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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한겨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등록 :2019-04-11 07:04수정 :2019-04-11 07:08

 

 

 

가정부 소식ㅣ상해에서 임정 수립
3·1 성과에 10여년 독립운동 결실
제국 아닌 민국으로 복벽주의 결별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군무총장 김규식 최재형 선출
군무·법무·교통총장과 비서장도
10개조 임시헌장 민주공화제 뚜렷
1919년 4월11일 임시의정원이 공포한 임시헌장. 10개 조항에 불과하지만 민주공화제의 기본적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19년 4월11일 임시의정원이 공포한 임시헌장. 10개 조항에 불과하지만 민주공화제의 기본적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4월10일 경성/오승훈 기자】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는 임시정부(임정)의 탄생을 선포한다.’

 

중국 상해에서 가(假)정부 수립을 치열하게 논의해온 일군의 독립운동가들이 11일, 마침내 새로운 나라,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 제국주의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지 9년 만의 일이다. 짧게는 3월1일부터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이어진 대한독립만세의 염원이 낳은 성과임과 동시에 길게는 경술년(1910) 이래 면면히 이어진 가정부 수립 운동이 맺은 결실이다. 임시라는 제한을 두었으나, 이제 우리에게도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설움을 달래줄 어엿한 정부가 생긴 것이다.

 

상해 고위 소식통이 본지에 알려온 급전에 따르면, 10일부터 상해 불란서 조계지 김신부로(60호)에서 철야회의를 한 이회영(52)·이시영(50)·여운형(33)·조용은(소앙·32)·신석우(25)·여운홍(28)·현순(39)·이광수(28) 등 독립운동 대표자 29인은 임시의정원(국회) 설립 의결을 거쳐 11일 오전, 드디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기로 했다.

 

밤새워 진행된 회의에서 5가지의 중요한 사항이 결정되었는데 먼저 조소앙씨가 회의기구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제안, 대표자들의 동의가 이뤄졌다고 한다. 정부 수립에 앞서 입법기관을 출범시킨 것이다. 뒤이어 무기명 투표로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50)이, 부의장으로는 손정도(47), 서기에는 이광수·백남칠이 각각 선임되었다. 최초 의회 조직체의 탄생으로 독립협회가 21년 전에 추진했던 의회설립운동이 이제야 열매를 맺은 것이다.

 

곧바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속개되었는데 회의 목적은 전월 1일 기미독립선언을 통해 천명한 ‘독립국’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회의는 국호·관제 결정, 국무원 선출, 헌법 제정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먼저 국호는 신석우·이영근씨 등의 제청으로 ‘대한민국’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빼앗긴 국가를 되찾는다는 뜻에서 경술년에 잃어버린 국호인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도로 찾아 사용하되 정치체제는 ‘제국’이 아닌 ‘민국’을 지향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밝혔다. 민국이라는 국호의 제정은 3월1일 독립선언 직전까지 존재했던 복벽주의(왕정복고)를 완전히 극복하고 최초의 민주정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하다. 아울러 민국에는 신해혁명 이후 선포된 국호 ‘중화민국’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국호를 결정한 임시의정원 회의는 정부 조직안을 확정하고 내각 인선에 나섰다.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삼으면서 국무원에 내무·외무·재무·교통·군무·법무의 6부를 두는 안으로 결의되었다. 수립이 논의 중인 한성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 아래 내무·외무·재무·교통부를 두도록 하였으나, 상해에서는 집정관총재 대신에 국무총리를 두고 각부의 대표자 직명을 총장으로 정한 것이다. 곧바로 인선이 이루어져 국무총리에는 이승만(44), 국무원 비서장은 조소앙, 내무총장 안창호(43), 외무총장 김규식(38), 재무총장 최재형(59), 군무총장 이동휘(46),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49)이 선출되었다.

 

막상 총장을 선출하고 보니 법무총장 이시영만 상해에 있는 형국이라,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에게 차장직을 부여해 총장 업무를 대신하도록 했다. 내무차장 신익희(25), 외무차장 현순, 재무차장 이춘숙(30), 군무차장 조성환(44), 법무차장 남형우(44), 교통차장 선우혁(37)이 그들이다.

 

다음 안건은 임시헌장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조용은·이시영·남형우·신익희 등 법조계 출신이거나 법률을 전공한 인물들이 나서서 헌장을 마련하였다는데 특히 조용은씨의 역할이 컸다고 전해졌다. 임시헌장은 전문 형식의 선포문에 이어 10개 조항의 규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일제와 싸우는 전시체제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라고 규정한 점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권력분립 체제를 선구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임정 국정운영의 최고 정책결정기관은 임시의정원이 될 전망이다.

 

임시헌장은 또 남녀귀천·빈부계급이 없는 일체 평등을 명기(제3조)하고 신교·언론·거주이전·신체·소유의 자유(제4조), 선거권과 피선거권 보장(제5조), 교육·납세·병역 의무(제6조), 인류의 문화 및 평화 공헌과 국제연맹 가입(제7조), 구황실 우대(제8조), 생명형·신체형·공창제 폐지(제9조) 등의 조항을 담고 있다. 특기할 점은 제10조에서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하여, 광복 뒤에는 지체하지 않고 인민의 뜻에 따라 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비록 구황실의 예우 문제 같은 봉건적 잔재도 없지는 않았으나, 10개 조항에 불과한 임시헌장으로 민주공화제의 기본적인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자랑스러운 대목이다.

 

임시의정원은 ‘정강’도 함께 공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민족평등 국가평등 및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 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 3. 일체 정치범인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의함. 5. 절대독립을 맹세하고 시도함. 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違越)하는 자는 적으로 함.”

 

이제 우리의 나라와 우리의 정부를 세웠으니, 남은 것은 완전한 독립뿐이다.

 

 

△참고문헌

 

김삼웅, <3·1혁명과 임시정부>(두레·2019)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3(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09)

 

한시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위상과 성격’(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 국제심포지엄·2019)

 

이해영, <임정, 거절당한 정부>(글항아리·2019)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9582.html?_fr=mt1#csidx6e23e0ac2129c1eaee43b1709eab1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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