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 ②중공업도시 20대들

자생적 경제력 가진 거제·창원 등
고임금으로 ‘균등한 삶’ 살았지만
가장이 밀려나자 청년 삶도 분화
거제 청년 8년새 4천여명 줄고
창원에선 1만4천여명 빠져나가
설문 응답자 절반 “떠나고 싶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역과 성비, 학력과 학벌 등을 고려해 분류한 만 19~23살 청년 100명을 만나 심층 설문과 인터뷰를 한 기획 시리즈 ‘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은 1회(▶관련 기사 : ‘한국 청년 100명’ 만나봤더니…“계층 이동 가능성 크다” 6명뿐)에서 지역과 학벌 차별에 좌절하면서도 나름의 미래를 키워가는 ‘84%’ 청년들의 삶을 그렸다. 2회에서는 지역인데도 산업단지가 있어 대공장의 경제적 울타리 안에서 대체로 균등한 삶을 살아온 중공업도시 청년들의 삶이 어떻게 분화되고 분산됐는지 짚어봤다. 아울러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청년들의 삶과 생각은 어떤지 들어봤다.

 

 

 

 

 

 

 

 

 

 

 

 

 

스물세살 대학생 황희주(가명)는 그날의 뱃고동 소리를 잊지 못한다. 2008년 어느 날, 열두살 황희주는 원피스를 입고 거대한 배 위에 서 있었다. 그날은 아빠의 손을 거친 그 배가 처음 물 위에 뜨던 날이었다. 아빠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다 황희주가 다섯살 때 거제로 이주해 프리랜서 선주감독으로 독립했다. 선주감독은 배가 잘 지어지는지 검사하는 일을 한다. 조선업은 활황이었고,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자리잡은 거제는 선주감독에게 ‘메이저리그’였다. 정규직보다 벌이가 더 나았다. 진수식은 배와 호텔에서 1박2일 동안 열렸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만 입던 아빠도 그날만은 양복을 입고, 역시 어색하게 양복을 입은 동료들과 외국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웃어댔다. 황희주는 진수식 뱃고동을 울리는 몫을 맡았다. “부우웅” 뱃고동 소리와, 모두가 황희주를 바라보며 치던 박수 소리가 귓가에 또렷하다. 돌아보면 그날이 조선업 호황의 절정이었다고 황희주는 생각한다.

 

절정 뒤에는 내리막이 있다. 황희주가 고등학생 때 불황이 왔다.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이 기침하니 거제는 몸살을 앓았다. 지난 몇년 동안 대우조선의 분식회계와 임원 비리, 구조조정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삼성중공업도 적자를 이어갔다. 황희주의 아빠는 2017년 가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일감을 찾지 못했다. 겨우 새 직장을 구했지만 선주감독이 아니라 배 부품 검사를 한다. 연봉도 크게 깎였다. 황희주는 유학이나 어학연수의 꿈을 접었다. 황희주의 거제 친구들은 예전과 달리 국가장학금 신청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거제의 회사들은 이제 직원 자녀에게 학자금을 지원하지 않는다.

 

경북 포항부터 경남 거제를 거쳐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남동 연안을 잇는 남동임해공업지대의 중공업도시들은 1960년대 말부터 한국 경제성장의 동력이었다. 상주 곶감이나 성주 참외처럼 중공업도시에는 짝이 되는 이름들이 있다. 울산의 현대, 여수의 지에스(GS), 포항의 ‘포철’이 그런 이름들이라면, 거제는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이다. 중공업도시의 흥망은 기업의 부침에 따라 결정된다. 불황이 찾아오면 도시는 밤이 짧아진다. 대우조선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거제 옥포 유흥가는 늘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요즘은 저녁 8시만 되면 식당들이 불을 끈다. 가게를 내놓는다는 펼침막이 곳곳에 나붙었다. “여기 사람들은 ‘대우조선이 있는 한 내가 망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개조차 천원짜리는 보지도 않았대요. 만원짜리만 물고 다녀서. 이제 아마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중공업도시에서 기업은 일터인 동시에 생활공동체였다. <한겨레>가 만난 중공업도시 청년 22명(심층인터뷰만 한 11명 포함)은 해마다 5월이 되면 아빠의 직장에서 열리는 체육대회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쯤 가지고 있었다. 중공업도시는 ‘초과노동-고임금’ 직장에 다니는 아빠의 벌이로 가족의 생계가 유지되는 전통적 노동자 가구가 다수다. 아빠의 벌이가 가정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2017년 거제의 제조업 종사자 5만331명 가운데 91.2%(4만5907명)가 남성이었다. 같은 해 현대자동차의 도시 울산도 제조업 종사자 88%가 남성이었다. 부산의 경우 이 비율이 두 도시보다 20%쯤 낮은 70.3%였다. 중공업도시의 가족들은 대공장 울타리 안에서 가부장을 중심으로 대체로 균등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는 저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다수의 산업도시가 여전히 남성 생계 부양자라는 물질적 토대와 그에 따른 가부장적 가족 모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_________
몰락은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중공업도시에서도 몰락은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았다. 대우조선 같은 대공장의 울타리는 아직 직원과 그 가족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울타리에서 밀려난 아빠와 그 가족들은 무너졌다. 무너지는 속도는 울타리와의 거리에 비례했다. 황희주보다 울타리와의 거리가 더 먼 가부장의 딸과 아들은 생존을 위한 링에 직접 올라서야 했다. 스물네살 대학생 민찬식(가명)이 그런 경우다. 그는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1부터 10까지 중 어느 정도 되느냐는 질문에 “3 정도”라고 답했다. 창원에서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던 민찬식의 아빠는 2011년께 작업 중 허리를 다쳤다. 민찬식이 고등학생이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빠는 병원에 누워 있다. 그 뒤론 엄마가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휴대전화 공장에 취직한 당시 스물셋의 누나가 생활비를 보탰다.

 

민찬식은 주거비와 교통비가 적게 드는 곳을 기준으로 대학에 간 뒤, 영화관, 편의점, 식당 서빙 알바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 2015년 3월 거제의 조선소에 발을 들여 8개월 동안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했다.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의 각 부위를 조립할 기계가 먼저 필요하다. 민찬식은 그 기계가 버티고 서는 지지대를 용접해 조립하는 일을 했다. ‘화기’라고 부르는 일이다. 창원에서 새벽 6시에 일어나 통근버스를 타고 거제 조선소로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일했다. 잔업이 있으면 밤 10시에 일이 끝났다. 한시간 뒤 집에 도착해 출근복을 입고 잠들었다가 그 옷을 그대로 입고 출근버스를 타러 간 적도 있다. 철야 때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 의자에서 쭈그려 잤다. 쉬는 날은 2주에 한번. 그렇게 일하면 한달에 300만원을 손에 쥐었다. 민찬식에겐 큰돈이었다. 하지만 큰돈엔 대가가 따랐다.

 

같은 공장에 또래라 눈에 띄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용접 때 주로 쓰는 아르곤가스를 잘못 들이마셔 죽었다. 고온에 반응하지 않는 아르곤가스는 배관을 이어 붙일 때 용접 부위가 산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한다. “아르곤가스가 무거워서 들이마시면 숨을 못 쉰대요. 그 친구는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조하는 사람인데 주입하는 사람이 실수한 것 같아요.” 민찬식 옆에서 일하던 아저씨는 손가락이 잘렸다. 누군가는 6층에서 떨어졌다. 민찬식도 자재를 자르다 허벅지가 잘릴 뻔한 기억이 있다. “그때는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직접 보기도 했고….” 민찬식은 그렇게 번 돈 가운데 150만원을 집에 보낸다. 지역에서도 집에서도 별다른 지원을 받아본 적 없는 민찬식에게 창원이나 거제와 같은 중공업도시는 별다른 의미 없는 이름이다. “한번씩 가서 돈을 벌 수 있는 곳? 그 이상 특별히 더 많이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한겨레>가 만난 이들 가운데 민찬식과 비슷한 이유로 조선소나 공장에서 알바로 일하거나 일한 경험이 있는 청년은 여러 명이었다. 스물네살 대학생 정영수(가명)는 울타리의 경계에 놓여 있다. 아빠는 창원산단 안에 있는 중견기업에 다닌다. 자동차업체에 베어링을 납품하는 회사로 매출이 1조원 가까이 될 정도의 탄탄한 기업이다. 정영수도 어렸을 적 회사 체육대회에서 공을 찬 기억이 있다. 하지만 처우는 대기업과 달랐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6년 전쯤부터 회사는 아빠한테 주말 초과노동을 금지했다. 월급이 몇십만원 줄었다. 엄마는 10여년 전부터 백화점에서 이불 파는 일을 한다.

 

정영수는 대학에 입학하고 2년 동안 방학 때마다 공장 알바를 했다. 한달 꼬박 일하면 270만원 남짓 벌었다. 정영수는 공장 일을 ‘반복’이라고 기억했다. 변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친구 2명과 함께 5톤 트럭 다섯대에서 변기를 내려 아파트 공사 현장에 쌓아야 했다. 그는 그 지겹고 힘든 일을 “젊으니까” 버티면서 “그냥 했다”. 창원의 대공장들이 그에겐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돈을 한번에 빡 모을 수 있는 곳? 그런 정도로 생각해요.” 아빠처럼 살고 싶냐는 질문에 정영수는 “아니”라며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순경 시험을 준비 중이다.

 

창원에 사는 스무살 대학생 현수현(가명)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최하층에 속하는 “2”라고 답했다. 현수현의 아빠는 20년 동안 건설회사에 다녔는데, 아빠가 지난해 일하다 몸을 다쳤다. 현수현은 아픈 아빠가 “정년퇴임을 당했다”고 표현했다. 산재 처리는 되지 않았다. 현수현은 지난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알바를 했다. 일주일 내내 알바를 한 적도 있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묻자 “쉬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같은 중공업도시 창원에는 현수현과 다른 사람들이 산다. “아빠가 이쪽 지역 회사에서 조금 높으신 분이면 놀고 있는 자기 아들을 넣어준다거나 그런 경우가 많더라고요. 창원에서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회사는 ‘뽑힌 사람 중 반은 낙하산이고 반은 면접 봐서 들어간 사람’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와요.”

 

_________
울타리 안팎으로 갈리는 삶

 

스물한살 대학생 서진환의 아빠는 지금까지 한국지엠에서 정규직으로 일한다. 그에게 창원산단은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울타리 같은 공간”이다. “혜택을 받은 게 많았어요. 가족끼리 여행 가서 숙소 같은 걸 잡을 때도 공단의 혜택이 있었죠. 축구를 보러 가도 티켓이 할인되기도 했고요.” 서진환은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8”이라고 답했다. “살면서 한번도 부족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대학 친구들이나 군대 가서 선임·후임들 보면서 많이 느꼈어요. 힘들게 사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나 정도면 괜찮게 사는 것 같아요.”

 

아빠는 주말에도 일에 시달리지만, 그럼에도 서진환은 아빠처럼 사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미래에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그는 “아빠처럼 열심히 해야 이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고 답했다. 그는 창원의 경기가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네 풍경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여요. 창원이 지난 몇십년처럼 크게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떨어지지는 않고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역시 스물한살인 박상준의 아빠도 한국지엠 정규직이다. “고등학교 때 한 반에 서른명 정도 있었으면 부모님 절반이 다 창원공단에서 출퇴근했어요. 공단은 한마디로 ‘없으면 안 되는 곳’이죠. 여기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다 공단에 있는 회사에 다녔으니까.” 그에게도 창원산단은 여전히 ‘울타리’다.

 

같은 중공업도시 안에서도 황희주와 민찬식, 정영수와 현수현의 삶은 서진환과 박상준의 삶과 울타리 안팎으로 분화됐다. 그리고 울타리에서 밀려난 이들은 중공업도시에서도 외부로 밀려나거나 스스로 떠난다. <한겨레> 설문에 응한 중공업도시 청년 11명 가운데 5명은 지역을 떠나서 살고 싶어했고, 또 같은 수가 다른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했다. 거제의 20대 청년은 2011년 2만9530명에서 올해 11월 2만5265명으로 8년 만에 4천명 넘게 줄었다. 거제 전체 인구에서 20대가 차지하는 비율도 같은 기간 12.7%에서 10.2%로 떨어졌다. 창원도 마찬가지다. 2011년 창원의 20대 청년은 14만9187명이었다. 하지만 지난 11월 통계를 보면 1만4천여명이 줄어 13만4442명이 됐다.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같은 기간 13.7%에서 12.8%로 떨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취업 현장에 뛰어든 스물여섯살 노동자 김근완은 조선업 호황의 끝물에 거제로 끌려왔다가 대우조선 위기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밀려갔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근완은 스물한살 때 대우조선에 일자리를 얻었다. 이미 불황이 시작된 조선소에는 엄연한 계층이 존재했다. “1차 하청은 조금 편한 일을 하고, 힘든 일은 2차 하청에 넘기죠. 결국 물량은 2차 하청에서 뽑아요.”

 

무너질 때도 힘든 일을 하는 약한 곳부터 무너졌다. “대우조선 사태 터졌을 때 제일 먼저 나가떨어진 게 3차 하청, 그다음이 2차 하청이고, 1차 하청은 아직도 살아남아 있어요.” 그는 대우조선이 위기를 겪었던 2015년 제조업 공장 도시인 경기 안산으로 이주해 반도체 공장으로 이직했다. 하지만 이곳도 “베트남으로 공장이 많이 이동하고 불량이 터지면서” 불황이 왔다. 최근 아빠가 된 김근완은 거제에서 안산으로 이주했던 것처럼 또다시 이주할 곳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불황 속 중공업도시는 울타리 안 일부만 남기고 청년들을 울타리 밖 하청이나 도시 외부로 밀어내고 있다. 그래도 중공업도시의 청년들은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헤드기어나 글러브 같은 보호장구 하나 없이 ‘알바’나 ‘하청’이라는 홑겹을 두른 채.

 

서혜미 김윤주 강재구 김혜윤 기자 h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