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20대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담은 영화, 모터싸이클다이어리...

지금까지 ‘체 게바라’라는 이름이 내게 어떤 의미였나. 쿠바혁명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혁명 직후 은행 총재가 되었다는 정도와 5년 전 누군가가 준 체 게바라 평전이 읽지도 않은 채 내 책장 제일 꼭대기에 꽂혀있다는 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이 영화가 체 게바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혁명가의 상징에서 이제는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전 세계 어디서나 그의 얼굴을 티셔츠에서,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의 유의미성이 사라지거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사전 정보 없이 영화 자체만을 본다면, 이 영화는 두 20대 두 남자의 로드무비다. 앞날에 대한 막막함, 혹은 결정되어 지는 것에 대한 거부 등이 그들을 떠나게 만든 것일까. 내가 보냈던 20대 중반의 방황이 순간 오버랩 되었던 것은 나에 대한 부정도, 그들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그들의 여행은 흔히들 하는, 도시에 발자국 찍기 식의 여행이 아니다. 폐기처리 일보직전의 오토바이 하나에 달랑 몸을 싣고 둘은 대륙 종단에 나서는 것이다. 물론 걸어가고 싶었겠지만, 대한민국국토종단이 아니라 대륙종단인 이상 오토바이라는 독특한 운송기구를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천천히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만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자연, 지형, 문명, 그리고 사람들... 길 위의 사람들...



 

여행하는 이들은 모든 길 위의 이들이 여행하는 이들이거나 정착한 이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 길 위에는 수많은 정착하지 못한, 집을 빼앗기고 땅을 빼앗긴 이들이 있었다. 먹을 것은 풍족했던 옛날을 회상하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다. 가진 거라곤 고장 난 오토바이와 여자친구가 준 15달러밖에 없는 두 청년은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

일단 그들은 목적했던 여행의 마지막, 페루의 나환자촌을 방문하고 그 곳에서 나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과 부대끼고,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맺고, 둘은 그 여행의 끝에서 각자의 길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둘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영화가 여기서 끝을 맺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굳이 체 게바라를 소재로 하면서 체 게바라의 일대기나 혁명기의 영웅적 모습이 아닌 20대 중반의 맹목적인 여행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단지 체가 왜 혁명에 뛰어들게 되었는지가 아니라, 나를 그 상황에 투영시키거나 나의 20대를 생각게 하면서 나의 삶의 방향을, 목적을,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체는 분명 의사로서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같은 여행을 한다 해도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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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고 책장 꼭대기 체 게바라 평전을 읽기로 하였다. 바로 영화가 끝나는 부분까지 책으로 다시 체를 만났다. 구체적인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흐름이었으나 한 가지 영화만으로 알 수 없었던 중요한 사실은, 체의 조상이 라틴아메리카인이 아니라는 것.. 난 라틴아메리카 혁명이 민족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혁명은 아르헨티나인, 칠레인, 쿠바인 등의 민족성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가지는 공통분모에 대한 이해 없이 판단하기 힘들 것이라는 막연한 가정을 가지고 다시 체의 당시 고민과 여행을 따라가 보았다. 체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영향 등으로 반체제운동에 깊은 고민이 있었으나, 여행을 떠나기 전 그의 미래는 민중과 함께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은 그를 의사가 아닌 혁명가로 변모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되는 듯하다. 처음 그들이 계획했던 여행은 자신의 조상들의 문명이 있는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핏줄의 근원이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땅,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게 되는 것. 유럽의 자손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인으로서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백인들에 의한 지배가 있기 전의 문명, 마추픽추에 올라 자신의 정체성을 재부여하고자 했던 것이 이 여행의 시작이다. 백인으로서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인으로서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체험하고 그가 결국에 이르른 결론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까.

최근에 호치민 평전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일생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꽤 흥미로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먼지쌓인 빨간 표지의 이 책을 이제는 읽을 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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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1 17:38 2005/04/01 17:38
영상에서, 그리고 수업시간에 얘기되었던 문화상대주의, 모든 문화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누구의 시선인가. 당연히 연구자의 시선일 수 밖에 없겠지요. 박제화되어버린 과거의 유물들을 우리는 세계 곳곳의 박물관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원주민 물품 전시관 등에서 봅니다. 자본주의의 파괴력, 전파력의 영향을 무시하고 문화상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폭력적 시선이 되지 않을까. 자본주의 문명에 의한 1차적인 문화 파괴와 그리고, 이전의 것까지 보존하여 이제는 파괴된 그것을 그리워하며 가슴아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누군가가 억지로 가서 파괴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파괴되고 스스로 서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강의하시면서 베트남이나 중국에 가서 우리나라의 70,80년대 쯤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의 오류를 말씀하셨는데요. 사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서구 중심적 근대화의 경로를 쫒아가고 있고, 물론 그것이 동일하게 변화함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 중국의 어느 도시는 10년 후에는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와 거의 흡사한 모습을 띨 것입니다. 마치 10년전의 일본이 우리나라의 현재와 흡사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본주의가 전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 전세계 국가의 선택지는 제가 보기엔 거의 동일합니다.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나라들은 전쟁의 대상이 되고 있구요.


지금은 과거 19-20세기의 방식을 가지고, 그러한 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이들의 한편에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이들 또한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세계는 갈 때까지 갔으니 과거로, 아니 지속가능한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무분별한 진보, 서구적 기준의 단선적 발전이 아닌 각 사회가 그 특징에 맞는 지속가능한 사회로 가자는 그런 의지를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또한 역설에 부딪히는 것은 그러한 과거의 오류를 가장 먼저 뛰어넘고 있는 국가들 역시 유럽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많은 의문들이 있긴하나, 영상에서 얘기한 현대의 문화인류학의 관점을 잘 곱씹어 보려고 합니다. 모든 문화는 그 자체로 특수하고 가치가 있다. 저는 거꾸로 19-20세기의 흐름이 아닌 역의 흐름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자신의 문화를 잣대로 다른 문화를 판단하고 바꾸려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를 잣대로 우리의 문화를 판단하고, 오류를 찾아야한다고 봅니다. 이미 파괴될대로 된, 이미 한국적이라는 이름아래 포장된 어떤 것들을 제외한 한국적인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고, 생산해 낼 것인가. 그 기준은 여전히 새로워진 서구의 모델인가. 아니면 우리의 과거의 모델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상상 속의 유토피아인가.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에서 처럼 우리는 라다크라는 "미개사회"로부터 이제는 배워야할 때가 아닐까요. 또한 고민되는 지점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탈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면, 탈춤은 분명 과거의 것입니다. 지금은 탈춤, 탈놀이를 연행할 만한 사회적 구조가 아닙니다. 다만 과거의 문화유산으로서 현재에 전승되고 보존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일제하에서의 탈놀이를 억제하는 정책이 있었고, 그것이 지역에서 그것이 사라지는데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할지라도 현재 그것을 복원시키는 것은 때에 따라 지역 문화축제때 연행하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체화한 이래 쓸모없어진 과거의 "문화"들을 한국적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되살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향수 속에서 역시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서 움직이곤 합니다. 대략 요약하자면, 과연 현재에 상대적으로 바라보아야할 타자가 있는가. 모두 닮은 꼴이 아닌가. "미개사회"와 "문명사회" 등 다양한 가치를 그대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명에 대한 성찰과 함께 역방향의 흐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보존해야할 "문화"는 이미 박제화된 과거이거나 변화하려 하는데 부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상을 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일단 투르카나족과 그들을 연구하러 갔던 이들이 서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촬영하는 장면이었는데, 바로 그 장면이 현재의 문화인류학이 지향하는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what is important?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그리고 또한 발달된, 서구화된 문명사회에 있는 나에게 묻고싶은것, So, Are you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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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5 19:08 2005/03/25 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