붐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대상과 이름만이 바뀌었을 뿐 일확천금의 신화를 쫓는 한국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확천금 ...... 그 사전적인 의미는 힘들이지 않고 단번에 많은 재물을 모으는 것입니다. 이 흔들림없는 신화를 보고 있으면,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이라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농촌에서 성실하게 소작을 하는 영식이, 친구의 꾐에 빠져서 금을 찾기 위해서 소중한 콩밭을 파헤칩니다. 이 모습을 본 동네주민들이 만류해 보지만, 아내의 부추김도 있어서 더욱 더 금찾기에 열광합니다. 생활은 한층 더 궁핍해지고, 마침내 체력까지 고갈되어 인간 폐인이 됩니다. 이 모습을 본 친구는 책임추궁이 두려워서, 황토를 금맥이라고 속이고 그날밤에 도망칠 궁리를 합니다.

 

소설에서는 친구가 충동질하고 아내가 부추기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매스매디어가 국민들을 충동질하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부추기고 있습니다.

 

CF에서 배용준이 나는 [부자아빠]를 꿈꾼다는 말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어서, [부자아빠]되는 법이라던지 [일확천금]에 성공하는 법 등의 글들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부자의 기준을 100억정도라고 (51%의) 어린이들이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100억 ...... 정말 꿈같은 금액입니다. 솔직히 소시민인 저같은 사람으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 액수입니다.

 

이 꿈같은 100억이라는 돈이, [일확천금]의 신화에서는 하늘 나라가 아닌 현실이 됩니다. 지방세수의 확대와 낙후된 지역발전 등의 슬로건 아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확천금]신화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하룻밤 꿈 잘 꾸어서 로또 당첨되면 100억+의 금액이 자신의 것이 된답니다. 생업을 포기하고 정선의 폐광의 슬롯머신을 도구 삼아 금을 찾는 사람들, 벼락맞기보다도 더 힘든 로또에 열중하는 소시민들, 은행 대출 등 모을 수 있는 돈을 전부 모아서 복부인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우리네 어머니와 아내들. 알게 모르게 [일확천금]교의 신도가 되어 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노동은 신성한 것도, 땀 흘려서 일하는 것이 바보같고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 손에 로또와 칩을], 그리고 돼지꿈을 쫓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 그만큼 희망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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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일까?


 

 

1819 ; Oil on canvas, 491 x 716 cm ; Musee du Louvre, Paris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Theodore Gericault(1791~1824)의 [The Raft of Medusa]입니다.

 

그는 장르화에 뛰어났고, 동물-특히, 말을 좋아해서 속도감 있는 동작들을 잘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린 유화는 얼마 안되지만, 소묘가 그의 주종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의 소묘 그림은 http://www.ibiblio.org/wm/paint/auth/gericault/lithograph/ 에 가셔서 살펴 보십시요).

 

이 그림은 실제로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던 사건을 그린 것입니다.

 

1816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에 400여명의 군인과 이주민들을 실고 가던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고급장교와 선장 등의 선원들인 250여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지만, 일반 선원들과 이주민, 졸병들인 150여명은 뗏목 등을 만들어서 표류하게 되었다. 14일간의 표류 끝에 구조된 것은 단 15명뿐으로,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당시의 여론은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주류였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생존자를 일일이 찾아가서 경험 등을 듣거나 시체안치소에서 시체들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메두사호에 관한 그림을 그릴 때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그림에서 보듯이 14일간의 표류 끝에 극적으로 배를 발견했을 때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그림 자체의 느낌은 암울하지만 지나가는 배를 발견해서 도움을 요청하면서 환호하는 장면입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여있고, 파도는 미친듯이 날뛰고, 돛은 강풍에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있는 장면을 통해, 그들이 14일간 경험했던 일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뗏목 앞쪽의 사람들은 배를 발견해서 옷을 흔들거나 일어나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머리에 터빈을 한 남자는 다친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잡고 있습니다.

 

대각선을 이루는 그림의 구도와 명암법 등을 통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림에 극적인 요소까지 가미시켰지만, 출품 당시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그것에 실망한 Gericault는 영국으로 건너 갔고, 거기에서 큰 평가를 받게 됩니다.

 

개인의 영웅적인 활동 등을 표현함으로서 낭만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멋대로 지껄임

 

흔히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 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습니다. 이 말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인생,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여러 가지 뉴스나 주위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면, 위의 이야기는 배부른 자의 푸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넘쳐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혹은 무관심한 시선을 자주 느낍니다.

 

청년실업과 명퇴, 카드빚 등 먹고 살기 위한 기본적인 생활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도 가지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생활의 문제를 떠나서도, 먹거리는 사소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환경 오염과 유전자 식품, 다이옥신 등 인간의 몸에 유해한 식품들이 넘쳐나는 도시생활에서 먹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습니다.

 

장수와 먹거리에 관한 프로그램은 이제 방송국에서는 기본적인 것이 되었고, 웰빙식품이니 요가니 하면서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은 일상을 넘어선 느낌도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건강과 장수를 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생활의 수준을 떠나서 공통된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가 하나의 계층(혹은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배고픔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에 대한 논쟁은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보는 느낌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아가 일상이 된 사람에게 [왜 사는가?]라는 물음은 배 부른 소크라테스들의 비생산적인 말장난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개혁이니 ceo형 시장이니 말들이 많지만, 그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생활고에 따른 생계형 자살과 범죄 등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과 동반(?)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을 한 사람에게 자식이나 부인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는 물음을 던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그 가장들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웰빙열풍에 따라서 츄리닝 하나도 따지는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들]과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중 어디에 속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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