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임헌영 선생님 글 「4월혁명 60주년과 오늘」을 읽고

  • 기자명 강진욱
  •  
  •  승인 2020.03.07 12:26
  •  
  •  댓글 1
  •  
  •  
 

[4월혁명 60주년과 오늘(1) : 갈리아의 수탉]에 대한 의견글

편집자 주 : 지난 번 시작한 "4월혁명60주년과 오늘" 연재 첫글 임헌영 선생의 <갈리아의 수탉>에 대해 강진욱님께서 의견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임헌영 선생은 강진욱님의 글에 대해 "자칫하면 4‧19자체를 반혁명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데, 4월혁명 그 자체의 위대성을 미국의 전략으로 오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이승만을 퇴진시키려고 한 것은 곧 4월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부분도 알려드리며, 강진욱님 글을 소개합니다. 

“많은 이들이 절박함 속에 나라의 앞길을 염려해야 하는 아수라판에 지난 시절의 투쟁을 영웅담처럼 자화자찬하는 한가함으로 4월혁명을 맞을 때는 아니다.”

1.
이 말씀에 용기를 얻어 ‘4월혁명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말씀을 감히 드리고자 합니다. 4․19에 무슨 진상이냐 하시겠지만, 누가 / 어떻게 / 왜 4․19 혁명을 좌초시켰는지를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입니다. 
‘누가 / 왜’ 4․19를 좌초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4․19는 5․16로 좌절됐고, 5․16 쿠데타 뒤에는 미국이 있으며, 미국이 쿠데타를 방조한 것은 친미친일의 극우반북(반공) 정권을 조작해 이 땅의 분단체제를 고착화시키려는 목적이었죠.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입니다. 저들이 이 땅의 분단체제를 고착화시키기 위해 어떤 짓을 벌이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외세의존의 독재세력에게 거듭 농락”당하는 것은 역사의 고비마다 교묘하고 작동하는 저들의 악랄한 간계(奸計) 때문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어떻게 4․19를 좌초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제대로 얘기한 바가 없기에 저의 판단으로 말씀드리자면, 4‧25 교수데모와 4․26 이승만 하야성명, 4‧28 이기붕 일가 몰살 및 이승만의 경무대 축출은 이승만 정권을 떠받치던 자들이 벌인 ‘역공작’ 즉 반혁명(counter-revolution) 공작이라고 봅니다. 
우리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 자신들이 지탱하는 분단체제가 무너지기 전에 미리 김을 빼 그 지배체제를 보전한 것이지요. 4․19에 대한 반혁명은 5․16이 아니라 4․19를 좌초시키는 단계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4․19는 혁명화하기 전에 이미 반혁명으로 무너졌습니다. 해방이 일제의 패망으로 허망하게 주어진 것처럼, 이승만 하야도 우리가 쟁취한 것이라기보다, 미국의 반혁명공작이 만들어낸 신기루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4․19 반혁명’입니다.
실제로, 주한미대사 매카나기는 4월 19일과 21일, 26일 세 차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나 “당신 때문에 우리의 아시아 군사기지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차하면 반혁명 공작에 나서겠다는 속셈을 미리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죠. 
물론 저들의 요구대로 이승만이 순순히 물러났다면 굳이 반혁명 역공작이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이승만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지요. 반공포로를 석방해 미국의 휴전협상을 방해하고, 동·서·남해안에 ‘이승만 라인’을 그어놓고 일본 어선과 어부들을 마구 나포해 한일관계정상화를 바라는 미국을 아연 질색케 한 장본인 아니었습니까.

2.
돌이켜 보면, 3‧15 부정선거 국면에서 4․19 민중 봉기에 이르는 시기는 우리 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 4․19 과정 전반이 미국의 주도면밀한 관리와 통제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미국의 ‘자산’(asset)이었던 국방장관 김정렬이 이기붕과 이승만을 차례로 만나 이기붕의 부통령 사퇴 성명을(4.23) 이끌어냄으로써 4․19 국면은 사실상 일단락됐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의 사퇴로 사태를 일단락 짓고 이승만 체제를 용인하려 했습니다. 
다음날인 4월 24일(일요일)부터 월요일인 4월 25일 이른 오후까지는 이렇다 할 시위도 없었고, 4월 24일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는 각 시장 주관으로 4․19 희생자 위령제가 거행됐습니다. 시위가 진정됐다는 판단 아래 국회는 4월 26일 새벽 5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한 단계 낮추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4월 25일 오후 늦게 대학교수 258명이 가두시위를 벌여 데모의 불씨를 되살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4월 24일 이승만이 ‘자유당과 결별하고 국정에만 전념한다’는, 사실상의 ‘하야 거부’ 성명을 발표할 때 미국이 이승만 하야 공작에 착수했다고 봅니다. 
교수데모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도 “교수 시위 자체가 미 대사관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고 리영희 선생님의 회고록『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2005)에서였지요. 리영희 선생도 교수 데모에 대해 “미국 측의 시사를 받아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시며 ‘기회주의적 행동’이었다고 지적하셨구요.
이승만은 미국의 거듭되는 전방위 압박에 굴복해 하야성명(4․26)을 발표한 뒤에도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야성명 첫 문장에 “국민 모두가 원한다면”(If it is the wishes of the whole people)이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이를 본 매카나기가 “국민들의 뜻을 어찌 물으시겠다는 겁니까”하고 물었구요. 이승만은 성명을 발표한 다음날(4.27) 국회에 사임서를 내지 않으려 버텼습니다. 결국 냈지만 ...

3. 
이승만 체제를 깨끗하게 종식시키면서 우리 민중의 혁명 열기에 찬물을 끼얹어 미국이 지탱하는 반공분단체제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필요했습니다. 미국의 이 ‘반혁명 공작’의 제물이 바로 이기붕 일가였다는 생각입니다. 
교수 시위가 끝난 뒤인 저녁 7시경 일단의 폭력 시위대가 서대문 이기붕 사저로 몰려갔습니다. “부통령에서 사퇴했는데 설마 날 죽이기야 할려구”하며 집을 떠나지 않으려던 그에게 누군가 계속 전화를 걸어 “빨리 피하시라”고 재촉했습니다. 이들은 포천 6군단으로 피신했습니다. 
폭력 시위대는 이들이 떠난 빈집에 난입해 가재도구들을 끌어냈고 4월 26일 오전 8시경 불을 질렀습니다(집인지 가재도구인지 불명). 그리고 이기붕 일가를 포천 6군단에서도 쫓아내는 작전이 시작됩니다. 당시 미1군 참모장 샌더스(Sanders) 준장이 강영훈 6군단장(중장)에게 “당신이 왜 그 사람을 보호하느냐”고 힐난했답니다. 
조금 뒤 누군가 6군단에 전화를 걸어 ‘이기붕네 집이 불타고 있다’며 친절하게 알려주고, 6군단 관계자들이 이기붕 일가에게 이 불길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신네들 갈 곳이 없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또 전화가 걸려와 ‘사람을 보냈으니 그들을 따라 가라’고 했답니다. 결국 이기붕 일가는 4월 26일 저녁 “계급장도 없는 작업복 차림으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검정색 지프를 타고 온 청년 넷”을 따라 6군단을 떠났습니다. 이들의 행방이 묘연해진 지 하루 반나절 뒤인 4월 28일 아침, 이들이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의 별관에서 모두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계엄사 발표가 나옵니다. 
비상계엄이 연장돼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출동했지만 폭력 시위대가 26일 오전 8시경 이기붕의 사저에서 가재도구에 끌어내고 불을 지르는 것을 수수방관했습니다. 이런 사태 속에서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와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 및 이들과 내통하던 군·관·민 인사들이 연이어 경무대로 가 이승만의 하야성명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도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나려 하지 않자 ‘경무대에서 이기붕 일가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발표가 나오고 이승만이 황망히 경무대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기붕 일가의 시신이 경무대에서 발견됐다는 계엄사 발표에 앞서 “이승만이 경무대를 ‘걸어서’(도보로) 나가려 한다”는 괴소문이 국회에 퍼져 소동이 일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충격과 공포로 법석을 떠는 가운데 이승만은 이날 오후 1시 황망히 경무대를 나와 사저인 이화장으로 이사했습니다.

[국회에서 이 대통령의 사퇴서가 수리된 후에도 이 박사는 이화장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 그러나 28일 새벽 이기붕 씨 일가의 자살을 보고받은 이 박사는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이화장으로 향했다 ... 이렇게 해서 10년 독재의 이 박사는 극적인 사임을 했던 것이다.](「한 시간만 늦었더라도 ... 하야. 망명 비화」<경향신문>1965.7.20)

4․19 당일부터 이틀, 4․25 하루 이기붕 일가가 피신했던 포천 6군단의 군단장 강영훈(姜英勳)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4·19 혁명은 19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28일 이화장으로 물러나면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실제는 4월28일 새벽 경무대 부속 가옥에서 이기붕 국회의장 일가족이 자결하면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 전 총리」<신동아> 2008.7.25)

▲ 집단 가족자살로 오욕의 삶을 끝내기 전의 이기붕 일가 모습. 왼쪽부터 장남 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강욱[사진 : 인터넷 캡처]
▲ 집단 가족자살로 오욕의 삶을 끝내기 전의 이기붕 일가 모습. 왼쪽부터 장남 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강욱[사진 : 인터넷 캡처]

이기붕 일가의 ‘자살 소식’은 모두에게 숙연함을 강요했고 더 이상의 데모 열기 따위는 없었습니다. 4․19 혁명의 열기가 ‘4․19 반혁명’으로 꺾인 것이지요. 그리고는 미국이 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정권이 또 - 자유당에 이어 민주당이 - 집권했습니다.
그렇게 혁명의 열기를 꺾은 ‘4․19 반혁명’의 기운은 5․16을 계기로 증폭돼 이승만 시대를 능가하는 박정희의 분단파쇼체제가 구축됩니다. 그로 인한 역사적 퇴행은 1979년 박정희가 죽고, 박정희 체제를 숙주로 성장한 또 하나의 친미반공 파쇼체제인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미국의 ‘4․19 반혁명 공작’은 미국이 키운 밀리터리 보이 셋이 차례로 대통령을 해먹는 장구한 분단파쇼 체제의 서막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4․19 반혁명’의 기운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박근혜의 하야도 이승만의 하야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촛불항쟁으로 쟁취한 한 송이 희망의 꽃이었던 문재인 정권이 4월의 꽃샘바람 앞에서 휘청거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4․19 60주년에 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은 바로 이런 물음이 아닐런지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