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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비핵화 레일에 올라탔다

[기고] 비핵화 구체적인 프로그램 구상할 때

 

 

 

협상을 통한 비핵화의 서막이 열렸다. 북한이 먼저 치고 나왔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핵개발의 전 공정이 과학적으로, 순차적으로 다 진행되었고 운반 타격 수단들의 개발사업 역시 과학적으로 진행되어 핵무기 병기화 완결이 검증된 조건에서 이제는 우리에게 그 어떤 핵 시험과 중장거리, 대륙간 탄도 로케트 시험 발사도 필요 없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부 핵 시험장도 자기의 사명을 끝마치었다"고 했다. 다행히 북한이 대남, 대미협상을 단기적인 거래로 보지 않고 연속적 거래행위로 파악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국내외 평가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혼재하고 있다. 요약하면, "비핵화로 가는 긍정적 신호"에서부터 "북한의 핵무기 국가 선포"까지 분석과 전망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전자의 시각은 북한이 미국 등으로부터 체제보장과 외교관계 수립, 경제 보상을 받으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면에,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한·미동맹의 군사력 우위에 '경제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비대칭적 억지력을 확보하는 것이기에 북한이 핵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국제관계 이론 측면에서도 이러한 상반된 평가(conflicting assessments)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신현실주의 이론가 월츠(Kenneth Waltz)에 따르면 국가는 생존이 목표이므로 이를 위해 모든 노력(self-help)을 추구한다. 군사력을 키우거나 다른 국가들과 안보동맹을 맺어 외부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대표적인 행동이다.  

일정 정도의 핵무기를 확보하면 외부 위협이 있더라도 최소한의 생존능력은 확보하게 되는 셈이기에 무정부 국제질서 하에서 핵무기 보유는 확실히 매력이 있는 유인요소임에 틀림없다.  

이는 물론 북한이 미국과 적대적 관계만 해소되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과 상치된다. 게다가 협상 카드로서 핵무기를 만들고, 나중에 이를 포기한 국가는 아직까지 없다. 따라서 월츠는 핵무기야말로 북한으로서 국가생존에 필요한 유일한 수단이므로 어느 나라도 북한 핵 보유를 막을 수 없다고 진단한다.  

반대로 저비스(Robert Jervis)는 공격에 비해 방어의 우위가 이루어진다면 안보딜레마(security dilemma)가 완화되어 적대관계가 협력적 구조로 전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북한 입장에서 방어의 우위를 점하는 한 가지 방법은 미국과 한국이 자발적으로 군사력을 현저하게 낮추는 조치를 비핵화와 동조화하는 일이다. 

상호 협력이 북미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됨에도 불구하고 신뢰가 구축되어 있지 않아 '배반'을 선택하는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다. 죄수의 딜레마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게임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북한과 미국이 배반으로 얻는 단기적 이익보다 협력을 통한 장기적 이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 지난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 참석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노동신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CIA 국장이 비밀리에 방북한 후 나온 북한의 풍계리 핵시설 폐쇄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실험 발사 중지 선언은 비핵화 협상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신호가 평양에서 발신된 셈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모든 옵션은 테이블에 있다'는 식의 협박이 아니라 파국에서 오는 불이익을 김정은에게 진지하게 이해시켰다고도 추론할 수 있다. 북·미가 합의해서 얻을 이익과 피할 수 있는 손실을 양측이 올바르게 인지했다는 증거다. 

그래서 김정은이 안보(핵)와 경제 중 택일해야 하는 병진노선의 딜레마에서 핵 철로 위에 놓여있던 궁핍한 북한체제를 경제 철로 위로 옮겨 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2008년 영변 냉각탑 폭파를 시연했던 것처럼 어쩌면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을 수도 있는 풍계리 핵시험장을 시멘트 등으로 봉인하는 장면과 ICBM 몇 기를 상징적으로 파괴하는 '세리머니'를 할 수 있겠다 싶다. 보수 일각에서는 애당초 이를 '쇼'로 폄하하지만 '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부가 할 일이다. 

협상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진행되기보다는 오히려 규칙을 만들어 나가는 게임 성격이 더 강하다. 필요하다면 남북 정상 간 전화통화 이후 남측에서 특사를 평양으로 파견하여 우리의 구상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도 신뢰를 구축하는 하나의 전술이다. 

트럼프 역시 기존의 국제정치 및 외교의 문법을 깡그리 무시하는듯한 변종 협상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이번에 남북한과 북·미 간 비핵화 관련한 협상 내용에서 비핵화 종료 시점이 명시적으로 적시된다면 비핵화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셈이다.

북한판 '협력적 위협감소' 프로그램 짤 때 

북한은 지난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의심이 증폭되면서 북·미 사이 서명한 '제네바 합의'(1994.10)는 휴짓조각이 되었고 북한은 이를 빌미로 별도의 제재를 받지 않고서 NPT 탈퇴를 선언했다. NPT에서 서명하고서 탈퇴한 유일한 국가가 됐다. NPT 의무사항인 IAEA 사찰과 검증을 받을 법적의무도 자동적으로 사라졌다.  

따라서 북한을 다시 NPT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에너지 지원과 사용하지 않은 핵연료봉을 구입해 주는 등 일정한 반대급부 내지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나아가 남북, 북·미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과정이 합의가 되면 북한은 보유 핵무기와 시설의 공개, 사찰, 제거 과정 등을 거쳐 마침내 IAEA 등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된다.  

결국 북한 비핵화의 핵심은 매 단계마다 '검증'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그 단초는 이미 2.13 합의문(2007년)에 마련되어 있다. 2.13 합의문에 명시된 북한의 조치는 재처리 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을 폐쇄·봉인하고 IAEA와의 합의에 따라 모든 필요한 감시 및 검증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IAEA 요원을 복귀토록 초청하는 일이다. 그리고 북한은 9.19 공동성명에 따라 사용 후 연료봉으로부터 추출된 플루토늄을 포함한 공동성명에 명기된 모든 핵 프로그램의 목록을 여타 참가국들과 협의하도록 했다.  

보도에 따르면, 5메가와트 실험용 원자로와 재처리시설, 우라늄농축시설 등이 있는 영변 핵시설만 해도 확인된 건물만 390개에 달한다. 영변 핵시설만 해체·제염하는데 수천 명의 인력이 필요하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북한이 영변 이외의 비밀 장소에 고농축우라늄을 은닉했을 가능성도 열어두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북한의 비핵화를 유인 내지 촉진 목적으로 북한판 '협력적 위협감소'(Cooperative Threat Reduction: CTR)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 

CTR에 대한 국내 연구는 오래 전에 있었다. 그동안 먼지가 두껍게 쌓였을 연구보고서를 꺼내어 관련 전문가들을 재조직하여 내용을 보완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는 한국 단독으로 추진될 성질이 아니며 무엇보다 북한의 수용성을 고려하여 다자체제의 틀에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우리로서는 이슈를 선점해야 국제협력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으며 동시에 남북관계도 강화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오랜 남북협상 및 경제 과학기술 협력의 경험을 보유하고 있으며 문화적 동질성 언어 등 여러 측면에서 대북 CTR 적용을 주도할 수 있는 여건도 보유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비용분담은 물론 세부시행과제의 수행에 과학기술계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 철저한 사전 조사와 준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원자력 공학, 물리학, 화학, 국제관계, 안보, 남북문제, IAEA 사찰 및 검증 유경험자, 법률 등 각 방면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여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 상황들을 작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비핵화 로드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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