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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 39년···“인간답게 살아보자” 잊혀진 광부의 절규

  • 입력 : 2019.04.29 06:00:02 수정 : 2019.04.29 0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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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9년 아픔 여전한 ‘사북항쟁’

    1980년 4월 사북항쟁 당시 철로를 점거한 광부들과 가족들. 이들은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구호를 외치며 나흘간 투쟁한 뒤 일터로 복귀했지만, 돌아온 것은 계엄당국의 끔찍한 탄압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캡처

    1980년 4월 사북항쟁 당시 철로를 점거한 광부들과 가족들. 이들은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구호를 외치며 나흘간 투쟁한 뒤 일터로 복귀했지만, 돌아온 것은 계엄당국의 끔찍한 탄압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캡처

     

    “광부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1980년 4월 강원 정선군 사북읍, 당시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이던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부와 가족 등 6000여명이 철로를 점거하고 쟁의를 벌였다. 21일부터 나흘간 이어진 광부들의 쟁의는 임금 인상에 대해 회사와 합의하며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약속은 금세 깨졌다. 5월6일 계엄당국은 정상 출근을 시작한 광부와 그 가족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어진 고문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국가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글도 지도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를 북한에 몇 번이나 넘어갔다 온 간첩이라 불렀다. 광주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지기 불과 12일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과 달리 강원도 두메산골 탄광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언론은 광부들을 ‘폭력적인 시위꾼’으로 몰았다. 사북항쟁은 못 배우고 험악한 이들의 난동처럼 그려졌다. 

    숨죽인 세월이 지났다. 운동 주모자 두 명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광부들은 광주 5·18, 제주 4·3 등이 명예회복을 해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탄광촌이었던 사북은 이제 카지노 도시로 변해 외지인들만의 땅이 됐다. 광부의 딸과 아들은 사북을 떠났다. 사북은 떠올리기 싫은 고향이 됐다. “광부들이 일하다 죽는 것은 당연했던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원갑(79)·신경(77)씨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기다린다. “폭도라는 이름을 벗고, 떳떳하게 사북에서 광부 동지들과 만나는 날”을.

    지난 26일 오후 사북항쟁 관련 행사를 위해 서울을 찾은 이들을 마포구 서강대학교에서 만났다. 이씨는 말했다. “광부들의 시커먼 손은 누구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커피잔을 쥔 이씨의 손에 눈길이 갔다.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굽어 있었다. 고문관의 군홧발에 밟혀 상처 입은 뒤 제대로 펼 수 없게 됐다. 마흔의 나이에 사북항쟁을 이끈 이씨에게 남은 상처였다. 

    그는 1964년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탄광 일을 처음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다녀오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였다. 스무 살에 결혼해 부인과 딸 둘, 어머니와 형제까지 모두 다섯이 하릴없이 이씨를 쳐다봤다. 탄광 일을 하면 돈벌이가 좀 될 것이라 생각했다. 9년을 일했다. 힘들고 처우도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1973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로 옮겼다. 당시 최대 민영 광업소였다. 보안관리 자격증이 있어 ‘감독’으로 일할 수 있었다. 사북역에서는 매일 수천t의 탄이 외지로 흘러나갔다. 광부들 땀의 대가였다. 그러나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어용노조는 회사와 짜고 광부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참기 어려웠다. 1978년 노조지부장 선거에 출마했다. 대의원 간선제로 선출되던 노조지부장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졌다. 

    ■ “매년 쳇바퀴 기념행사…사북은 지금도 깜깜한 밤중입니다”

    잊혀진 광부의 절규 

    <b>사북항쟁을 기억하며 ‘토크콘서트’</b> 지난 26일 서울 서강대에서 열린 ‘기억을 말한다-사북항쟁’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신경·이원갑씨와 황인오 사북민주항쟁동지회 부회장(왼쪽부터). 이날 행사는 사북항쟁에 참여한 광부들과 진상규명에 힘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다. 이상훈 선임기자 dpplee@kyunghyang.com

    사북항쟁을 기억하며 ‘토크콘서트’ 지난 26일 서울 서강대에서 열린 ‘기억을 말한다-사북항쟁’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신경·이원갑씨와 황인오 사북민주항쟁동지회 부회장(왼쪽부터). 이날 행사는 사북항쟁에 참여한 광부들과 진상규명에 힘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다. 이상훈 선임기자 dpplee@kyunghyang.com

    광부들과 어용노조 대항조직을 만들어 항의하기 시작했다. 1980년 4월21일 경찰에 허락을 받고 집회를 열려 했지만, 이미 길이 막혀 있었다. 광부 옷을 입은 경찰들이 훼방을 놨다. 경찰과 대치하던 중 경찰과 광부 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나흘간의 사북 점령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네 국밥집에서는 광부들 힘내라며 음식을 댔다. 

    ■ 탄 캐다 간첩으로 몰려 

    계엄당국은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했다. 그들에게 탄광산업은 경제개발의 기반이었기에 이곳에 불어닥치려는 민주화와 노동 운동 물결을 묵과할 수 없었다. 광부들은 어쩔 수 없이 24일 회사와 임금 인상 등을 약속하며 합의했다. 29일 광부들은 정상 출근했다. 처벌이 없다는 약속은 5월6일 무산됐다.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단은 광부와 그들의 가족 140여명을 붙잡아 갖은 고문을 가했다. 국가는 이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이씨는 “통닭구이, 손에 각목 끼우고 때리기, 고춧가루 물 먹이기 등 갖은 고문을 다 당했다”며 “다른 사람들 조사받는 걸 봤는데, 여자들은 옷이 다 헤쳐져 맨몸이 드러났다. 군인들이 구둣발로 밟는데, 인간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군에서는 광부들의 자질과 실력으로 봤을 때 이 같은 큰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면서 불순분자가 개입돼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사돈의 팔촌까지 신원조사를 하고 동네에 우리가 빨갱이라고 소문을 다 냈어요.” 이씨는 계엄령포고령 위반 등으로 징역 1년6월을 살았다.

    이씨와 함께 운동을 이끈 신씨 역시 옥살이를 했다. “공소장을 보니 광부들 서이 너이 ‘골목집’이라는 식당 가서 밥 먹은 걸로 계엄법 위반이라고… 세상에 맥주 한 병 나눠 먹은 걸 도적으로 몰아서. 제일 억울한 게 우리는 산업역군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인데 빨갱이로 몬 걸 보고, 이게 무슨 법치국가인가….” 

    1982년 형을 끝내고 사북으로 돌아온 이씨에게 동원탄좌는 돈 500만원을 쥐여줬다. “당신을 추종하는 세력이 아직 남았으니 사북을 떠나달라고…. 못 받는다고 했더니 두 번을 더 불러 1500만원까지 제시했습니다. ‘나를 추종하는 세력이 정말 있다고 하면 더 낯부끄러운 짓은 못한다’고 거절하고 나왔습니다. 사실 그때 회사가 나를 떠나라고 안 했으면 오히려 사북을 떠났을 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도 사북에 산다. 

    ■ 카지노는 “광부 배척 산업” 

    당시 회사에서 사택이라고 지어준 집은 얇은 합판을 덧댄 가건물 같았다. 방 두 개에 삼대가 모여 사는 집도 흔했다. 열 가구가 외부에 있는 화장실 한 개를 공동으로 사용했다. 이씨는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 길게 줄 선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고 했다. 

    사람이 죽는 것도 예사였다. “한 달에 보통 광부 두세 명이 죽었습니다. 관이 없어서 ‘지장’이라고 종이에 시신을 둘둘 말아서 뒷산에 묻어 버리고, 그런 무덤이 숱했습니다. 아침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사택 앞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는데, 회사는 그냥 돈이나 몇 푼 쥐여주면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사람 목숨을 경시했습니다.”(신경씨) 

    1990년대 들어 석탄산업이 사양에 접어들며 사북 일대의 탄광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퇴직금도 못 받고 일자리를 잃는 광부들도 허다했다. 대체산업이라며 정선에 카지노가 들어섰다. 폐광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관광산업을 육성한다는 장밋빛 전망을 내세웠다. 이씨는 카지노가 “광산 대체 산업이 아니라 광부 배척 산업이 됐다”고 말했다. 카지노는 지역 주민을 일정 비율 채용하며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카지노에 가서 일할 광부들은 없었다. 이씨는 “탄만 캐던 사람들이 사무를 볼 입장이 못되니, 광부들이 할 수 있는 게 청소, 빨래 이런 것뿐이었다”며 “결국 많은 광부들이 사북을 떠났다. 차라리 제조업 공장이 들어왔으면 사람들이 일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게 아니냐”고 말했다. 

    광부의 자식들도 사북을 떠났다. 광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살기엔 사북이 남긴 기억은 너무 어두웠다. 사북항쟁 당시 이씨는 9남매의 아버지였다. 첫째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둘째가 중학교 3학년, 셋째가 초등학교 6학년, 막내아들이 두 살이었다.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너희 아버지 빨갱이라며’라는 질문을 듣고 살았다. 

    “아이들이 사북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학교 안 다니겠다고 전학 보내달라고 울었어요. 넷째는 하도 고집을 부려 원주에 있는 학교로 보냈지만, 하숙비 등 돈이 감당 안돼 다시 사북으로 데려왔습니다.”(이원갑씨) 감옥에서 나온 이씨는 한동안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일했다. 그간 식당, 옷장사 안 해본 것 없이 일하며 살았다. 그는 9남매에게 “내가 너희 모두 고등학교까지는 보내준다. 그 이상은 어렵다”고 말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튀어나온 갈비뼈를 보여주면서도 당당했던 이씨의 눈시울이 자식들 얘기에 붉어졌다. “아이들이 아버지가 그 사건에 가담 안 했으면 우리도 대학 갈 수 있지 않았냐고, 걔들은 원망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고 어리광을 부리는 건데, 부모로서 그 얘기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사북항쟁 39년···“인간답게 살아보자” 잊혀진 광부의 절규

    ■ 사북은 지금도 ‘깜깜한 밤중’ 

    이원갑·신경씨 두 명만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
    6000여명 구제 못 받아
     

    사북항쟁은 올해로 39주년을 맞았다. 지난해 기념식엔 강원도지사가 찾아와 사북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기념사업회 등 다양한 재조명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올해까지는 큰 진척이 없다. 

    “5·18 광주는 성지 아닙니까. 그런데 사북은 아직도 다들 어둡게 기억하고 있어요. 기념행사는 매번 하는데 항상 쳇바퀴 돌 듯 그 행사고 사람들은 나이 들어가요. 이번 행사에도 매번 오던 사람이 안 와 물었더니 몸이 아파서 이제 못 온다고 했습니다.”(신경씨) 그는 “사북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아 명예라도 회복되는 게 희망 사항이다. 동지들과 웃으며 만나고 싶다”며 “그게 아니라면 사북은 지금도 깜깜한 밤중”이라고 말했다. 

    사북, 폭동의 땅이 아닌 
    민주화 땅 기억 됐으면

    신씨와 이씨는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둘뿐이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나머지 26명의 동지, 합수부에 끌려가 고문받았던 140여명의 사람들, 사북에서 경찰과 맞섰던 6000여명의 광부와 그 가족들은 여전히 구제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의 제대로 된 사과도 없었다. 이씨는 현재 사북민주항쟁동지회 회장이다. 동지회에선 약 50명의 회원들이 활동한다. 그는 “동지회 일원이 이제 대부분 80대다. 광부들이 살아 있는 동안 국가의 사과를 받고 싶다”며 “사북이 폭동이 일어났던 곳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이 있었던 땅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주목 못 받은 ‘사회적 참사’ 바닥부터 기록  

    ‘사북항쟁’ 추적한 서강대 ‘풀뿌리기억저장소’ 

    사북항쟁은 1980년대의 주요한 노동 운동이었다. 회사와 어용노조, 이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정부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었다. 

    하지만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교과서에도 제대로 실리지 못한 채 잊힌 이야기였다. 2020년이면 40주년을 맞는 사북항쟁을 제대로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주목받지 못한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설립된 서강대학교 ‘풀뿌리기억저장소’에서는 사업 첫 주제로 사북항쟁을 꼽았다.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가 ‘기억을 말한다-사북항쟁’ 토크콘서트를 개최했다. 항쟁에 참여했던 광부들과 진상규명에 힘썼던 이들을 불러 1980년의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이날 토크콘서트는 연구소 내에 설치된 ‘풀뿌리기억저장소’의 사북항쟁 프로젝트 사업 일환이었다. 

    기억저장소는 사람들에게 잊힌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지난해 설치됐다. 첫 기억 연구 주제로 사북항쟁을 선정했다. 사북항쟁 참가자들의 구술 자료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작업을 했다. 사북항쟁 연구자로 2000년 당시 석사논문을 집필 중이던 박철한씨가 녹취한 자료였다. 사북항쟁 관련 구술 자료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1980년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요약본만 A4 용지 100장을 넘는 방한 자료다. 구술 자료가 있었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기억저장소는 구술 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하고 문서화해 디지털 아카이브에 남기기로 했다. 다음 달 홈페이지 개설을 목표로 작업 중이다. 

    기억저장소 담당 김정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사북항쟁은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라 저장소 취지와 잘 맞았다”며 “5월 광주 한 달 전에 벌어진 사건으로 당시 계엄군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일이라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소 이름을 ‘풀뿌리’라 지은 이유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닥에서부터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억저장소는 사북항쟁 외에도 지난해 라오스댐 붕괴사고 등 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참사에 대한 기억 연구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김 교수는 “기증받은 자료 등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나갈 생각”이라며 “앞으로 한국전쟁 참전 군인에 대한 잊힌 자료나 월남 전사들에 대한 생활사, 5·18 구술 자료 등을 더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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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4290600025&code=940702#csidxa6dc24010515a45baff977a7bb8a6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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