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노동재난연대기금 제안한 권영숙 대표

“국가가 모두에게 지원금 줬더라도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나눠 갖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코로나 재난은 평등하지 않고
중산층·정규직 노동자는 비켜가
소비 촉진하는 마음 이해하나
고통받는 재난 난민과 연대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성공을
이젠 사회적 연대로 이어가야”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코로나19 위기를 더 안전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은 의료 노동자와 물류 노동자의 헌신적인 노동 덕이죠. 그렇다면 코로나로 노동재난을 겪고 있는 약자들과 사회적 연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코로나19 위기를 더 안전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은 의료 노동자와 물류 노동자의 헌신적인 노동 덕이죠. 그렇다면 코로나로 노동재난을 겪고 있는 약자들과 사회적 연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노동자들의 파업기금을 사회적으로 마련하자는 ‘연대’ 운동(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9년째 해오고 있는 대학 선생이 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는 “코로나 재난은 불평등하다”며 해고와 무급휴직, 실업 대란을 겪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등을 지원하기 위한 ‘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를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원효로의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만났다.

“‘과연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을 정도로 당신은 긴급재난 상태였나요?’라고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오래된 선풍기 두대가 장맛비로 후텁지근해진 실내 공기를 말리고 있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사무실은 단체 유지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상근자를 두지 않는 단체답게 둘러앉을 수 있는 기다랗고 좁은 탁자 몇개와 의자 외에는 아무런 집기가 없었다. 풍경은 단순했지만 각종 소리는 넘쳤다. 빗물을 가르느라 증폭된 차바퀴 소리와 굵은 빗소리가 활짝 열어둔 출입문과 창문으로 밀려들었다. 권영숙(55·이하 호칭 생략) 사파기금 대표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나직했지만, 주변 소음을 다 눌렀다. ‘노동’을 말하는 절박함과 ‘연대’를 호소하는 진심의 힘이지 싶었다.

 

―노동재난연대기금 모금은 잘되고 있나요?

 

“여러 분위기를 고려할 때 쉬울 거라고 판단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국가가 처음으로 뭔가를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어서 나도 쓰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들이 있고요. 그리고 이 돈을 쓰면 소상공인들에게 돌아가고 결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재난지원금 사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도 있거든요. 그러나 저희는 코로나가 노동재난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른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차원에서 액수나 규모에 관계없이 이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아주 저조하지는 않아요. 첫 한달 동안은 하루에 100만원 정도씩 들어왔어요. 지금까지 4천만원 정도가 모였어요.

 

재난지원금 기부, 예상치의 1%에 그쳐

 

사파기금은 지난 4월 말 “코로나19의 재난 앞에서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재난연대기금을 조성”하자며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을 제안했다. 이들은 제안서에서 “코로나19의 경제적 타격이 서서히 몰아치기 시작하는 지금, 코로나19는 ‘노동재난'이 되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해고, 무급휴직, 실업 대란이 노동의 가장 약한 고리인 비정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거세게 덮치고 있습니다”라며 “국가로부터 전국민이 받게 되는 긴급재난지원금을 일회적인 가처분소득으로 사용하지 말고, 사회적 노동 약자와 민중을 위한 노동재난연대기금으로 조성하”자고 호소했다. 5월1일부터 시작된 모금은 7월 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조성된 기금은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이주노동자 지원, 노동활동가 지원, 코로나19 국제연대에 사용할 예정이다.(신청: vo.la/0TZ0, 직접 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보통 기금을 모금할 때는 낮은 자세로 읍소전략을 많이 취하는데 노동재난연대기금은 ‘연대는 원조나 시혜가 아니라 의무’라는 식으로 좀 강해요.

 

“윤리적으로 부담을 안겨주는 얘기죠. 사람들이 보통 코로나19는 나에게도 재난이라고 쉽게 생각하죠. 왜냐하면 나도 언제든 걸릴 수 있는 전염병이거든요. 우리 사회의 사회안전망은 부실하기에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 돈을 더 확보하자는 분위기가 강하죠. 그런 모습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긴 해요. 그러나 이 재난은 기본적으로 중산층이나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켜 갑니다. 실제로 이들은 대부분 긴급재난지원금을 공돈이라고 생각하고, 자전거를 사거나 와인을 사고 비싼 한우를 사 먹는 데 썼잖아요. 그들에게는 결국 이 돈이 긴급재난 구호금이 아니었고, 생활비는 그만큼 굳었으니 그 돈을 연대기금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확실히 윤리의식을 자극하는군요.(웃음)

 

“‘과연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을 정도로 당신은 긴급재난 상태였나요?’라고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긴급재난지원금을 정부가 모두에게 준다고 했더라도 내가 긴급재난 상태인지, 자칫 누군가의 몫이 되어야 할 돈을 결국 조금씩 다 나눠 갖고 있는 게 아닌지, 과연 이것이 실효적 재난지원금인지를 각자 한번씩 생각했어야 한다고 봐요. 우리 사회가 다른 나라보다 안전하게 코로나 사태를 지나가고 있는 것은 의료 노동자와 택배 노동자 등 누군가의 노동에 힘입은 거잖아요. 그렇다면 방역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사회적 연대로 이어가야죠. 긴급한 재난을 겪는 재난 난민에게 지원금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국가가 비록 모두에게 주더라도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기금을 조성해서 재난 난민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연대해야죠.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률은 가구수 기준으로 99.5%(6월7일 집계)였다. 정부가 주도해 받은 기부는 전부 합해 15만5700여건, 액수로는 282억여원이었다. 정부는 애초 전체 긴급재난지원금(14조2884억원)의 20%인 2조8천억원 정도의 기부를 예상했다. 실제 기부금은 예상치의 1% 수준이다.

 

“단위노조 수십억원 기금 왜 쌓아두나”

 

―긴급재난지원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서 이미 다 썼을 것 같아요. 모금이 사실상 끝난 것 아닌가요?

 

“사회연대기금의 취지에 공감한다면 재난지원금은 썼더라도 개인 돈을 내면 되죠. 굳은 생활비가 있잖아요. 사회적 연대로 나아가는 실천의 한 방식을 제안한 것이니 지금이라도 참가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모인 돈은 상대적으로 적은데 쓸 데는 많아 보여요.

 

“그건 큰 걱정 안 해요. 돈을 모으지만, 이런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거든요. 돈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죠. 자본주의에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자체가 부패의 첩경이라고 보기에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가 그런 방식의 기금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파기금이나 재난기금으로 아무리 돈이 많이 모여도 근본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다만, 참여자들이 많으면 우리 사회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죠. 사파기금이나 재난기금은 그렇게 가는 징검다리이자 마중물일 뿐이죠.”

 

사파기금은 ‘사파동행’과 ‘사파 작은 희망버스’라는 제목으로 현장 연대 집회도 꾸준히 열어왔다. 2015년 12월15일 삼척 동양시멘트 비정규 해고 노동자들의 서울 광화문 삼표 본사 앞 농성장에서 벌인 3차 사파동행 집회에서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사파기금 제공
사파기금은 ‘사파동행’과 ‘사파 작은 희망버스’라는 제목으로 현장 연대 집회도 꾸준히 열어왔다. 2015년 12월15일 삼척 동양시멘트 비정규 해고 노동자들의 서울 광화문 삼표 본사 앞 농성장에서 벌인 3차 사파동행 집회에서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사파기금 제공

―연대하기 위해 모금하지만 그것이 해법은 아니라고요?

 

“네. 그래서 돈이 적게 모이는 데 대해 실망하지 않아요. 우리가 하는 일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거든요. 사회적 연대운동을 하면서 실망하는 부분도 물론 있어요. 인간이란 어디까지 연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점이죠. 사파기금도 그 점에서는 솔직히 끊임없는 실망의 과정이었어요. 사파기금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당장의 소방수 구실을 했고, 누군가에겐 민주노총보다 더 가까웠던 존재이기도 했죠. 그러나 제가 실망한 것은 노동자들이 자기 투쟁 이상으로 연대를 바라보지 않는 점이에요.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연대를 갈급해하지만, 연대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그들은 싸움에서 이겨 승리로써 연대에 값하겠다고 말하곤 하죠. 그러면 저는 그렇게 말해요. ‘당신들의 승리로 연대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투쟁을 끝내고 전체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게 빚을 갚는 겁니다’라고요. 자기 투쟁을 넘어서 노동운동 전체,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한국의 노동하는 사람 전체를 바라보는 게 연대거든요.

 

”권영숙은 2011년 7월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위해서, 그리고 불가피한 파업 및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한 강한 긍정의 표시로, 사회적 파업기금의 조성에 나서”자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부산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고공농성 투쟁을 지원하는 2차 희망버스를 다녀오는 차 안에서 구상한 내용이었다. 지금은 줄었지만, 한때 매달 1만원씩 내는 계좌가 1천개에 이르렀다. 사파기금은 돈을 쌓아두지 않고, 들어오는 대로 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투쟁 현장 등에 투쟁기금을 전달해왔다. 지난 25일 비정규직이제그만(코로나19 비정규직 긴급행동)의 ‘죽음과 해고를 멈추는 40리길 걷기’에 500만원을 지원한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모두 77차례 투쟁 현장에 기금을 지원했다.(국민은행 012501-04-230250 사회적파업연대기금, CMS 신청: http://bitly.kr/n4Hj)

 

―사파기금은 올해로 벌써 9년째이군요.

 

“사파기금은 우리 사회 최초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였어요. 노조가 아닌 사회적 연대로 파업기금을 만들어서 꾸준히 하는 것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고요. 2011년에 사파기금을 만들 때는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저는 사파기금은 빨리 없어져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민주노총의 단위노조가 수십억원씩 돈을 쟁여놓고 있는데 그것을 다 환수해서 전국적인 노동계급 파업기금을 만들면 되거든요. 그래야 노조 없는 노동자도 싸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얼마 안 되지만 사파기금도 내놓겠다고 했죠. 민주노총이 응당 해야 할 일이기도 한데 하지 않더군요. 노동자들이 직접 맡아서 해주길 바랐는데 그것도 안 됐고요. 그러니 제가 작은 힘이라도 계속할 수밖에 없죠.”

 

2011년 7월 출범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 지금까지 모두 77회에 걸쳐 노동 투쟁을 지원했다. 지난해 12월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차려진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농성자들에게 무릎담요 500개 중 일부를 전달하는 모습. 왼쪽 셋째가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 사진 사파기금 제공
2011년 7월 출범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 지금까지 모두 77회에 걸쳐 노동 투쟁을 지원했다. 지난해 12월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차려진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농성자들에게 무릎담요 500개 중 일부를 전달하는 모습. 왼쪽 셋째가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 사진 사파기금 제공

“나는 아직 ‘80년대’ 살아가는 구좌파

 

1983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한 권영숙은 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이른바 86세대(80년대 학번의 1960년대생들)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일간지(<한겨레신문>) 기자로 6년간 있다가 늦깍이 공부를 시작해,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찰스 틸리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노동계급 없는 자유민주주의: 한국의 민주화, 동맹정치, 노동운동, 1987~2006’)을 쓰고 2008년 귀국했다. 스탠퍼드대학교 출판부가 곧바로 박사논문의 출판을 제의했을 정도로 학계의 평이 좋았다. 그는 현재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있으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인권과 노동사회학, 정치사회학 등을 강의해왔다.

 

―정규직으로 자리잡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비정규직 교수로 있어요. 노동 투쟁 현장에는 빠지지 않고요.(웃음)

 

“귀국했을 때 연구자로서 공부에 전념하면서 얌전하게 살 수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연구자로서 학문을 하는 것이 80년대 이후 제가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도 봤어요. 그런데 한국에 왔을 때 용산참사가 막 터졌어요. 그리고 얼마 뒤 평택에서 쌍용차 투쟁이 있었고요. 노동현실이 제가 한국을 떠날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더군요. 그 두 사건이 제게 준 문제의식이 커서 학교에만 안주할 수가 없었어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던 거죠.”

 

―법학에서 노동으로 전공을 바꾼 것도 특이해요.

 

“1992년 기자를 관두니까 사법시험을 봐서 인권변호사가 되라고 조언하는 지인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저는 1980년대의 뜨거웠던 변혁운동이 왜 실패했는지, 이른바 86세대가 왜 운동의 길을 만들지 못하고 스스로 변혁의 꿈을 폐기했는지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싶었어요. 오랜 공부를 통해 한국사회의 문제는 노동을 배제했던 결과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진단할 수 있었죠. 이를테면, 1980년대 초반 담론이었던 삼민, 즉 민주와 민중, 민족 가운데 지금 민주만 남았죠. 그런데 민족 문제는 모두가 고민하고 있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가 될 것 같은데, 민중, 그리고 나아가 계급은 아예 사라지고 없어요. 저는 삼민의 꿈을 꿨던 80년대의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저는 구좌파입니다. ‘86세대’만 남고, 80년대는 사라진 지금, 그때의 생각을 이런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두죠.”

 

―앞으로 계획은요?

 

“연구자와 활동가 이 두가지 모두 저의 현재 정체성이라고 봐요. 사파기금을 통해서 노동과의 연대와 연결을 모색하는 한편 연구자로서의 활동도 꾸준히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가 던진 질문이 신문사로 돌아오는 동안 머릿속에서 내내 맴돌았다. 나는 과연 코로나 긴급재난에 처했던가. 나는 어떤 연대를 했던가. 컴퓨터를 켜고, 지원금 받은 계좌를 열어 노동재난연대기금에 접속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