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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쟁 목표는 '세계 경제 정복'

[전쟁국가 미국·2강-①] 2차 대전과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2019.01.12 11:52:41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서 박인규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지난해 12월 5일에 시작해 오는 3월 31일까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의 내용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아래는 지난해 12월 19일 진행된 2회 강연을 보강한 내용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2차 대전은 미국에게 '좋은 전쟁(Good War)'이었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던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무찌름으로써 인류의 해방자로 떠오른 한편 막대한 전쟁 수요로 대공황을 단숨에 극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엔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전후 세계를 이끌어갈 국제 안보 및 경제 기구의 창설을 주도하면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다. 바야흐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 말기 절대무기인 원자탄을 독점하면서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 즉 '미국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만능(omnipotence)의 환상을 품게 된다.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한 만큼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 또는 환상은 4반세기를 넘기지 못한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도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 군사주의의 실패를 의미한다. 군사력에 의거한 세계 경영이 파탄한 것이다. 미국은 왜 군사주의로 나아갔을까? 그 원인은 2차 대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1차 대전보다 10배나 많은 전쟁 특수를 겪으면서 미국 경제가 전쟁 없이는 유지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을 통해 미국 경제는 '영구 전쟁 경제'가 됐고, 이는 다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영구 전쟁 국가'로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2차 대전은 1차 대전의 후속편이다. 1차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2차 대전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즉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 요구가 나치의 득세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당시(1919년) 경제학자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책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배상금 규모가 독일의 정상적 경제활동을 통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유럽의 지속적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1, 2차 대전을 합해서 30년 전쟁(1914~1945년)이라고 부른다. 영국 패권이 무너진 후 세계 패권을 계승하기 위한 투쟁이 30년간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새롭게 뜨는 자본주의 국가는 미국과 일본, 독일이었는데 독일은 유럽을,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를 독점 지배하려 했던 반면 미국은 세계 전체를 가지려 했다. 이로 인해 독일과 미국, 일본과 미국이 한판 붙은 것이 2차 대전이다. 2차 대전은 자본주의 열강의 패권 전쟁이었다. 

2차 대전의 결과 영국, 프랑스 등 과거 세계를 호령했던 유럽 국가들은 2선으로 물러나고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양대 주도세력으로 떠오른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식민지 민족들, 16세기 이후 서구의 세계 정복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노예로 전락했던 이른바 '제3세계'가 해방됐다는 점이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약 60개의 국가가 해방됐다고 한다. 1945년까지 서구 세력(일본 포함)이 아니면 인간도, 나라도 아니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 아닌 사람(unpeople)이자 사회 아닌 사회였다. 이들이 2차 대전 후 세계사의 무대에 당당한 주역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전쟁은 인명과 재산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 체제를 포함해 모든 것을 파괴한다. 1차 세계대전은 소련 혁명을 낳았고, 2차 대전은 중국 혁명을 초래했다. 기존 정치 체제가 파괴된 결과다. 나아가 전면적인 식민지 해방이 이루어졌다. 서구의 비서구 지배도 무너진 것이다.

식민지 인민들은 수 백 년 동안을 서구 자본주의에 당해왔다. 따라서 해방된 후 이들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1945년 이후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복원하려는 미국과, 민족 자결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과 자유를 확보하려는 제3세계 '피압박 민중' 간의 대결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미국의 2차 대전 전쟁 비용, 1차 대전의 13배 

미국은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 등 세계 정복을 꿈꾸는 세력을 물리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했다고 믿는다. 또한 유엔과 IMF, IBRD 등의 창설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다고 자부한다.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발발까지, 즉 위기의 20년(1919~1939년)은 혼란과 불안정, 갈등과 대결의 시대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 국가가 되고 나서 유엔을 통해 집단안보를 완성하고, IMF 등을 통해 자유무역체제를 복원한 후 비로소 세계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후 1970년까지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서유럽과 일본 등 동아시아)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한다('영광의 25년').  

이런 측면에서 미국이 2차 대전을 '좋은 전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2차 대전을 통해 세계의 해방자로 부각됐고, 세계 패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자본주의 진영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국이 해방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2차 대전 덕택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도 '좋은 전쟁'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또한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은 미국이 아니라 독일과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좋은 전쟁'이란 인식의 보다 본질적인 이유로는 전쟁 특수가 있다. 즉 루스벨트의 뉴딜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전쟁 특수가 해결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501억 달러 상당의 전쟁 물자를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 등 연합국에 제공했다(무기대여법 : Lend-Lease).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한 '민주주의의 병기고(Arsenal of Democracy)'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JP모건이 연합국에 외상으로 판매한 군수 물자는 약 50억 달러였다. 그 10배의 전쟁 물자를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했다.  

렌드리스를 포함한 미국의 총 전쟁 비용은 2950억 달러로 1차 대전 때의(220억 달러) 13배가 넘는다. 이를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3조 9300억 달러, 4조 달러에 가깝다. 참고로 1939년의 미국 국방비는 30억 달러 정도였다. 평시 국방비의 약 100배를 4년 만에 사용한 셈이다. 공황의 원인이 수요 부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쟁 특수는 단숨에 대공황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전쟁 특수는 일종의 극약 처방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수 물자 생산을 일종의 투자라고 치자. 그 투자는 일자리는 만들어내지만 결국에는 죽음과 파괴만을 초래할 뿐이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적 결과를 낳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민수용 투자는 일자리 창출과 함께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따라서 군수 경제는 비상시에 단기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일 수는 없다. 그런데 미국 경제는 2차 대전을 통해 '전쟁 중독'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감염됐다. 이후에도 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나치 격퇴의 수훈갑은 소련 

2차 대전의 실상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이 2차 대전 승전의 최대 수훈 국가라는 것이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전장 모두에서 싸운 유일한 국가라는 점에서 일리가 없지는 않다. (영국과 프랑스는 동남아에서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밀렸고, 소련은 종전 1주일 전에야 대일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나치와의 전쟁에서 수훈갑은 단연 소련이었다.  
 

▲ 1945년 5월 베를린에 입성해 깃발을 내건 소련군. 뒤쪽으로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위키미디어커먼스


2차 대전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은 돈으로 때웠고 소련은 몸으로 때웠다고 볼 수 있다. 즉 미국은 주로 전쟁 물자 생산을 통해, 소련은 엄청난 인명의 희생으로 승전에 기여했다. 그 결과는 미국의 경제적 번영, 소련 경제의 초토화였다. 

소련은 군인 사망자 약 1300만 명을 포함해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유럽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미국과 영국의 군인 사망자는 60만 명 정도다.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사망한 소련군 숫자가 60만 명이다. 약 10만 명의 미군이 유럽 전장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1945년 4월 말 베를린 공방전에서의 소련군 전사자와 같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군 전사자 대 소련군 전사자의 비율은 1 대 53이었다. 

2차 대전에서 전사, 부상, 또는 포로로 잡힌 독일군은 1350만 명인데(독일 성인 남성의 46%) 이중 1000만 명이 동부전선, 즉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이다. 소련은 나치 병력의 5분의 4, 적어도 4분의 3을 대적했다. 나치 격퇴의 9할은 소련이 담당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전투의 대부분을 자국 영토에서 치른 소련은 경제적 피해도 막심했다. 1280억 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 당시 소련 GNP의 25년 치에 해당한다. 1945년 GNP는 1941년 대비 20%나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독일로부터 받아낸 전쟁 배상금은 고작 51억 달러였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따라서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 본토에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단 6명. 당시 공군력에서 뒤졌던 일본은 폭탄을 장착한 기구를 제트기류에 태워 미국으로 보냈다. 산불 등을 유발할 목적이었는데, 이 기구 중 하나가 캘리포니아에서 터지면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연합국의 전쟁 물자 생산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엄청난 전쟁 특수를 누렸다. 대기업이 최대 수혜자였다. 막대한 이윤이 보장되는 정부 발주 전쟁 물자 계약 중 80%가 56개 대기업에 돌아갔다.  

일반 국민도 단맛을 봤다. 1940년 14.6%였던 실업률이 1944년 1.2%로 뚝 떨어졌다. 사실상 완전고용이다. 노동자 평균 임금도 1939년 주당 23달러에서 1945년 44달러로 90% 인상됐다(인플레율 25%). 지긋지긋한 대공황을 벗어난 것이다. 1930년대 맹위를 떨쳤던 반전 여론은 쑥 들어갔다. '총과 버터(Guns and Butter)'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즉 전쟁 경제와 민생 경제의 양립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널리 퍼져 갔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전 세계 GNP의 50%를 차지했고 금 보유량은 3분의 2가 될 정도였다. 당시 미국의 인구는 세계의 6%였다. 아시아와 유럽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반면 미국은 더욱 번영하는 경제대국, 군사강국으로 우뚝 섰다. 같은 승전국이지만 미국은 부강해진 반면 소련은 피폐해졌다. 전쟁이 끝날 당시 미국의 경제 규모는 소련에 3배에 달했다.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미국은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제3세계 민중의 민족 자결을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대외에 천명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다. 즉 2차 대전은 미국에게만이 아니라 세계에도 '좋은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미국인의 인식은 현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벨기에계 캐나다 역사가 자크 파월은 저서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통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미국은 연합국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도 군수물자를 제공했고, 해방된 국가들의 민족 자결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병기고'라던 미국은 '나치의 병기고'이기도 했다. 전쟁 기간 나치 독일의 상당수 군수물자를 미국 기업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의 반(反)파시스트 세력을 일관되게 정치에서 배제했다.  

그는 "2차 대전은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미국의 성전이 아니라 기업의 이해관계와 돈, 이윤을 놓고 벌인 투쟁"이라고 규정한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 정책의 주된 동기는 자유, 정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 대기업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분야 파워엘리트의 이익이었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그리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했다. 민주냐 독재냐, 또는 평화적 수단이냐 군사력이냐는 중요하지 않았고, 미국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민주주의, 자유, 정의 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월뿐만이 아니다. 영국 역사가 A.J.P. 테일러는 "영국과 미국 정부는 히틀러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 말고는 유럽의 어떤 변화도 원치 않았다"고 지적한다. 정치, 경제, 사회의 어떠한 개혁도 원치 않았다는 얘기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전쟁 중 워싱턴에서 일했던 브루스 캐턴은 사회 개혁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는 듯 보였던 전쟁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와 권력이 이전과 같은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추축국들의 패배에만 전념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중략] 전쟁의 성과가 사회 및 경제 개혁을 가져오기 위해, 또는 그런 개혁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들이 엄숙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한때 미 국무부 차관보로 일했던 시인 아치벌드 매클리시는 전후의 세계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작금의 사태 진행을 보건대 우리가 만들 평화,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평화는 석유의 평화, 금의 평화, 해운업의 평화, 요컨대 도덕적 목표나 인간적 관심이 결여된 평화가 될 것이다." 

'전쟁의 정당화',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 

역사가 하워드 진의 평가는 더욱 매섭다. 그는 2차 대전을 통해 "파시즘 국가는 패배했으나 군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 독재, 극악한 민족주의, 전쟁 등 파시즘의 요소들은 전후 세계에 널리 자리 잡게 됐다"면서 "우리는 파시즘에 맞서 승리를 거뒀지만, 그 결과 남은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두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다투면서 파시스트 강국들이 시도했던 것보다 더 큰 규모로 새로운 세력권을 개척하는 세계였다"고 말한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와 한국, 그리고 필리핀에서.

그는 특히 "2차 대전이 세계인의 생각에 미친 치명적이고 심대한 장기적 효과"에 대해 주목한다. 그것은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킨 것"이며 이로 인해 "1차 대전의 무의미한 살육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것이 됐다"는 점을 꼽는다. 이것이야말로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 국민을 어떤 비참한 모험으로 이끌고 가건, 또는 다른 사람들(한반도, 베트남, 이라크 등)에게 그리고 미국인 자신에게 어떤 파괴를 가하건, 2차 대전을 (국민의 전쟁 동원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나치즘 대신에 공산주의가 전쟁의 이유로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했으며,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위협을 사용할 수 없을 때면 사담 후세인 같은 손쉬운 적이 히틀러에 비견될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절대 선이라는 가정은 전쟁 자체에 정의라는 후광을 만들어 주었으며(한국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없었음을 주목하라), 오로지 베트남 같이 극악무도하고 공식적 거짓말에 흠뻑 젖은 모험만이 이런 후광을 헤쳐 없앨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지배 엘리트가 창시한, "미국은 원초적으로 다른 나라 정치인들보다 우월한 도덕성을 갖고 행동한다는 그릇된 주장이 동시대인들의 반향을 얻고 그 이래로 미국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이런 면에서 2차 대전 이후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닐뿐더러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2차 대전이 어떠했기에 미국은 전쟁을 정당화 했는가, 그 실상을 들여다본다.  

포드, GM 등 미국 대기업, '나치의 병기고' 

1940년 1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 생산 공장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 육군 조사관 헨리 슈나이더는 보고서를 통해 포드의 독일 자회사 포드 베르케에 대해 '나치의 병기고(Arsenal of Nazism)'라고 지칭했다.  

포드를 비롯한 제네럴 모터스(GM), 스탠다드 오일, IBM, ITT(국제전신전화회사, AT&T의 전신) 등 미국의 20개 주요 대기업은 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전쟁 기간에도 나치 독일을 위한 군수품 생산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들 대기업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은 물론 교전 국가인 독일에도 군수품을 제공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에게 전쟁은 최고의 장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대기업의 전쟁 장사를 미국 정부조차 막을 수 없었다.  

1940년 6월 26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는 독일 상공인 대표단이 주최하는 나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 GM의 간부인 제임스 무니 등 미국 대기업의 유명 인사가 참석했다. 7월 1일에는 미국 석유기업 텍사코가 뉴욕에서 축하 연회를 벌였다. 제임스 무니,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 등이 참석했다.  

1940년 6월은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한(6월 22일) 직후다. 나치는 1939년 9월 폴란드를 시작으로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 5월 이후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차례로 정복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미국의 한복판에서 미국 대기업 간부들이 참석하는 나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미국 대기업이 제공한 군수 물자가 나치 승전에 커다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기업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보다는 사업과 이윤이 훨씬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사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은 미국의 최대 투자 대상 국가였다. 우선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330억 달러, 독일이 예상했던 액수의 2배) 갚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다.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 배상금을 갚아나갔다. 

히틀러 이전부터 JP모건과 체이스은행(석유 재벌 록펠러 소유)이 전담하다시피 한 독일에 대한 대출은 1920년대 비틀거리는 독일 경제를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의 대독일 차관 업무를 전담한 것은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가 임원으로 있었던 설리번 앤드 크롬웰이라는 법률회사였다. 두 사람은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CIA 국장을 맡는다. 

1933년 이후 독일은 더욱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올랐다. 정권을 잡은 나치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사업하기에 최적의 상태가 된 것이다.  

앞에 말한 포드 베르케의 경우, 1935년에서 1939년 사이 이윤은 20.4배 늘어난 반면 제조원가에서 인건비 비율은 1933년 15%에서 1938년 11%로 대폭 줄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미국 대기업의 진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마디로 독일의 경제 회복과 재무장은 미국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비약적 경제 성장을 이룬 두 나라가 있다. 독일과 소련이다. 독일은 가혹한 노동자 탄압과 대대적 재무장에 의해, 소련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에 의해 비약적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 1930년대 미국의 노동계급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의 실험에 열광했고,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주목했다. 미국에서 1930년대를 '붉은 30년대(Red Thirties)'라고 부른 이유다. 

독일의 비판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려는 자는 파시즘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파시즘이야말로 가장 사악한 형태의 자본주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탄압함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낸 나치 독일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1933년 독일을 방문한 윌리엄 크누센 GM 회장은 "독일 경제는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1939년 3월 독일을 찾은 알프레드 슬로언 GM 회장은 그 전 해 나치의 체코 수데텐란트 강제 합병을 애써 무시하면서, 독일의 전쟁 행위는 "(우리로서는) 크게 이문이 남는 것"이며 독일의 국내 정치는 "GM 경영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1935년에는 듀퐁 등 대기업의 배후 조종으로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파시즘 정권을 세우자는 쿠데타 음모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미국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매료됐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준 것도 미국 기업인이었다. 히틀러는 자동차 재벌 헨리 포드가 1921년에 쓴 <국제 유대인>이란 저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자신의 집무실에 포드의 초상화를 걸어놓았고, 1938년에는 그에게 독일의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미국 기업인들은 히틀러 정권이 얼마나 끔찍한 정권인지를 알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거래를 계속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을 투옥, 살해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미국과 독일의 전쟁배상금 문제를 전담하기 만든 은행으로 1930년 스위스 바젤에 설립됐다. 이 은행은 2차 대전이 시작된 뒤에도 나치에 대한 금융서비스를 계속했다. 유럽에서 나치가 약탈한 금의 대부분이 BIS에 예치돼 적성국교역법에 의해 봉쇄됐을 현금을 나치에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모겐소 미 재무장관은 BIS 임원 14명 중 12명은 "나치이거나 나치의 조종을 받는 자"라고 지적했다.  

한편 록펠러 소유의 체이스은행은 전쟁 기간에도 나치 부역세력인 프랑스 비시정권과 거래를 계속했다. 비시 정권과 나치의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전쟁 중 수신고가 2배로 늘어났다. 

이렇듯 미국 자본가와 나치 독일은 가까웠다. 유럽에서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현재 250개 미국 기업이 독일에 4억 5천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중 58.5%는 상위 10개 기업이 점유하고 있었다. 투자액 비율로는 스탠다드 오일이 14%로 1위, 제네럴 모터스(GM) 12%로 2위였다. 1939년 GM, 포드의 독일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했다. 이들은 2차 대전 발발 이후에도 전쟁 수행에 필요한 트럭, 탱크, 장갑차, 폭격기 등을 공급했다. 
 

▲ 2차 대전 당시 GM 오펠 공장에서 생산한 트럭. 나치 정부는 GM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다. ⓒwww.opel.com


"GM이 없었다면 나치의 소련 침공은 불가능" 

포드와 GM은 한때 독일군 탱크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고, 스탠다드 오일은 독일이 수입한 석유의 90% 이상을 공급했으며, IBM과 ITT 등은 전쟁 수행과 유대인 학살에 필요한 정보통신기술을 제공했다.  

일례로 나치의 소련 침공 직후인 1941년 7월, 독일의 석유 제품 수입 물량 중 미국산 비율은 44%였으나 9월에는 94%로 껑충 뛰어오른다(중립국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수입됐다). 독일 역사가 토비아스 예르작은 스탠다드 오일을 비롯해 미국 기업이 나치에 제공한 석유는 "총통을 위한 연료"라고 평가했다. IBM의 경우, 당시 홀러리스 카드천공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열차 운행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색출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처형하는 등에 이용했다. 

히틀러의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미국 기업이 제공한 합성석유가 없었다면 폴란드 침공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역사가 브래드포드 스넬은 "제네럴 모터스가 없었다면 나치의 폴란드 및 소련 침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포드, GM 등 미국 대기업이 이윤을 위해 나치에 협력했다면 나치 독일은 승리를 위해 미국 대기업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 정부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의 국적이 아니었다. 그 기업이 얼마나 많은 전쟁 물자를 생산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길어야 2∼3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소련에 대한 전격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더 많은 비행기, 더 많은 탱크, 더 많은 트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전쟁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은 포드 등 미국계 기업들만이 갖고 있었다. 헨리 포드가 창안한 대량 생산 기법, 즉 '포디즘'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치의 최고 전략 기획가인 헤르만 괴링과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포드나 GM 자회사의 경영에 대한 개입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리고 두 회사는 나치 정부의 목표치를 초과하는 대량생산으로 이에 보답했다.  

이에 따라 나치 정부는 GM의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고, 더 많은 '기업가적 자유'를 허용했다. 독일 연구자 아니타 쿠글러는 오펠이 "자신의 모든 생산 및 연구 역량을 나치에 제공함으로써 나치의 장기적 전쟁 수행 역량을 증강하는 데 기여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도 독일도 IBM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왜 이러한 기업들을 저지하거나 처벌하지 못했을까? 현대전은 산업전이다. 대기업의 도움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12월 13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기업의 적성국과의 사업 거래를 허용하는 특별명령을 은밀하게 발표했다. 적성국교역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으면 사업 거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역사가 찰스 히감은 루스벨트 정부가 "전쟁 승리를 위해 석유 기업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스탠다드 오일의 석유는 히틀러에게 중요한 만큼이나 미국에게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1942년 미국 정부가 적성국교역금지법에 따라 스탠다드 오일의 대독일 석유 공급을 처벌하려 했으나 극히 가벼운 처벌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탠다드 오일 측은 "우리가 공급하는 석유가 없다면 미국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결국 스탠다드 오일은 약간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처벌을 면했고 이후에도 나치와 계속 거래했다.  

IBM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IBM의 정보처리 기술은 미국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나치와의 유착을 막을 수 없었다. IBM의 나치 협력을 파헤친 역사가 에드윈 블랙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IBM은 전쟁보다도 큰 존재였다. IBM의 너무나 중요한 기술 없이는 미국도 독일도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히틀러도 IBM이 필요했고 연합국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라고 말했다.  

반면 반전 평화주의자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은 전쟁을 막으려면 기업이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윤이 남지 않는다면 기업이 전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이루진 것은 스팀슨의 견해였다.  

미국과 독일의 자본가들은 비록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상대방 적대 국가에 있는 자신의 자산이 "안전하게 유지되고, 적절하게 관리되며, 적대 행위가 끝나면 원상 그대로 반환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과 나치 정부는 (전쟁 행위와 무관하게 자본가의 재산은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한다는) 국제 자본주의의 불문율을 준수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 때문이었다. 또 반파시즘 전쟁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반파시즘 세력을 일관되게 억압했다.  

미국은 '민족 자결'을 억압했다 

1941년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대서양헌장을 통해 전쟁이 끝난 후 피압박 민족의 민족 자결을 존중하며,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달랐다. 미국은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반파시스트 세력의 득세를 극도로 경계했다. 전후 미국의 핵심 목표인 세계의 문호 개방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3년 1월 미국, 영국, 소련은 카사블랑카 회의를 통해 독일의 항복을 공동으로 받는다는데 합의한다. 전후 처리를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국은 이때부터 자국의 전쟁 목표를 추구하면서 물밑 경쟁을 벌였다. 경쟁의 목표는 독일 수도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한 각국이 군사 점령한 국가의 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도 관심의 초점이었다. 카사블랑카 합의의 정신대로 미국, 영국, 소련 합의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 점령한 국가의 마음대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아가 대서양헌장에 명기된 '민족 자결'의 원칙이 지켜질 것인지도 곧 드러날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한 전후 처리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자기들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자국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 처리를 단독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 피점령국 국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대서양헌장이 약속한 '민족 자결'은 공수표였다. 그 첫 사례가 이탈리아다.

1943년 여름,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시칠리섬을 거쳐 로마에 입성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점령한 미국과 영국의 이탈리아 처리는 피점령국 처리의 선례가 될 터였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참여를 배제한 것은 물론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세력을 무장 해제하고 국내 정치 참여를 철저히 막았다.

이탈리아에는 상당한 정도의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세력이 군사·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외국인 침략자에 대한 항전인 동시에 국내 보수 세력에 맞선 내전이기도 했다. 전통 엘리트, 즉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그리고 교황청 등은 1922년 무솔리니의 집권을 도왔고 그로부터 커다란 혜택을 입은 세력들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이들 보수 세력을 권력에서 몰아내려 했다.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했다.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반파시스트 세력과 협력하는 것을 일체 거부했다. 미국과 영국이 보기에 이들의 지향이 너무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반파시스트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왕정 폐지를 비롯해 사회, 정치, 경제 분야의 급진적 개혁을 원했다.  

특히 처칠은 알프스 너머 유럽 대륙에서 급진적 개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반파시스트 세력을 소련의 볼셰비즘과 동일시했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요구를 이탈리아의 공산화로 본 것이다.  

결국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는 무장 해제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해졌다. 이탈리아 국민의 소망과 기대, 반파시스트 세력의 열정과 능력은 전후 이탈리아 복구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교황청 등과 협력했다. 이들은 무솔리니에게 협력한 대가로 커다란 혜택을 입었던 세력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 이전 이탈리아의 구질서를 복원했다.

미국과 영국의 점령 이후 최초의 이탈리아 지도자는 무솔리니의 부역자였던 바돌리오 원수였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이라고 개탄했다. 무솔리니만 사라졌을 뿐, 과거의 억압적 구질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시칠리아 등의 마피아를 '반공의 보루'로 칭찬하면서 이들과 결탁했다. 이른바 마피아 작전(Operation Mafia)이 그것이다. 뉴욕의 전설적 갱 럭키 루치아노와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한통속이 돼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의 전복 공작 등을 추진했다. 

미국 정보기관과 국제 범죄 조직이 마약 거래를 중심으로 비밀공작을 펼치는 것은 이후 현재까지 미국 대외 정책의 비밀스런 전통이 됐다. 미국은 카스트로 암살 시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전복 공작 등 의회 승인을 받을 수 없는 CIA의 불법적 반혁명 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국제 범죄 조직의 마약 거래 대금으로 충당했다.  

프랑스에서는 어땠는가? 미국과 영국은 1944년 8월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이탈리아는 미국과 영국의 교전 상대국이었던 반면 프랑스는 어엿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드골 장군이 자유 프랑스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를 이탈리아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한편 프랑스 본국에는 나치에 부역한 페탱 원수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1944년 3월 '레지스탕스 헌장'을 발표하면서 전후 프랑스의 급진적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페탱과 드골은 매국노와 애국자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보수적이었다. 반면 레지스탕스는 급진적이었다. 레지스탕스는 페탱을 경멸했고, 드골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며 보수적이라고 보았다. 레지스탕스 내에서 드골 추종자는 극소수였다. 

전후 프랑스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서로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다. 2차 대전으로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을 잃고 작은 섬나라로 전락한 영국의 처칠은 전후 드골의 프랑스와 함께 미국과 소련에 맞설 수 있는 독자적 유럽 세력의 구축을 구상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드골이나 레지스탕스보다는 페탱과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다. 레지스탕스는 원천적으로 협력이 불가능한 상대였고, 드골은 처칠의 하수인(전후 프랑스가 미국보다는 영국에 기울 것을 우려)으로 보았던 것이다.  

미국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1940년 6월)에도 비시 정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미국과 비시 정권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은 1941년 11월 비시 정권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1차 대전으로 산산조각이 난 세계 경제를 다시 한 번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 고분고분하고 보수적인 인물이 프랑스 지도자로 적격이었다. 페탱을 선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드골의 집권을 막기 위해 드골을 마다가스카르 총독에 임명하자고 영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상륙 후 미국은 비시 정부가 임명한 현지 총독 프랑수아 다를랑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드골은 격노했고, 미국 내에서도 나치 부역자와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때마침 다를랑이 알지에에서 암살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드골파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결코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했다. 당시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신의 일기에 드골에 대해 "잘난 체하는 데다 야망만 많은 속 좁은 인물"이라고 썼다.  

그러나 드골은 첫째 다를랑과 같은 비시 정권 부역자가 아니었고, 둘째 레지스탕스 세력처럼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애국자인 동시에 보수파라는 점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프랑스 국민에게, 후자는 미국과 영국에 필요한 것이었다.  

스팀슨은 "드골은 나쁘다. 하지만 그 외의 선택은 더 나쁘다"고 실토했다. 특히 프랑스 공산주의자와 좌파가 소련과 관계 강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를 차단해야만 했다. 드골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미국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프랑스를 좌파로부터 구해낼 누군가가 필요했다", "미국은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를 훨씬 더 싫어했다"고 말한다. 1944년 10월 23일, 미국은 드골을 프랑스 정부의 합법적 지도자로 인정했다.

연합국이 파리를 해방하기 수일 전, 레지스탕스는 자력으로 파리를 탈환하겠다는 목표 아래 무장 봉기했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다. 며칠만 기다리면 이루어졌을 파리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가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영국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드골을 지도자로 내세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파리를 장악한다면 전후 프랑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점에서 수도 장악은 정치적 영향력과 직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의 봉기는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드골의 집권에 대해 "단 한 번도 전투를 하지 않은 장군, 단 한 번도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정치인"인 드골이 전후 프랑스의 권력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드골이 레지스탕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상당한 정치적 개혁을 했지만, 그가 아닌 급진적 정부가 들어섰다면 레지스탕스 헌장에 제시된 더 급진적 개혁이 현실화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방 후 미국과 영국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해방자는 해방된 국민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대서양헌장의 민족 자결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프랑스의 피해는 그리스가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이탈리아 및 독일 파시스트에 대한 피어린 항쟁의 결과로 전후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처칠과 스탈린의 밀약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1944년 10월 처칠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비밀 협상을 벌인다.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그해 9월 라인강 도하를 위한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에 실패함으로써 베를린 점령을 놓고 소련과 벌이던 경쟁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처칠은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몸소 모스크바까지 날아간 것이다.  

이 비밀 협상에서 양측은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은 소련의 세력권(소련이 90퍼센트), 그리스는 영국의 세력권(영국이 90퍼센트)으로 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50 대 50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합의한다. 

이 비밀 합의에 따라 영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 우파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미국에 SOS를 쳤다. 이에 따라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바로 냉전의 공식적 기원으로 얘기되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다(1947년 3월). 핵심은 국제 공산주의의 음모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게 된 그리스 국민을 위해 그리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스탈린은 처칠과 맺은 밀약을 '충실히' 지켜 그리스 내전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에게 패배했고 이후 그리스는 군부 독재 등 숱한 고난을 겪게 된다. 결국 그리스는 미국, 영국, 소련 등 강대국 간 흥정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의 고난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국제 문제에 개입한다는 미국의 주장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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