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하루속히 통일될 수 있도록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를 바란다. 내가 언제 너를 만나게 될 지는 모르겠다. 만나게 되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지만 만나지 못하더라도 만난 것과 같이 잘 생활했으면 좋겠다. 국가에서 임무주는 것 잘 수행하라는 것 밖에 더 요구할 바 없다."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이 18일 미국대사관앞에서 이날 환갑을 맞은 북의 아들 박동철을 위해 반미1인시위를 벌였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이 18일 미국대사관앞에서 이날 환갑을 맞은 북의 아들 박동철을 위해 반미1인시위를 벌였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분단된 조국에서 87살의 아버지가 환갑을 맞은 북의 아들에게 전하는 기막힌 축하메시지이다. 

박동철.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의 외아들이다. 2월 18일은 아들 동철의 환갑이다.

서울에 있는 아버지는 이날 광화문 광장 미국 대사관 앞에서 평양에 남겨 두고 지금껏 보지못한 북의 아들 환갑을 축하하는 기가막힌 1인 시위를 벌였다.

6개월째 진행중인 '아메리카 NO 국제평화운동(AmericaNO Int’l Peace Action)' 1인시위이다.

1962년 6월 1일 1년 4개월된 아들을 남겨두고 남파공작원을 귀환시키는 연락선의 기관장으로 파견되었다가 체포된 박희성 선생은 경기도 화성 남양만에서 오른 팔과 왼쪽 허벅지에 총 두발을 맞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우여곡절의 27년 수형생활을 했다. 

1988년 출소 후 험악한 남녘생활을 겪으면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몸과 마음을 추스렸지만 얼마전부터 강철의 심장에도 이상이 생겼다. 

지금까지 두번밖에 빠진 적이 없던 6.15산악회에 작년 11월부터 못다니고 있다. 즐거운 산행길에 공연히 심장마비가 오면 헬리콥터 부르고 다른 회원들에게 누를 끼칠 것 같아 못가고 있다는 것이 박 선생이 지켜온 인격이다.  

갓 돌을 넘긴 아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박 선생은 이날 환갑을 넘긴 아들에게 조국 통일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갓 돌을 넘긴 아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박 선생은 이날 환갑을 넘긴 아들에게 조국 통일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공연히 물었다. 아드님 한분 밖에 없냐고 했더니 "그거 하나. 그것도 겨우 사업하면서 생긴 아이기 때문에..."라며 헛헛한 웃음이 되돌아 왔다.

지난 설명절에는 처음으로 통일부에서 인사가 와서 이제 돌아갈 수 있을지 잠깐 기대도 생겼다.

"우리나라가 지금 남북이 꽁꽁 묶여 있는데,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첫 발자욱은 우리 19명 가려고 했지만 여덟분 돌아가시고 11명 남지 않았나. 그분들 돌려보내게 되면 물꼬가 트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되니까 하루속히 집으로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11명 남은 중에 두번째로 나이가 젊은데 지금 87살이다. 이제 오늘 내일 하지 않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가 있는 조국에 가서 살다 죽고 싶다는 희망이 있느니까 꼭 우리를 보내줬으면 좋겠다는 그것 밖에 없다."

박 선생이 자부심으로 기억하는 당생활에 대해 물었다. 1952년 5월 24일 지금은 민통선 안쪽이어서 찾아가기도 어려운 강원도 양구 문득리에서 화선입당했다. 당증번호는 '0466171'. 화선입당이란 후방에서 노동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중에 하는 것이라 전혀 다르다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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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갈 때 세포위원장에게 당증을 맡겨놓았다가 받아가곤 했는데, 반드시 돌아가 보고하겠다는 집념도 여전하다. 내년 2022년 5월 24일은 박 선생의 화선입당 70년이 되는 날이다.

그때 당증을 받아서 가슴에 다시 품고 보고하겠다는 결의가 열혈 청년을 방불케한다. 얼마전 돌아가신 박종린 선생이 1951년 화선입당했다고 한다. 

부인인 이정자 여사에 대해서 묻자 '얘기 엄마'라고 애틋하게 부르신다. 올해 나이로 82살. 다섯살 차이가 나는 부인과 당의 부름을 받을 때 황해남도 해주시 영당동에서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선이 생기기 전 38선이 지나던 곳이었다.

가족 소식을 들은 바 있느냐고 묻자 박 선생은 "내가 그런 걸 원치 않는다. 왜 그러냐하면 1962년 북에서 나올때 기준으로 모두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내가 여기 나와 있으니 당에서 다 보호해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 잘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만 있다"고 말했다.

양희철 선생(왼쪽)이 
양희철 선생(왼쪽)이 박희성 선생의 1인 시위에 함께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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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기자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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