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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D-7’ 김진숙 “떠난 동지들 이름 부르며, 그들 일터 가보고 싶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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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까지 D-6일 ‘35년 해고자’ 김진숙 인터뷰 

2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의 복직촉구 기자회견 종료 후 김진숙씨가 전태일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의 복직촉구 기자회견 종료 후 김진숙씨가 전태일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35년 전 돌아간다면…잘리고 타는 죽음 속에 노동운동 또 선택할 것 

올해 한진중공업 정년퇴임
죽음 넘겨 살아남은 동료에
부러움과 함께 울컥한 마음
 

‘사랑하는 OOO 아버지 정년 퇴임을 축하드립니다. 30년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지난 23일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 현수막이 걸렸다. 아버지의 정년을 축하하며 남긴 어느 자녀들의 메시지였다. 이날은 한진중공업의 정년 퇴임식 날이었다. 동료들이 꽃다발과 함께 공장을 떠난 이날,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60)은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40년 전 쥐똥 섞인 도시락이 아니었다면, 넝마 같은 작업복이 아니었다면, 잘리고 터지고 타죽는 죽음들이 아니었다면 저도 저 자리에 있었을까요.”

만 60세, 정년을 약 일주일 앞둔 김 위원을 23일과 24일 두 차례 전화로 만났다. 두번째 암 수술 뒤 병원 치료 중인 그는 ‘내 발로 걸어나오기 위한’ 마지막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왼쪽부터) 39년 전 입사 무렵, 10년 전 단식투쟁, 9년 전 희망버스

(왼쪽부터) 39년 전 입사 무렵, 10년 전 단식투쟁, 9년 전 희망버스

■마지막 복직 투쟁 

어용노조 비판하다 해고 뒤
끝모를 싸움에 암투병까지
복직 후 내 발로 퇴임하는 건
인간의 명예 회복이에요
 

첫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김 위원은 운동 중이었다. 복직 투쟁이 아니더라도, 그는 암과의 사투로 이미 바빴다. “매일 저녁 산책을 해요. 하루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답답하거든요.” 

아침 6시면 의료진이 혈압과 체온을 재러 온다. 아침 식사를 하고, 고주파치료나 뜸 등 오전 치료에 들어간다. 점심을 먹고 병원 내 시설에서 오후 운동을 잠시 한 뒤 오후 치료를 받는다. 약 처방을 받고 주사도 맞는다. 오후 6시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운동 시간이 돌아온다. 병원의 일정은 빡빡했다. 그는 “환자들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하러 오는 것”이라며 웃었다.

김 위원은 1981년 한진중공업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용접사로 입사했다. 5년 뒤인 1986년 7월 해고됐다. 어용노조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동료들에게 배포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대공분실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노동운동가로 현장을 지켰다. 2011년 한진중공업 대량해고에 반대하며 40m 높이 크레인에 올랐다. 시민들의 5차례 희망버스 연대에 힘입어 해고자들은 모두 복직됐지만 김 위원만 복직하지 못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는 2009년과 지난 9월 두 차례 김 위원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하고 사측에 복직을 권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2018년 암 진단을 받고 첫 수술을 했다. 수술 뒤 각종 후유증으로 온 몸이 아팠다. 우울증으로 한동안 칩거하던 그는 지난해 12월 부산에서 대구까지 130㎞ 도보 행진에 나섰다.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로 고공농성 중이던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그 친구를 위한 게 오히려 나를 위한 치유의 과정이었어요. 다시 힘 얻고 복직 투쟁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죠.”

지난 6월 ‘마지막 복직 투쟁’을 선언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투쟁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35년간 복직의 꿈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던 지난 11월 암이 재발했다. 2차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내년 1·2월 항암치료와 3월 3차 수술을 앞두고 입원 치료 중이다. 그는 병원에서도 ‘내 발로 걸어나오기 위한’ 복직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조선소) 동료 아저씨들하고 한 번 인사도 하지 못하고 끌려나왔어요. 인간이 자존감이 있는데, 강제로요. 그런 일을 겪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한 공장입니다. 저는 제 발로 나오고 싶어요, 진짜. 이건 명예회복이에요.”

동료들의 퇴임식을 보는 마음도 복잡했다. 그는 “한진에서 정년 퇴직을 한다는 것은 산재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가운데 여러 고비를 넘어 살아남았다는 것”이라며 “부러운 마음까지 더해져 마음이 울컥했다”고 말했다.

지난 19일에는 김 위원 복직을 촉구하는 ‘희망버스’ 400여대가 부산에 모였다. 2011년 전국에서 부산으로 집결한 희망버스가 9년 만에 다시 모인 것이다.

“저는 2011년에는 크레인에 있어서 못 만나고 이번엔 병원에 있어서 못 봤는데 코로나19 위험에도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와주셨어요. 2011년에는 정리해고가 전국적 이슈였지만 이번에는 제 복직 하나잖아요. 저 한 사람을 위해 모아준 마음이 너무 고맙죠.”

(왼쪽부터) 309일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5개월 전 복직투쟁 선언, 3일 전 삼보일배

(왼쪽부터) 309일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5개월 전 복직투쟁 선언, 3일 전 삼보일배

■“35년 전 돌아가도 노동운동” 

그는 용접공 ‘아저씨들’을 참 좋아했다. 일을 마치고 누우면 아저씨들 얼굴이 천장에서 왔다갔다 했다. 모두들 가수 조용필과 혜은이를 좋아할 때 김 위원은 아저씨들을 따랐다. 그의 성실함과 노동자다움은 모두 그 아저씨들에게 배운 것이라고 했다. “용접공 일이 그렇게 좋았어요. 그러니 그 힘든 일 하면서 버텼겠죠.”

복직이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박창수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등 세상을 떠난 동지들의 이름을 하나씩 말하며 그들이 일했던 현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35년이 흘렀으니 현장은 많이 바뀌었겠죠. 그런데 저는 박창수 위원장이 일했던 곳을 보고 싶어요. 아직도 동지가 일하던 모습이 내 머릿 속에 남아있거든요. 장례식도 치르고 산에 묻히는 것도 다 봤고, 삽으로 흙을 떠서 덮어주기까지 했어요. 그들도 얼마나 공장에 돌아가고 싶었겠어요. 동지들 대신 고향 가듯 다 한 번씩 가보고 싶어요.”

그는 35년 전, 20대의 김진숙으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간 겪은 일보다 더 지옥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노동운동 하면서 자존감을 찾았어요. 쥐똥 섞인 도시락 먹고 화장실도 없어 여기저기서 똥오줌 싸는 사람이 무슨 자존감이 있어요? 그 대가로 가난이 돌아오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현장에 있을 때에도 부유하지 않았거든요. 새우깡 사먹는 돈도 아까웠어요. 내 목소리 내고 사는 삶이 훨씬 행복해요. 다시 태어나도 노동운동 할 겁니다.”

■“‘버티라’는 말도 죄송” 

취업조차 힘든 비정규 20대
당당하면 곧 해고되는 세상
버티라는 말조차 죄스러워
복직 완수 뒤 힘찬 응원할 것
 

가혹한 1년이었다. 코로나19는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의 표현대로 ‘당당하고 노동자답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비정규직이 너무 많아요. 당당함과 노동자다움을 내세우는 순간 해고되는 분들이죠. 현대건설기계 사내하청 서진에서는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집단해고했어요. 농성 중인 서울 LG트윈타워의 청소노동자들도 마찬가지고요. ‘노동존중사회’라는데,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요.”

김 위원은 스물여섯의 나이에 해고됐다. 2020년의 스물여섯들은 일자리를 잃을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그들을 떠올리면 긴 한숨이 먼저 나온다. “하…. 저 때만 해도 일은 힘들었지만 정규직이었어요. 차별의 설움이 있어도 관리직과의 차별이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격차가 더 벌어졌어요. 청년들이 사회 생활을 비정규직으로 시작하고, 차별부터 몸으로 느끼잖아요.”

그래서 ‘버티라’는 말도 죄스럽다고 했다. “제가 복직을 완수했더라면 더 힘찬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드릴 수도 있었을텐데.”

지난 10월 김 위원이 ‘옛 동지’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편지가 화제가 됐다. 그는 이 편지에서 “86년 최루탄이 소낙비처럼 퍼붓던 거리 때도 우린 함께 있었고, 91년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라는 투쟁의 대오에도 우린 함께였다”며 “어디서부터 갈라져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 걸까”라고 물었다. 답장은 없었다. 김 위원은 ‘촛불정권’의 진심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했다.

일러스트 | 김용민 화백

일러스트 | 김용민 화백

■35년째 묻는다, 어디로 가냐고 

김 위원은 2007년 쓴 책 <소금꽃나무>에서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침에 나온 곳과 저녁에 들어가는 곳이 매일 다른 삶’이 지겨워, 한 곳에 정착하고 싶어서였다. 2011년 고공농성을 하면서는 ‘새’가 되어 훨훨 날고 싶었다. 이 생각은 아직 유효할까. “지금은 나무든 새든 그냥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년을 며칠 앞뒀지만 사측은 여전히 그의 복직 요구에 요지부동이다. 해고기간 임금과 퇴직금 지급이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위원은 “모두 핑계”라며 “쌍용자동차, KTX 등도 노사 합의로 해고자들을 복직시켰지만 배임죄로 수사 받은 곳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 “12월 들어 조급했어요. 정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없어도 여러 동지들이 투쟁하고 계시고 노조에서도 ‘천천히 가자’고 하고 있거든요. 오히려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어요.”

2011년 고공농성 당시 김 위원의 휴대전화 통화 연결음이 멕시코계 미국 가수 티시 이노호사의 노래 ‘돈데보이(Donde voy·나는 어디로 가나)’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철탑 위의 그를 전화로 인터뷰한 기자들을 통해서였다. 미국의 멕시코 미등록 이민자의 애환을 다룬 이 노래는 9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통화 연결음이었다. 김 위원은 여전히 묻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2250600015&code=940100#csidx3035c883e2dc747bec20112b6f0f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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