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빡빡한 이번 학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술을 줄여야 한다고 되뇌였지만,

또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고 11시까지 마셔대버렸다.

전공수업의 압박으로 집에 와서 꾸벅꾸벅 자다가

어느 순간 일어나 이따위 감상문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참 어이 없기도 하다.

아침에 영어 퀴즈도 있는데, 1학기의 모범생은 어디로 간 거야 -_- ㅋㅋㅋㅋㅋ 

어쨌든 현재는 다시 잘수 있음을 행복해 하며.....

 

 

노동의 시간, 인간의 시간


어느 의류공장, 5개의 움직이는 라인과 1개의 쉬는 라인이 있고, 각각의 라인 앞에는 완성된 옷의 개수가 표시되고 있었다. 작업 특성 상 미싱과 시다 일이라는 것은 나사를 돌리는 식의 극도의 단순함으로 쪼개지지는 않았고, 컨베이어 벨트 역시 그런 식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누군가의 앞에는 5벌 이상의 옷들이 쌓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느린 작업에 대한 책망을 듣기도 하는 일이었다. 과연 라인은 인간의 시간을 최대한 가속시키고 있었을까.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수업시간에 그 영화를 본 것이 그 영화를 적어도 두 번째 보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나는 장면이 오직 그가 공장에서 일하는 장면, 밥먹는 기계에 농락당하는 장면, 그리고 그 앞뒤 정도였던 것은 그만큼 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당시로서는 상당히 어렸던 내게 충격적인 영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아담스미스가 실제로 초기 산업사회에서 보았던 것이 분업으로 인한 장밋빛 미래였는지,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착취’함으로써 얻는 전체적인 잉여가치의 증가였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충격은 분업이 가져오는 비인간성,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첫째는 극중 주인공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한 가지 동작만을 기계적이고, 단순반복적으로 하도록 하였던 일의 단순성이었고, 또 하나는 더 이상 그의 시간을 그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몇 년 후, 바로 그 자본주의적이고 비인간적인 분업화된 단순노동을 하게 되었다. 옷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숙련도를 요구할 것이라고 느끼기 쉽겠지만, 나는 라인에 투입된 첫날부터 옷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 전에 한 번도 미싱 비슷한 기계도 다뤄본 적이 없음은 물론이다. 라인 어딘가, 내 앞의 몇 번째 전인가에서 찍어오는 점들 위에 정확히 노루발을 얹고 발만 드르륵 움직이면 되는 몇 번의 동작은 정확하게 한 벌의 옷을 만들어내 주었다. 나중에는 졸면서도 찍어낼 정도로.

작업장에서는 끊임없이 시간에 대한 보이지 않는 투쟁이 존재한다. 각 라인마다 붙어있는 완성된 제품의 개수는 라인 별 경쟁을 부추기는 듯 쉴새없이 올라가고, 그도 모자라 개인마다 지급된 수첩에는 자신이 그날 한 일들을 꼬박꼬박 기록하여 매일 체크당하였다. 한달마다 전체나 라인별 우수자에게 약간의 보상이 주어졌고, 그 약간의 보상은 누군가에게는 점심시간의 일부를 포기할 만큼의 인센티브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회사측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관철되기만 하였을까. 노동자들은 절대로 오버페이스하지 않는다. 의도된 태업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만의 시간을 유지하고, 사측의 자기시간 통제를 최대한 눈속임한다.

영화를 보면, 채플린이 새로 들어간 공장에서 기계 속에 들어간 숙련공을 꺼내 주려하는 장면이 있다. 한참을 이것저것을 시도해보다가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숙련공은 여전히 기계속에 있지만, 채플린은 점심을 먹는다. 숙련공에게도 우스꽝스럽게 점심을 먹여주며 말이다. 이것이 어찌보면 테일러주의, 포드주의의 결정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동자가 Saint Monday를 빼앗기고 시간을 24시간으로 나눠 모든 시간을 똑같이 나눠서 똑같은 분량의 일을 하도록 요구받던 순간부터 인간의 자연스러운 노동 싸이클이라는 것은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졌는가. 여전히 우리는 월요병을 가지고 있다.

노동력을 판 순간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싼 투쟁은 채플린의 시대를 지나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9/06 02:16 2005/09/06 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