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5/03/07 11:40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우리 엄마는 나름 신여성이셨다.

처녀 시절, 지금의 나처럼 하루 3-4편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영화광이었던 울 엄마는 독신으로 사시겠다는 꿈을 접고(그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많다고 생각되는 서른 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하셨고, 그로부터 일년 후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 이년 후 내 동생이 태어났고, 얼마후 울 엄마는 소위 '과부'가 되었다.

 

다섯살인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유년시절의 기억인 유리상자에 든 노란 드레스가 눈에 부시던 인형을 상계동 산동네 집으로 들고 오셨을 당시, 우리 엄마는 병원의 청소 아줌마였다.

 

나는 당시 울 엄마가 간호사인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안 것은 고등학교 때였던것 같다.

 

몸이 약했던 엄마는 힘든 병원 청소 아줌마 일을 견디지 못 하셨고,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부터 스웨터 등에 수를 놓는 가정부업으로 생계를 꾸리셨다. 지금 내 용돈도 안 되는 정도의 생활비로 어렵게 먹을거 안 먹고, 입을거 안 입어도 당신 딸이 원하는 건 왠만하면 들어주시려고 애쓰셨다. 당신 딸 기죽이는게 죽기보다 싫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비교적 조숙했던 나는 유치원을 가고 싶었고, 소년소녀 세계문학 전집을 갖고 싶었고, 미술 학원을 다니고 싶었고, 피아노 학원을 매일 가고 싶었고, 피아노를 가지고 싶었지만 아쉬워서 이불 뒤집어 쓰고 울지언정 엄마한테 투정 부려본 기억이 없다.

 

울 엄마가 제일 들을까봐 무서워 한 말은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는 말이었고, 그런 엄마의 당부를 귀가 따갑게 들었다.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가진거 없는 나로서는 공부 잘 하는거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주 가끔은 엄마가 화가 나는 일이 있었고, 빗자루나 허리띠로 (지금 생각하면 거의 아동학대 수준이다. ㅠㅠ:;) 죽도록 맞았다. '엄마가 계모가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힘들었을 엄마의 유일한 '힘듦'과 '절망'에 대한 표현이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엄마가 때리지 않게 된 중학교 때부터였던것 같다.

 

당신은 아무런 욕망도 없고 표현도 못하는 식물처럼 사시면서도 딸내미 기죽는거 보는 건 죽기보다 싫어 하셨고 공부하겠다고 하면 독서실비도 참고서 값도 어떻게든 마련해 주셨다.

 

중고등학교 장학금 받아가며 '공부 잘 한다'는 소리 듣는 기쁨에 힘듦을 잊으셨던 시기인것 같다. 그런 엄마의 자부심이 내가 인문계를 가게 하고 친척분들의 등록금 싼 국립대를 가길 바라는 아쉬움을 무시하고 등록금 제일 비싼 사립대 의대를 가게 한 힘이었던 것 같다.

 

TV에서 '장한 어머니 수기 공모'에 대한 광고가 나올 때마다, 난 울 엄마가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 또 넘친다고 생각했다. 동네 아줌마들이 다 인정하는 '장한 어머니'였다. 우리 엄마는...

 

하지만 난 결국 수기를 보내지 못 했다. 그냥 쪽 팔린게 싫었다. 그게 나였다.

 

의대에 들어간후 의대 교과서보다 소위 불온서적들이 집에 쌓여가도, 학생회장을 해도, 술 먹고 집에 늦게 들어가도 우리 엄마는 그냥 딸을 믿으셨다. 당신 딸이 당신이 병원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의사가 된다는 사실이 엄마를 살게 하는 힘이었다.

 

엄마는 이제, 내가 의사가 되기는 했지만 운동권임을, 그렇게 싫어 하시는 담배를 핌을 잘 아신다. 하지만 '난 안 믿을래'라고 한 마디 하신 후론 아무말씀 하지 않으신다.

 

그건 아마도 여전히 '할 만큼 잘 해주지 못 했다'는 미안함과 '나는 너를 아들도 아니라 남편이라고 생각하며 키웠어'라는 엄마의 조금은 '충격적인' 고백과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쁜 딸이다.

 

엄마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운동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핀다. 엄마의 평생 꿈이나 다름없는 재건축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서도 모델하우스 가자는데 안 갔었고, 완성된 집 구경가자는 엄마한테 짜증을 부려 결국 엄마를 울게 만들었었다. 가구 사러 가는 것도 겨우 다녀왔다.

 

그저 다정 다감한 말 한마디 할 줄 모르고, 외식한번 할 줄 모르고, 한 집에 살면서도 맨날 새벽에 들어가기 일쑤고, 힘들다는 핑계로 집안일에는 손하나 까딱 안 한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 일주일에 한번 먹어드리는 것이 걍 효도라고 생각하며 산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전화통화 하는 것을 들으면서 울 엄마는 나한테 그런 사교성과 다정다감함이 있는게 신기하다고 하신다. 나는 집안에서는 권위적이고 말도 잘 안하는 명예 남성일 뿐이다.

 

알엠님의 [엄마...]를 보면서 이런 생각과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거기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 자꾸 울 엄마랑 겹쳐지고 있었다. 울 엄마는 화장도 안 하시고 사람들도 잘 안 만나시고 사시는게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온전히 엄마가 눈에 보여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울 엄마도 알엠님의 엄마처럼 좋은 아저씨 만나 연애도 하고 잃어버린 '당신'을 찾으셨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쁜 딸의 인생에 대부분 투여된 엄마의 인생을 찾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아직도 여전히 곱고 단아하신 엄마가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표현하시면 좋겠다. 연애해보면 어떠냐는 내 말에 손사래부터 치시는 엄마지만 뭔가 원하시는 것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세째언니를 보면서 나도 차라리 저렇게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그나마 좋은 딸일 수 있을거 같다는 울 엄마가 싫어하는 생각도 했다. 그나마 엄마의 이야기라도 잘 들을 수 있을 거 같았고 가끔 일부러 시간내서 만나면 나도 여유있게 엄마를 대할 수 있을거 같았다.

 

이제 예순 다섯의 할머니가 되서 귀도 잘 안 들려 큰 목소리로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몇 번씩 반복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거 같았다. 마음속에 담아놓은 금강산 여행두 더 빨리 결행하게 될거 같았다. 하지만 울 엄마는 딸이 당신 품을 떠나는걸 그 무엇보다 아파하시고 잠도 못 주무실 분이다.

 

엄마랑 보러 오지 않기를 정말 잘 했다고 생각했다. 엄마랑 같이 봤으면 모녀가 울고 난 후의 어색함이 더 싫을 것 같았다. 같이 보기에는 기억나는 상처와 아픔이 너무 많을 거 같았다. 가슴이 뻐개지게 아팠다.

 

영화하나 봤다고 나쁜 딸이 개과천선 할리는 만무하다. 그냥 당신의 딸이 옳다고 믿는, 그리고 하고 싶다는 인생을 충실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효도라고 생각하며 살거다. 난 아마 계속 나쁜 딸로 살거 같다.

 

하지만... 난 울 엄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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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7 11:40 2005/03/0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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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우리 엄마

    Tracked from / 2005/03/07 22:40  삭제

    * 이 글은 해미님의 [[엄마...] 그리고 나쁜 딸] 에 관련된 글입니다. 우리 엄마는 참 곱다. 어디를 가나 곱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고 듣는다. 화장하지 않아도 눈코입이 정갈해서 곱고 화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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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엠 2005/03/07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비 없는 호로자식'...저도 어릴때부터 질리도록 들은 얘기예요. 그 말 안듣게 하려고 엄마는 더 무뚝뚝하며 엄했고...나중에 오빠가 가장역할을 맡았을 때엔 정말 엄했었죠. 가부장제 사회에서 한부모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힘든것같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2. 2005/03/07 2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젠가 너희 어머님께 큰 병이 난 것 아닐까 걱정하면서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를 비로소 느꼈다'고 말하던 기억이, 문득.

  3. 해미 2005/03/07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엠/ 알엠님의 다큐를 보고나니 갑자기 이런 글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한부모로 산다는건 분명히 힘든 일임에 틀림없죠.
    콩/ 나도 그 기억이 문득 났다우. 글쓰면서.

  4. Dreamer_ 2005/03/10 0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흑. 슬퍼요.ㅠㅠ;;

  5. 금자 2005/03/10 1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마, 한테는 애증이 함께갑니다. 너무 미안해서 부담스럽고
    너무 구질구질하고 짜증나고 그래도, 제일 사랑하니까 늘 가슴이 아프고, 엄마와 딸이 서로를 쿨~하게 '용서'하게 되는 날도 올까요, 글 읽으면서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6. 해미 2005/03/10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리머/ 다시 읽어봐두 가슴이 뻑뻑하네요. 하지만 이런 얘기를 일케 온라인에서라도 풀어 놓을 수 있는거 보면 아픔이 많이 둔해졌나봐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긴 하지만...

    금자/ 애증... 맞죠. 저두 울엄마도 쿨~~ 할 수 있음 좋겠단 생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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