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한국전쟁기 불법 민간인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주로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 간부들이었다. 그런데 김포군 고촌면은 달랐다. 고촌면 치안대장과 주요 간부들은 인공 시기 부역행위를 한 당사자들이었다. 그랬던 이들은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하자 처벌이 두려워 치안대를 조직하고, 숱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들 치안대가 죽인 민간인 중 다수는 부역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촌공소 책임자 송해붕 선교사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공 때 부역행위를 한 부역자들이 한국전쟁 발발 전에는 악명높은 우익단체였던 대한청년단 고촌면단부 간부였다는 점이다. 치안대장 〇〇〇은 대한청년단 고촌면단부 부단장, 임범일은 고촌면 신곡리 영사정동단 부단장, 이진선은 향산리 하향산동단부 총무, 윤흥섭은 고촌면단부 감찰부장이었다. 이들은 우익에서 좌익으로, 다시 우익으로 변신해 결국에는 집단학살 가해자가 되었다. 양지만을 찾아 권력을 뒤쫓은 자들이었다.
한 살 아기가 부역을 했는가?
고촌면 치안대가 1950년 가을에 불법으로 학살한 사람들은 몇 명일까? 1기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학살된 민간인들은 최소 80명에서 최대 200명에 이른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보고서』)
"기곽도 나와." 1950년 10월 1일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향산리 기곽도 집에 고촌면 치안대원들이 들이닥쳤다. 기곽도 집이 부역자 집안이라고 누군가 밀고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곽도 집안의 이양순(1899년생)부터 기노현(1949년생)까지 총 12명이 굴비 엮듯이 묶여 면사무소 양곡창고로 끌려갔고 그곳에 구금됐다. 두 번에 걸쳐 연행됐는데 당시 기노정(1948년생)은 양할머니의 치마 품에 숨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고촌면사무소 양곡창고에는 신곡리, 전호리, 풍곡리, 향산리 주민 80명 이상이 구금됐다. 치안대원들은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고문했는데 연행자의 손을 묶은 채 거꾸로 매달아 매질하고 물고문했다.
치안대원들은 10월 11일부터 구금자들을 김포경찰서로 이송한다며 양곡창고에서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김포경찰서로 가기 전 천등고개에서 죽음을 맞았다. 12일 새벽 0시에는 송해붕 신부와 6명이 천등고개에서 총 맞아 죽고 방공호에 묻혔다.
그로부터 며칠간 치안대원들은 최소 80명에서 최대 200명의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했다. 기곽도 집안에서 끌려간 12명도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 중에는 한 살 아기 기노현과 6세 기노응도 있었다. 백 번 양보해 천등고개에서 죽은 이들이 부역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한 살 아기는 무슨 죄인가. 결국 한 가족을 몰살하려는 구차한 변명이다. 아니 변명거리도 되지 못한다. 기곽도 집안에서는 총 12명이 죽었는데 이들을 가계도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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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명이 학살당한 김포군 고촌면 기곽도 가계도 |
ⓒ 박만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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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군에서는 기곽도 집안처럼 한 가족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김포군 하성면 마곡리 강범수 집안에서는 노인·여성·어린이를 포함해 총 37명이 학살되었다. 학살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950년 가을 군·경 수복기와 1951년 1.4 후퇴 직전에 가족들을 싹쓸이했다. 이런 불법연행과 학살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집안 간의 갈등과 재산 갈취도 있었다.
가해자와 한마을에서 수십 년을 살아
기노정(74세, 경기도 김포시 고천면 향산리)은 6.25 당시 집안 할머니의 치마 속에 숨어 겨우 학살을 면했다. 아버지 기흥도(1926년생)와 어머니 황옥주(1928년생)를 포함 할머니, 큰아버지·작은아버지 가족, 삼촌 등 12명을 잃었다.
그는 졸지에 천애고아가 됐다. 거기에다 가족을 몰살한 치안대가 다시 집에 들이닥쳐 그릇과 가재도구까지 빼앗아갔다. 논에는 말뚝을 박았다. 마음 놓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다. 금관국민학교를 나와 김포농고를 졸업한 기노정은 회사나 공무원에 취업하는 걸 일찌감치 포기했다. '빨갱이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여름 옆집 아줌마의 "이진선(가명)이 나왔다"는 소리에 기노정은 살이 떨렸다. 고촌면 치안대원이었던 이진선이 1952년 재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만기 석방된 것이다.
기노정이 마을에서 이진선을 접촉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눈을 부릎뜨고 이진선을 노려봤다. 이진선은 아버지 뻘이었지만, 아버지·엄마를 포함해 가족을 몰살시킨 집안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이진선은 머리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이진선이 마을에서 자연사할 때까지 이 고역은 반복되었다.
김포군 고촌면 민간인학살사건이 법정에 서고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전체 피해자 80~200명에 대한 사건이 아니라 송해붕을 포함한 6명 학살사건에 국한된 것이다. 대한청년단에서 부역자로 다시 치안대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해 권력의 양지만을 좇은 그들을 역사가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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