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9/06/0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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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통찰이 예리한 책이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신자유주의 역사에 대한 기술은 부럽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분석해내고 도표로 멋지게 보여줄 수 있는 논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실이와 함께 완전 공감하고 반성한 것은 소위 '자유주의적 성향'에 대한 것이었다. 문화를 소비함으로서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긴다고 생각했던 나의 일상이 신자유주의를 더 강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사실 에콜로지카를 보면서도 그 생각을 했는데 데이비드 하비가 아주 직접적으로 쐐기를 박은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지 갈등이 되었다.

 

어쨌든 이 책은 2005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고 이는 깊이 있는 분석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기본적 습성을 '탈취'로 보고 이를 계급권력에 기반한 정치적 문제로 해석하면서 지리적 불균형에 관심을 기울인 그의 통찰이 훌륭했다. 신자유주의에 따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동의의 구축에 대한 분석 엯시 흥미로웠다. 한노보연에서 다양한 사업장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썼던 '자발적 동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아 반갑기도 했다. 그리고 제도적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동반되는 한편에서 신보수주의적 지배가 다시 창궐하게 된다는 분석은 우리나라의 상황을 정확하게 비추고 있는 듯 해서 인상에 많이 남았다.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다만 전반기의 훌륭한 번역과는 다르게 후반기의 번역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4장부터 갑자기 읽히지가 않더라는... ㅠㅠ)

 

- 우리는 신자유주의화를 국제적 자본주의의 재조직화를 위한 이론적 설계를 실현시키려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 또는 자본 축적의 조건들을 재건하고 경제 엘리트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로 해석할 수 있다.

 

- 첫 번째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소유와 권리의 특권들(전통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을 CEO들에게 주식 선택권(즉, 소유권)을 제공함으로써 융합시키려는 것이다. 두번째 경향은 한편으로 배당과 이자를 얻는 화폐자본과 다른 한편으로 이윤을 얻고자 하는 생산, 제조 자본과 상업 자본간 역사적 차이가 크게 줄어드는 것이다.

 

- 폴라니가 말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소득, 여가, 그리고 안전이 더 이상 향상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 권리와 자유를 수여하며, 나머지 우리들에게는 소량의 자유만을 남겨뒀다. 그렇다면 '나머지 우리들'은 어째서 쉽게 이러한 상황을 따르고 있는가?

 

- 사회정의의 추구는 사회적 연대와 더불어, 사회적 평등이나 환경정의를 위한 좀더 일반적인 투쟁과정에서 개인적 욕구, 필요, 욕망을 유예할 수 있는 자발성을 전제로 삼는다

 

- 상식(commom sense)은 흔히 지역적, 국가적 전통에 뿌리를 둔 문화적 사회화의 오랜 실천을 통해 구축된다. 이는 당대 이슈에 대한 비판적 고려에서 구축될 수 있는 '양식(good sense)"과는 다르다.

 

- 좌파 운동은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정의의 추구 사이에 내재된 긴장을 극복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인식하거나 대면하지도 못했다. 

 

- 문제가 되는 큰 '채찍'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집단행동을 와해하기 위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에게 제공될 수 있는 수많은 '당근'도 있었기 때문이다. 노조의 엄격한 규율과 관료주의적 구조는 노조를 이러한 공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중략) 노동시장에서 더 큰 행동의 자유와 지율을 선사하겠다는 것은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덕목으로 여겨졌고, 이는 여기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의 '상식'에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통합시키는데 기여했다.

 

- 민주주의는 사치스러우며, 단지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강력한 중간계급의 등장과 결합된 상대적 풍요의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전문가와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적이고 의회에 의한 의사결정보다도 행정적 지시 체계나 사법적 결정에 의한 정부를 강력히 선호한다.

 

- 신자유주의에 내재한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매력적이지만 소외를 낳는 '소유적(possessive)' 개인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의미있는 집단적 생활을 위한 소망간에 모순이 발생한다.

 

- 자유주의적 (확장하면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궁극적으로 권위주의에 의존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대중의 자유는 소수의 자유를 위해 제한될 것이다.

 

- 정부(governmet, 그 자신의 국가 권력)에서 거버넌스(governance, 국가와 시민사회의 주요 요소들의 광범위한 편제)로의 이행은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탁월했다. 

 

- 신자유주의 국가는 존립하기 위해 특정한 종류의 국민주의를 필요로 한다. 세계시장에서 경쟁적 행위자로 장동하게끔 강제하고 가능한 최선의 경영분위기를 조성함에 있어 신자유주의 국가는 성공적 효과를 가진 국민주의를 동원한다. (중략) 국민들간 스포츠 경쟁을 둘러싼 국민주의는 이의 조짐이다.

 

- 신자유주의의 모순들에 대한 신보수주의적 해법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 소유권의 신성한 속성을 강조하는 상위계급들은 그들의 특혜와 권력의 일정 부분을 내놓기보다는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잊지 ㅇ낳았다. 왜냐하면 만약 스스로의 위치를 적절하게 규정한다면 우리들 나머지는 대재난 속에서 매우 끔찍한 일을 겪겠지만, 그들은 - 훌륭한 파산 변호사처럼 - 그러한 붕괴로부터 이윤을 얻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소수는 붙잡혀서 월스트리트 창가의 도약대에서 떨어지겠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이들이 안고 있는 유일한 두려움은 재산 몰수 또는 혁명적 폭동으로 그들을 위협하는 정치운동이다.

 

- 신자유주의화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득되는데 그리도 성공적이었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지리적 불균등발전의 변동이 가속화되고, 어떤 영토들에서는 다른 영토들ㄹ의 손실을 전제로 (최소한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중략) 둘째, 이론이라기보다 실제 과정으로서 신자유주의화는 상위 계급들의 입장에서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 신자유주의화의 본질적이고 주된 업적은 부와 소득의 창출보다는 재분배에 있었다. 나는 다른 문헌에서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는 제목으로 이것이 달성한 주요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 감옥-산업 복합체는 미국 경제에서 번창하고 있는 부문이다. 탈취에 의한 축적을 더욱 강하게 반대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들에서, 신자유주의적 국가는 반대 운동에 대한 낮은 수준의 전쟁에 이를 정도의 적극적인 진압까지도 신속하게 이뤄낸다.

 

- 탈취에 의한 축적은 여성이 가족적 생산-판매 체계 내에서, 그리고 전통적 사회구조 내에서 가졌던 모든 권력을 전향적으로 저하시키며, 모든 것을 남성 지배적 상품 및 신용시장에 이전시킨다.

 

-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와 같은 소유적 개인주의는 피상적으로는 흥미롭지만 그 핵심은 비어 있는 의사 만족의 세계를 구축한다. 

 

- 이러한 (자유주의적) 권리들을 강화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생적 권리를 우선적 권리로 만들고, 사적 소유와 이윤율이라는 우선적 권리를 파생적 권리로 만드는 것은 정치, 경제적 관행에서 큰 유의성을 갖는 혁명을 동반한다. 또한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권리의 개념 - 예로 세계적 공유물, 또는 기본적 식량 안보에의 접근권 - 이 존재한다. "동등한 권리들 간에는 힘이 결정한다." 권리와, 심지어 자유 그 자체의 적합한 개념을 정립하려는 정치적 투쟁은 대안을 탐색하는 중심 무대로 옮겨진다.

 

- (마르크스는) "필요성과 일상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야 자유의 영역이 시작한다"라고 적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는 "실제 물질적 생산 영역 너머에 놓여 있다"라고 덧붙인다.

 

- 따라서 대안을 모색하려면 우리가 처한 시공간적 현실에 엄격하게 뿌리를 둬야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계급 권력과 시장 윤리에 의해 규정되는 준거의 틀 밖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심장부 안에 존재하는 주요한 위기의 가능성을 지지하고 있다.

 

#2.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다양한 책에서 인용이 되고 있기도 하고 워낙에 요즘 각광 받고 있다길래 읽어봤는데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 그렇게 깊은 인상을 주진 못했다. 다만 위의 책표지에 있는 것 같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생의 사람이 평생 4번씩이나 망명을 하면서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웠다. 특히 미국에서 입국허가가 안난 와이프를 위해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면서 강의를 했다는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이 택은 폴라니의 5편의 논문과 약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마르크스의 경철수고가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 노동자에게는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 고용주에게는 이윤이라는 미끼가 그 거대한 기구를 계속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 인간은 경제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다. 물질적 소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이 노리는 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선의, 사회적 지위, 사회적 자산 등이다. (중략) 인간이 생산에 들이는 수고는 사회적 인정을 얻으려는 노력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 묻어들어가 있는 것이다.

 

- 인간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어지게 되었으니, 하나는 굶주림과 이익에 가까운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명예와 권력에 가까운 것이다. 전자는 '물질적'인 것이며 후자는 '이상적'인 것이다. 전자는 '경제적'인 것이며 후자는 '비경제적'인 것이다. 전자는 '합리적'인 것이며 후자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이 두쌍의 말 묶음을 확실히 정리했으며, 인간 성격의 경제적 측면에 합리성이라는 신비로운 후광을 씌우기에 이르렀다.

 

- 이윤 동기를 '개인 및 공공의 행복에 전적으로 해로운 원리'...

 

- 자유 방임 철학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미 지나가버린 산업문명의 시대에 끝났다. 그것은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대신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생활의 충만함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효율성이 덜한 사회가 되더라도 말이다.

 

- 노동, 토지, 화폐가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이라는 허구가 사회의 조직 원리가 되었다.

 

 

- 정당에서는 폭넓은 유권자계층의 소망과 의지에 대한 '내적 조망'이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지도자는 성원들의 맥박을 느낄 수 있으며, 살아있는 민주적 정당의 성원들은 매순간 그 운동이 힘을 얻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조망의 투명성은 거의 전적으로 당의 민주적 성격에 달렬 있다. 이렇게 살아 있는 '내적 조망'은 당 조직의 틀 안에서, 당의 지도력을 통해 유권자들의 이익을 수호하고 모든 개별 성원의 힘과 결의와 희생을 동원해내는 데 기여한다.

 

 

#3. 직업으로서의 정치


 

베버는 참으로 냉정한 통찰력을 가진 달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도적 정치에 대한 그의 분석은 냉정하고도 정확했다. 이런 명강의를 하면서 10년 후쯤 다시 만나자던 그는 이 강의후 몇년안에 사망하고 말았다. 제도적, 의회적 정치가 아니라 일상의 정치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인 나에게 깊은 성찰을 주지는 못했지만 베버의 영민함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정치가의 자질에 대해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홍실이와 나는 균형감각보다 톨찰력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을 들어서 설명한 부분은 시사하는게 컸다. 이는 또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로 이어진다. 지금의 좌파들이나 정치권에게는 지나치게 책임윤리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통찰력은 정말 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간절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이 읽어봐야 할 듯. 다음에는 직업으로서의 학문도 읽어봐야겠다.

 

- 요약컨데,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한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참여하려는 노력 또는 권력배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노력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지속적 행정체제를 구축하려는 모든 지배조직은 두 가지 요건을 필요로 합니다. 첫째, 정당한 권력의 담지자임을 주장하는 지배자에게 복종하도록 인간의 행위를 조율하는 것. 둘째, 이러한 복종을 이용하여, 상황에 따라 불가피한 물리적 폭력행사에 필요한 물질적 재화를 확보하는 것.

 

- 정치를 <위해서>살고자 하는 자는 이에 더하여 경제활동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여, 그 스스로가 직접 지속적으로 자신의 노동력과 사고력을 전부 또는 상당부분 영리활동에 투여하지 않고도 자신의 수입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제활동에 묶여 있지 않은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생활자 입니다.

 

- 진정한 관료는(그리고 이 점은 독일의 과거 체제를 평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 본래적 사명에 따르면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단지 <행정>만 하게 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비당파적 자세로 행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익>이, 즉 기존 체제의 사활이 걸린 이해관계가 위협받지 않는 한, 이른바 <정치적> 행정관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입니다.

 

- 정치가에는 주로 아래 세 가지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열정이란 하나의 대의 및 이 대의를 명령하는 주체인 신, 또는 데몬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의미하며, 그런 이상 이 열정은 객관적 태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중략) 즉 열정만으로는 정치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대의>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열정이 우리를 정치가로 만둘 수 있으려면, 그것은 헌신과 동시에 바로 이 대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의힉을 일깨우는 열정이라야 하며, 더 나아가 이런 책임의식이 우리의 행동을 주도하도록 만드는 열정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균형감각이며, 이것은 정치가의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입니다. 균형감각이란 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즉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 그는(정치가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범우주적 인간 사랑과 자비의 위대한 대가들(이들이 나사렛에서 왔든, 아시시에서 왔든 또는 인도의 왕궁에서 왔든 상관없이)은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일한 적은 없습니다.

 

-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서로 절대적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으며 이 두 윤리가 함께 비로소 참다운 인간,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닪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며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입니다.그러나 지도자이면서 또한 (매우 소박한 의미에서) 영웅인 자만이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도 영웅도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희망의 좌절조차 견디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아직 가능한 것마저도 달성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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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3:09 2009/06/0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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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씨 2009/06/08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법"
    정독을 남겨두며.....
    이전에 누가 신자유주의라는 한계레 잡지를 보여 주었다.그때가 96년도 쯤 되것 같다.특별히 세계질서에 의한 국내 질서의 큰 회오리가 올줄은 몰랐다.그때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들었고 노동운동 역시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의 조직운동의 방향에 대한 문제인식이 제기되고 이에대한 실천의 모색으로 공부니 세미나니 하는 고민들을 많이 보았다.

    조직운동에서 보면 2가지 유형들을 볼수 있는데 하나는 정책자료집의 기획과 세미나 중심으로 회원조직을 운영하는 모습이 있고 또 하나는 정세와 투쟁의 국면에서 전술을 중심의 판짜기에 골몰하는 모습들도 있다.

    두가지다 필요 하겠지만 이제는 이러한 모습들의 관행이 역사의 흐름에서 극복 되어야 할 관행들이 있을 것이다.
    사회전반적인 계급정치의 역학을 형성하는 전선에 대하여 이 전선을 구성하는 정치적 복합적인 요소들이 있는 것이다.
    조직의 형태는 다양하며 사상적 경향성도 다양하다 할수있다.

    문제는 좌파들의 정치투쟁의 사고가 민주주의에 대한 전술적 사고가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민주주의란 부르조아의 자유주의 역사철학이 아니라 인본주의에 대한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회구성체와 정치체의 형성에서 계급적대보다는 그 계급적대를 소멸하기 위한 전제로써 민주주의 투쟁전술이 노동계급운동에 중요함 강조하고 싶다.

    파쇼적 권력이 노무현의 죽임에 대하여 그 죽임의 만행에 대하여 민주주의를 형성하면 박종태는 찬밥처럼 인식하는 이러한 태도가 결국 당면한 인간의 죽임에 대한 파쇼적 권력에 대하여 민주주의적 과제보다 계급적대의 과제가 앞서게 된다.이러한 인식이 변방으로의 박종태 비정규노동자들 정치적 위치화 시키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란 여의도만으로 결과화 되는 것이 아니라 여의도를 넘어서는 투쟁이 민주주의 투쟁이다.그리고 인간해방 계급소멸에 대한 정치와 투쟁은 민주주의 투쟁의 과정에서 전화 발전되는 것이다.

    우선 서울광장을 시민의 품으로 찾아오는 투쟁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조직과 선이없는 나로서는 여간 어려운 조건이 아니며 6월 서울을 버티는 것도 사실 어려운점 많다.

    6월 투쟁은 구심이 있어야 하고 노동자의 중심으로 시민사회의 대오가 형성되는 이물결이 이명박 퇴진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그런데 그 구심을 볼수없다.

    6월은 세미나가 아닌 스파르타의 달이라고 말하고 싶다.

    • 해미 2009/06/08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불씨/ 스파르타의 달이라는게 무슨 의미인가요? 이해가 잘 안가네요. 그리고 혹시 제가 아는 분인가요? 혼잣말같기도 하고, 반말이어서요.

  2. 불씨 2009/06/09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파르타는 개념적 말로 쓰기 보다는 "힘"으로 그냥 사용했고요
    스파르타크는 개념적인 말인것 같고요,스파르타는 패권적인 어휘이며 스파르타크는 교조적인 어휘일수도 있습니다.두가지를 상황에 따라서 좋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약자의 힘이 될수 있다고 봅니다.

    달은 월(月-일력)이지요
    전혀 모르지요,어투는 죄송하네요!
    "스파르타는 패권의 흐름도 있고요"
    스파르타는 축구로 보자면 룰을 지키면서도 룰을 넘어서는 태클의 의미도 있습니다.떡대와 난장이가 싸울때 태클은 상대적이지만 떡대를 주저 앉혀야 할때 난장이가 쓸수 있는데요 떡대가 먼저 룰을 넘어설때지요 그래서 주저 앉히는 근성입니다.

    귀족의 스파르타가 지배의 패권이라면 평민의 스파르타는 저항의 패권 입니다.
    6월은 스파르타 달 입니다.
    이후 기념식과 평화가 올 겁니다.

  3. 해미 2009/06/09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씨/ 아하... 그렇군요. 저는 사회과학전공자가 아니라서 용어들을 잘 이해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 6월이 더욱 힘차고 역동적이면 좋겠다고 저도 생각해요.

  4. 불씨 2009/06/09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거리로 나갈땐 시 한편을 읽고 나갈때가 있었지요
    그때는 뭘 몰랐지요 시의 의미도 역사적인 총체성도 모르고 그냥 문자의 힘찬 시에 마음을 의지하여 6월을 싸웠지요

    지금 6월거리로 나간다면 어떤 끈질긴 무기가 필요하겠습니까?
    예전과 다르겠지요
    그때는 시를 한편씩 외었다면 지금은 노래 한곡을 부르며 나가야겠다 생각하죠
    인간의 고뇌는 고통스럽지만 결과도 중요하죠 과정도 존엄할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지리산을 두고 민족민중사의 구성은 토벌대와 빨치산입니다.
    이것을 상품으로 극화하기도 하고 이데올로기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지리산을 두고 어떤 정치이념이 객관화 되는데 나는 이것보다 자신의 행위의 바탕 그 삶의 철학의 구성은 노력과 실천이겠지요 그래서 빨치산들도 여러 긍정과 부정이 있겠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존엄한 그 사회를 위해 자신의 마음에서 적을 형성하는 것과 싸우며 현실의 적대와 싸우는 빨치산의 전투는 생각해 볼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죠
    "레닌의 추억"을 작곡한 쇼스타코비치는 혁명의 레닌보다 혁명과정의 레닌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엄 그것을 찾고 그 맥락을 잊지않기 위해 그는 노래를 만든것 같습니다.
    정치권력은 혁명을 배반하는 것 같고요 혁명과정은 혁명에 토사구팽의 모습이지요
    그럼에도 레닌의 추억은 혁명입니다.
    "부용산"의 노래도 근래 알았는데 노래의 해설이 의미가 있더군요

    보는것 읽는것에서 理->感도 중요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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