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두 아시아계 노벨상 작가, 공통점은 '이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과 모옌의 <열세 걸음>

18.02.16 20:20l최종 업데이트 18.02.16 20:20l

 

2017년도 노벨 문학상은 전년의 파격(밥 딜런 수상)을 깨고 다시 일반적인 '작가'에게로 돌아갔다.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인물로, 어린 시절 영국으로 건너가 쭉 그곳에서 살아가며 작품 활동을 전개해 온 일본계 영국인이다.

그의 작품은 살아온 공간에 맞추어 자연스레 영어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가 순수한 일본 혈통이라는 점과 작품 내에 일본과 관련된 내용들이 종종 배어있다는 점 등으로 인하여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은 일본 본토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는 1994년 오예 겐자부로가 문학상을 거머쥔 뒤 13년 만에 나온 일본계 문학상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한편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0년대 들어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두 번째 아시아계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수상자는 2012년 수상의 영광을 거머쥔 중국인 소설가 모옌이다. 모옌은 '관모예'라는 본명을 가진 중국의 원로 작가로서, 이미 중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중국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붉은 수수밭>을 비롯해 여러 작품이 미디어화 되고 국제적 찬사를 받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나온 아시아계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이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같은 아시아계이지만 국적은 물론이고 삶의 경로와 작품 세계, 문체까지 매우 다르기 때문에 대표작의 비교를 통해 두 작가 각각의 특징과 더불어 아시아 문학의 현황에 대해서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전쟁 세대의 '반성'을 촉구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 민음사

관련사진보기


가즈오 이시구로에 수상의 영광을 안겨다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소설이다. 국내에서는 '현대의 고전'을 출판한다는 목적 아래에 간행되고 있는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세트의 일환으로 근래에 새로 간행된 바 있다.

이 책의 원본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1989년 초본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출판 첫 해에 부커상을 수상하였고, 4년 뒤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되기까지 했을 만큼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주목은 상당했다.

그러나 현대의, 그것도 한국의 독자가 읽기에 <남아 있는 나날>의 내용은 그 명성에 비해 시시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은 자극적인 소재나 서사구조를 채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도리어 그 정반대의 길, 담담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서술자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 역시 초반부에는 빠르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영국의 한 고급 저택에서 살아온 노년의 '집사'가 들려주는 '품위'나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따위의 논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책 읽기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라면 낯선 소재와 지리한 전개로 지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가 드러나며 <남아 있는 나날>이 주목받은 이유를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자신이 평생 존경하며 섬겨온 주인이, 자신의 삶의 자부심의 주축이 되어온 바로 그 인물이 실은 한낱 무능하게 이용된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 그것이 이 책의 주인공이 서서히 깨닫게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인식의 과정이 이 작품의 소재이다.

작가는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서 30년대 영국의 역사 속 어두운 면을 끌어내고, 동시에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노년의 주인공)에서라도 그것을 바로 인식하고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새롭게 바뀐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남아 있는 나날>을 감성적인 필체로 그려낸 역사소설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보다 확실하게 동일한 소재를 다룬 바 있다. 이 작품은 제국주의 일본에 부역했던 화가의 반성적 회고담을 다룬다. 이처럼 그의 글들은 늘 섬세하고 은은하나,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 어느 작가의 것보다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모옌, 환상을 통해 억압된 현실을 꼬집다 
 

 모옌 <열세 걸음>
▲  모옌 <열세 걸음>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모옌의 경우는 어떨까. <열세 걸음>을 그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사실 이시구로보다 모옌의 작품은 국내에 훨씬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붉은 수수밭>을 비롯해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문학동네,2009), <풀 먹는 가족>(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열세 걸음>을 비롯한 이들 작품은 모두 동일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로 환상적 형식이다. 앞서 말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술 방식이 여러 작가들에게서 흔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옌의 서술 방식은 보다 파격적이다. '중국의 마르케스'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그는 중국의 민담과 설화를 끌어다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그러하듯,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옌 역시 환상적 이야기들을 현실 곳곳에 삽입해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여기에 더해 <열세 걸음>에서 독자들은 초반부에 서술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은 채 서로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서술되기 때문이다. 서술자의 지위 역시 비전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기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마찬가지로 모옌 역시 어디까지나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을 보여준다. <열세 걸음>의 경우, 70~80년대 중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던 여러가지 모순적인 상황들과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되어도 좋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작품의 후반부, 주인공인 물리 교사 장즈추가 죽은 상황에서 그를 추모하는 학교 연설이 이루어진다. 이때 교장은 선생의 죽음을 계기삼아 더욱 공부에 매진할 것만을 강조한다. 얼마나 '개인'이 지니는 가치가 사라진 사회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교장이 선창했다. "대학 합격!" 
"대-학-합-격!" 
교장이 선창했다. "대입 실패는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 지나온 역사 속 잘못된 유산들을 꼬집는다면, 모옌은 지금 '당장'의 중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아시아계 작가들의 위상과 미래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 노벨위원회

관련사진보기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아시아계 인물들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아시아인으로서 문학상을 받은 인물은 앞의 두 사람과 더불어 총 네 명 뿐이다.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유럽-아시아 사이에서 정체성의 논란이 있는 '터키' 소속의 오르한 파묵이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본인의 국적을 버리면서 조국을 강하게 성토하며 귀화, 서구권에 편입된 반체제 중국인 작가 '가오싱젠'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실국적이 영국이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아시아 작가들의 국제무대에서의 주목도는 여전히 전통 서구권 뿐 아니라 남미 및 동유럽계 문학에 비해서도 저조한 편인 셈이다. 이미 아시아가 국제무대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찮아진 지 오래인 상황에서, 이러한 문화적 약세는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문학 역시 중일 양국의 문학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 훨씬 더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 두 노벨상 작가를 비교해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 보편적 감성을 그려내는지가 해당 작가 및 문단의 역량을 좌우한다는 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와 모옌의 서술 방식은 매우 상이하고 소재 역시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문제 - 2차 세계대전의 정신적 극복, 전체주의(또는 공산주의) 사회의 내재적 모순 - 를 뛰어난 표현력으로 소설화 해냈다는 점이다.

사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소설이나 시가 아시아권에서 정착한 지는 서구에 비해 오래되지 않았다. 또한 아시아의 선진 국가들조차도 이미 국제무대의 주류인 서구권에서는 한 세대 전 지나간 이데올로기 문학이나 민족 문학에 불과 최근까지도 강하게 빠져있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국제적 보편성이나 뛰어난 표현력 등이 확보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갈수록 이러한 장애 요소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다양한 세계 문학들이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부디 멀지 않은 시일에 새로운 아시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새롭게 탄생해 아시아 문학의 더욱 발전된,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