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본인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비판하시오.


아침에 눈을 뜨면 수돗물에 비누, 샴푸 등을 사용하여 세수를 하고, 새벽마다 배달되는 우유 한 컵을 마시고, 옷장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옷을 꺼내 입고,...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내 삶의 어느 한 순간에도 소비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 그야말로 현대의 인간은 도구의 동물도, 생각하는 동물도 아닌, 소비의 동물,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이다.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수순을 밟아왔다면 벌써 취직하고, 결혼까지 했을지도 모를 20대 후반에, 누가 무슨 일 하느냐고 물어보면 학생이라고 몇 가지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현 사회에서 학생이라는 위치는 그야말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와 굶어죽을 자유, 어떤 복지시스템에 혜택받지 않을 자유까지 누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아주 운이 좋게도 한달에 30만원씩을 벌어 생활을 하는데, 돈벌이를 늘려야할 것인가, 소비를 줄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하는 일을 이분법으로 쪼개어보면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임금을 받는 노동과 받지 않는 일. 이중 임금을 받지 않는 일은 보통 가치 없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혹은 자원봉사처럼 순수하고 고귀한 행위로 추앙되기도 한다. 그것은 주로 그 일의 목적이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남을 위한 것인가에서 나뉘는 것이겠지만, 돈 받지 아니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같다. 나와 함께 사는 직장인 친구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설거지, 청소, 빨래 등을 하고, 몇 시간 후에 그 행위의 결과가 금새 마치 하지 않은 듯 되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한탄하고는 한다. 하루 세끼 밥 먹기 위해서는 하루 세끼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매일 깨끗한 옷을 입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빨래라는 일을 반복해서 해야 하지만, 보통 가사일을 도맡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귀찮은 남의 일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 친구의 고민은 결국 두 가지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많은 돈을 벌어 가사노동을 대체해줄 만한 사람 혹은 기계를 들이거나 아니면 가사일을 자신의 일로 인식하거나... 내 경우는 후자를 택한 셈이다. 하루 두세 시간의 가사일이 돈을 벌어다주지 않는다는 셈을 하기 이전에 그 일이 내 삶을 영위하는데에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를 생각하고픈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로 나가 노숙을 하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돈 벌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살겠다는 것이 몽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최종 생산물에 대한 소비든, 중간과정에서의 소비든,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의 것을 소비하고 있고, 그에 대한 교환을 가능케 하는 화폐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 곧 사회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하기에 현 사회에서 우리는 하루 8시간 이상을 노동할 것을 강요받고, 8시간을 생리현상에 쓴다고 치면, 8시간에 해야하는 여타의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휴식과 놀이를 방해하는 하기 싫은 일이 되는 불가피한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왜 민주노총에서 가사노동할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를 정부와 기업에 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나은 점심식사를 제공받거나 좀더 높은 식대를 제공받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아침, 점심, 저녁을 스스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해 보는 것을 어떨까.

20세기 초반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자본주의생산방식은 임노동과 자본의 대립과, 그로 인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인한 필연성의 논리로 나아가는 수순을 밟는다. 그 안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것은 현재의 생산력 그 자체를, 체제의 변혁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생산력은 지극히 자본주의적 생산력이며 그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며 소비를 부추기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는 장시간노동, 평생노동으로 인간을 몰아넣는다. 실업은 비정상 상태가 되며, 실업자가 돈 벌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위한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위한 노동은 가치 없는 것이 되고, 하루 종일 일한 결과물을 그날 저녁 술값으로 소비하기도 하는 노동자들은 현재 수준의 소비, 혹은 더 많은 소비와 더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 임금인상이라는 가능한 수준에서의 분배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생산방식은 적어도 내게는 참여하지 않으면 사회적 무존재이자 무가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어떤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상품을 매개로 관계맺고 있으나 이 질문 외의 다른 관계맺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How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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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0 00:15 2005/04/20 00:15
 

모소족의 어머니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놀고먹지 않으며 위엄을 부려 다른 사람을 겁주지 않는다. 그 어머니를 그려 딸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모소족 사회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


달은 겨우 닷새만 환하지만 어머니는 딸에게 한평생 그렇게 환히 밝다.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모든 일을 주관하고 집 밖에서는 심촌이 일을 가르쳐준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없으면 두 눈을 잃은 것과 같다.

어머니를 집에 두고는 섭섭해서 다른 집에 가서 살지 못한다.

내가 찾은 ‘아하’는 어머니의 마음의 뜻을 알 것이다.

어머니가 길러주지 않았으면 인간된 삶을 찾을 수 없었다.

아득하고 힘든 인생의 길에 어머니가 생각나면 어머니와 같이 지내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어머니가 더 이상 세상에 없어도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는 은혜는 내 마음 안에 있다.

아름다운 루그 호, 내 어머니와 너무 닮았다.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머니,

재물은 사람이 만들지만 어머니는 사람이 만들 수 없다.

산과 들과 짐승은 풀을 먹고사는데 우리 어머니는 고생만 먹고산다.

- 이경자, 모계사회를 찾다 중에서...




 

영상을 보다 재미있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는지, 아니면 평등하고 권력 분산적인 사회에 대한 상상력 부족인지는 알수 없지만, 영상에서는 마치 그 사회가 인류의 오래된 옛 원형이자 모권 사회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루그호 모소족은 미개종족도 아니요. 어머니에 강력한 가장권을 주고 있지도 않다.

다만 모계로 혈통을 잇고 있고, 우리와는 다른 ‘주혼’이라는 방식의 혼인풍습을 가지고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모거제 사회이다. 굳이 모계제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종족, 민족들이 자신들 고유의 풍습을 잃어가고 가부장적 질서를 확고히하고 있는 요즈음에도 루그호의 모소족이 과거로부터 이어진 모계제를, 모택동 시절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하고있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무엇일까. 난 그것이 물질문명으로부터의 고립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생계는 주로 호수에서의 고기잡이와 밭농사, 그리고 남자들이 주로하는 목축업이다. 목축으로 상품경제에 어느정도 편입되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 임금이 생계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금이 생계의 원천이 되게되면 가계는 소비에 의해 꾸려지게 되고, 철저히 돈을 벌수 있는 일과 돈이 되지 않는 ‘잡다한 일’을 구별하게 된다. 모소족에게도 분명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의 영역이 있다. ‘아마’인 어머니는 집안의 최고 어른이지만, 그는 놀고먹는 이가 아니다. 위의 노래에서도 보이듯이 우리사회의 어머니와 다름없이 집안의 일을 주관하고 고생만 하는 어머니이다. 우리사회의 어머니가 하는 일은 돈이 되지 않는, 상품경제 사회에서의 교환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일인 반면, 모소족의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와 인간된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여전히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을 경험하는 우리의 어머니, 그리고 딸들에게 이 사회는 유토피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과 동일한 문화를 가졌던 다른 지역의 모소인들의 경우 남성의 ‘해방’을 경험하거나, 기본적 뼈대는 동일하지만 여성은 중노동을 하고, 남성에게는 새기르고 분재하는 호사를 부리는 단지 모계사회의 흔적만 남고 왜곡된 구조를 갖기도 한다. 그것은 원래의 고유문화가 물질문명과 보다 가까운 지역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사회에서의 여성해방, 그것은 단지 어떠한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그것을 이상화하여 따라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미 현재의 사회는 남녀의 평등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만 근대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조와 의식이 여전히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남성과 여성을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균열지점이 보이지 않는가. 호주제가 폐지된 것은 제도적변화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미 평등한 가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고, 남성의 우월성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초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변화의 가능성은 우리 안에 이미 있다. 모소족의 유의미성은 유토피아로서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현 구조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화가능한 것임을, 인류의 보편적 사회구조가 아니라 다만 근대적 가부장제 질서의 한 모습일 뿐임을 보여준다는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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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3 01:35 2005/04/13 0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