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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의 수북통신] 밤이 있어서 산다

공선옥 소설가
발행2021-09-03 09:21:14 수정2021-09-03 09:21:14
 

아프가니스탄이 패망했다고, 어떤 신문들이 쓴 모양이다. 한나는 즉각 예전 ‘월남 패망’이 생각났다. 패망했다던 월남, 그러니까 베트남은 지금 어떤가. 패망했다던 베트남은 지금 멀쩡하지 않은가. 패망한 것은 베트남이 아니고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아프가니스탄도 패망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정부. 신문들이 말을 똑바로 해야지 원. 그래서 말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인 말. 마침 또 말의 잔치 시대, 선거 국면이지 않은가. 미국도 선거철 말이, 그러니까 지지연설이 정치인으로 나아가는 출세의 기회가 된다. 정치인이 성공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말.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말은 왜 하나같이 저 모양인가. 날마다 귀를 씻고 싶다. 베트남 정부나 아프가니스탄 정부나 부정하고 부패하여 누가 와서 건들지 않았다 해도 자기들 내부에서 이미 망했듯이, 정치인들도 험한 말, 남이 듣고 귀를 씻고 싶은 말만 골라가며 쓴다는 것은 이미 정치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망한 ‘종자’가 아닌가. 비판은 욕설에 가까운 자기 분노의 언어로 하는 게 아니라 정확한 언어로 예의를 갖추고 해야 제대로 된 ‘과녁 맞추기’가 아닌가. 한나는 대통령이 하고 싶다고 나온 여야 후보들의 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가 어떤 말을 구사하는 사람인지, 어떤 종류의, 어떤 수위의, 어떤 결의, 어떤 색깔의 언어가 그의 내부에 저장되어 있다가 말로 되어 나오는지 한나는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나오는 말은 맨날 ‘짜실짜실한’ 상대방 흠 들추는 말들. 그리고 또 어떤 후보는 아예 자기 말은 없고 측근의 전언 뿐. 아주 옛날 김대중 대통령의 장충단공원에서의 사자후 시절이 차라리 그리울 지경.

1971년 4월 18일 박정희에 맞서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명한 서울 장충단공원 연설 장면ⓒ자료사진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나가 아이들 훈육한답시고 실은 자기 화를 분출하노라면 아이들은 그건 엄마 생각, 그건 엄마 말, 이라고 해서 한나 화를 더 돋운 적이 있었다. 내가 화를 낼 때 상대가 고개 숙이고 예에, 예에, 해야 내 화가 멈춰질 텐데 어디 감히.... 싶어서였다. 아이들이 다 크고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한나는 예전의 자신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 곤혹스러움과 낭패감에 어쩔 줄 몰라 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아이들의 말로 한나를 가르쳤다는 것을 모르고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화내는 것뿐인 미욱한 어른이 어른이랍시고 폼 잡았던 순간들이...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한나로 하여금 진저리를 치게 하는 것이다. 나중에 생각하면 진저리 칠만한 ‘짓거리’를 무심코 해대는 것이 선거철 말들이 아닌가. 상대를 향해서 막 쏘아댄다. 자기가 쏜 말은 언젠가 반드시 자기한테 돌아온다는 것을 잊은 채. 말이라는 것은 한번 입 밖으로 나가면 주워담을 수 없고 그 말이 곧 그 사람이 된다는 것도 잊은 채. 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생각나는 것은 말이라는 것은 두 가지라는 것. 누구들처럼 상대를 향해 쏘는 말을 구사하는 자와 자신을 표현하는 자의 말. 자신을 표현하는 말을 쓰고 사는 사람들은 남에게 험한 말을 못 쓰는 사람들. 일테면 이런 사람들.

“노점을 하는 엄마가 밤에 자리에 누워 끙끙 앓는 소리와 함께 밤이 있응게 산다이, 하셨죠.”

모든 고달픈 생애는 한나의 피붙이. 생물적 피붙이가 아니어도 너무 익숙해서 피붙이로 여겨진다. 한나의 생활이 유복한 쪽보다 고달픈 쪽에 더 가까운 탓일 거다. 어디다 허리 한번 대볼 수 없는 차가운 길바닥에 종일토록 나앉아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고단한 몸 뉘이고서 꿈결인 듯 한숨 같은 엄마의 말, 밤이 있응게 산다이. 그렇게 말하는 이의 엄마는 바로 한나의 엄마. 진짜 엄마가 아니어도 엄마. 익숙한 엄마. 그래서 살풋 애려오는 가슴.

세상을 망치는 자들은 언제나 냉혹해서 ‘밤이 있어서 산다’는 말은 영영 남의 말. 그런 말에 공명하는 가슴이 있기나 할까.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먼 나라로 이민을 간 어떤 이가 이민생활의 고달픔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일터를 오가는 길의 울창한 나무들이었다고 말했다. 밤이 있으니 산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투로 하면, 나무가 있응게 살제이. 돈이 안 되면 나무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런 말도 영영 남의 말.

짧은 기차여행 길에 보이는 풍경들은 코로나시대라 그런지 뭔가 풀이 죽은 듯 하다. 이마 위에 번뜩이는 텔레비전 속 풍경만 저 홀로 오두방정. 스마트솔라시티로 그린 리모델링하겠다는 도시 광고. 그것은 자기들 말. 나무 베어낸 자리에 어치고저치고 해서 돈 벌어먹겠다는 수작을 이르는 그 사람들만의 말. 한나 같은 사람들은 천하 없어도 못쓸 말. 그런 말을 한번 써보려 해도 입이 안 떨어진다. 물 산업 클러스터로 어쩌고 저쩌고 스마트 팜이 어쩌고저쩌고...

차라리 한나에게는 먼 이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말이 더 정답다. 더 ‘내쪽 사람’ 말 같다. 농공단지 옆을 지나는데 들려오는 외국 음악소리. 저녁밥 짓는 이국에서 온 청년들의 내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부지런히 뭔가를 굽고 볶으며 나누는 정담이. 그들이 밥 지으며 남 쏘는 말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손님들도 자기들의 말을, 이웃과 친척과 가족과 함께 살았던 시절의 말들을, 생의 어느 순간, 굳이 빛나지 않았어도 좋았던 순간들의 말들을 많이많이 써주기를. 여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더 음악 같은 아프가니스탄 말들을 써주기를. 그들도 먼 이국에서의 밤에, 밤이 있어서 산다, 는 말을 하는 이의 평화가 있기를.

한나도 이제 이 글을 끝으로 지난 몇 개월간의 덧없는 말을 그만 끝내려 한다.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더 말하기를 멈추려한다. 침묵이 하고 싶다는 그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공선옥 작가가 수북통신을 잠시 쉽니다. 금세 돌아와 좋은 글 전해주실 것을 믿으며 독자들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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