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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기고] 백기완 선생님의 눈물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발행 2021-02-18 09:03:56
수정 2021-02-18 09: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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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다급한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선배는 선생님의 운명을 전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잠들 수가 없었습니다. 기어코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선생님이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5년 전 쯤, 민주노총에서 무슨 회의를 하던 중에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회의 중이었지만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선생님은 울고 계셨습니다.

2015년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백기완 선생 모습.
2015년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백기완 선생 모습.ⓒⓒ이정용.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내 동생 박래전의 유고시집 [반도의 노래] 중에 나오는 시 한 편을 읽으셨습니다. “어떡할려고 그러니 이노무 새끼들아/난 어떡하라고 두 형제가 다 유치장에 있어/나와라/나와서 이야기 좀 하자/어떡하란 말이냐”(박래전의 유고시 ‘어머니 말씀’ 중에서) 이 대목을 읽으시면서 우시는데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1986년 나는 감옥에 가 있었고, 동생은 노량진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고 있었습니다. 전두환 독재와 싸운다고 두 형제가 감옥에 가 있는 기막힌 현실, “래군아, 그런 래전이가 그러고도 몸을 불살라 죽었고…어머님 생각 많이 나서 전화했어. 바빠도 자주 찾아뵙고…” 당부의 말씀도 다 끝내지 못하고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만나실 때마다 어머님의 안부를 묻고는 하셨습니다.

동생 박래전은 1988년에 “광주학살 원흉 처단”을 외치면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뒤에 장례위원장을 맡으셨던 분이 50대의 백기완 선생님이셨습니다. 동생은 1987년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서 학생선거대책본부 일을 했고, 그런 동생을 선생님은 기억하셨습니다. 나는 동생의 장례식 그때부터 선생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사자후를 토하며 대중들을 격분시키는 천하의 백기완 선생님의 눈물을 나는 자주 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시대의 전사였던 선생님의 그 눈물을 기억합니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거리로 내몰린 철거민들의 아픔과 분노의 현장에서, 아이들을 잃은 세월호 엄마, 아빠들의 손을 잡아주고 돌아선 뒤에서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강인한 모습이셨지만, 그런 뒤에 흘리시던 눈물은 이 시대의 아픔입니다.

선생님은 늘 거리의 현장에 서셨습니다. 거리의 전사였습니다.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가 이어지던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봄까지 선생님은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던 촛불집회에 매주 나오셨습니다. 맨 앞자리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서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살을 에는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견디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젠 들어가셔도 된다고 말씀드려도 한사코 그 자리를 지키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그날의 집회장에 나오기 위해서 전날부터 물이며 음료수를 거의 마시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워낙 많은 인파가 운집하던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을 헤치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집회에 나오셨다가는 앓아누우셨다가 다시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나오시던 80대 노전사를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촛불집회 그때처럼 투쟁의 거리를 당신이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 지팡이를 짚고 지키셨습니다. 평생 소원이 거리에서 죽는 거라고 말씀하시고 온몸으로 실천하셨던 그 모습을 기억합니다.

 
2017년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규탄과 퇴진을 촉구하는 범국민 촛불집회 참석한 백기완 선생
2017년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규탄과 퇴진을 촉구하는 범국민 촛불집회 참석한 백기완 선생ⓒⓒ채원희.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운명하시기 2년 전부터는 아예 병원에 입원하셔서 밖으로 나오시지 못했습니다. 마침 세상을 덮친 코로나로 인해서 병문안도 여의치 않은 가운데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번갈아가며 병상에 계셨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1년 전부터는 목에 삽관까지 해서 목으로 말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손은 너무 떨렸습니다. 그런 손으로 병상에서 한 글자 한 글자에 당신이 남은 마지막 숨결까지 불어넣으며 써낸 글씨들을 봅니다.

“유월항쟁은 이제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김진숙 힘내라”
“노동해방”

몇 글자 되지 않는 저 짧은 글귀를 쓰기까지 1주일에서 2주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마지막 남은 힘마저 집중해서 써내셨던 그 글귀를 기억합니다. 저 글귀는 평소 선생님의 우렁우렁한 웅변의 말씀보다 더 진하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실 때까지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의지를 봅니다.

백기완 선생이 2020년 6월10일 병상에서 쓴 글, ‘유월항쟁은 이제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백기완’
백기완 선생이 2020년 6월10일 병상에서 쓴 글, ‘유월항쟁은 이제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백기완’ⓒ백기완 선생 장례위원회
백기완 선생이 지난해 7월에 복직투쟁에 나선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쓴 글씨
백기완 선생이 지난해 7월에 복직투쟁에 나선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쓴 글씨ⓒ백기완 선생 장례위원회
백기완 선생이 병상에서 힘겹게 남긴 글씨 중 하나로 지난해 11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보름에 걸쳐 쓴 ‘노동해방 백기완’
백기완 선생이 병상에서 힘겹게 남긴 글씨 중 하나로 지난해 11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보름에 걸쳐 쓴 ‘노동해방 백기완’ⓒ백기완 선생 장례위원회

앞자리에 앉아계신 것만으로도 힘이 되셨던 선생님이 이제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누굴 의지하고 투쟁의 길을 헤쳐가야 할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당장의 현안만이 아니라 멀리 큰 길을 걸어가는 우직한 발걸음을 한시도 늦추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모습, “역사의 허무주의와 싸워라”고 하시던 그런 말씀을 이제 누구에게서 들을 수 있을까요?

날로 쇠해지시던 노구의 선생님을 걱정하면서 거리의 투쟁 현장으로 불러내는 역할을 많이 했던 한 사람으로 89년 일생의 선생님을, 입관 때 평안히 잠든 듯한 모습의 선생님을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습니다. 선생님,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그 수고에 너무 많이 빚졌습니다.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선생님을 기억하며 선생님께 진 빚 갚기 위해서 더욱 분투하겠습니다. 역사의 허무주의에 빠져서 한탄하지 말라는 그 말씀 새기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쉬셔도 됩니다.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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