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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세금을 내기 싫었던 거였다 _ 미국의 독립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 ③

이완배 기자 
발행2021-09-20 14:46:36 수정2021-09-20 14:46:36
 

*편집자 주 - 지난 설에 이어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수에즈 운하의 패권을 다투다 _ 수에즈 전쟁
② 구아노가 남미를 초토화하다 _ 새똥 쟁탈전
③ 사실은 세금을 내기 싫었던 거였다 _ 미국의 독립
④ 노예 해방은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_ 미국 남북전쟁
⑤ 주식회사의 출발로 촉발된 바다의 패권 다툼 _ 영란 전쟁

많은 사람들이 “왜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번성한 반면,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이슬람교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을까?”라는 궁금증을 갖는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데다가, 중세 이후 유럽의 기독교는 유럽을 휩쓸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기독교가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슬람교에 철저히 눌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도들은 “이슬람교도들이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종교를 퍼뜨렸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해왔다.

이슬람교도들이 땅을 점령한 뒤 그곳 주민들에게 “믿을래? 죽을래?”라고 협박했고, 원주민들은 그 힘에 굴복해 이슬람교를 믿게 됐다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폭력성이 종교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논지를 펼치는 이들 중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그 증거로 대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가 태어난 성지 메카(Mecca)가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 위에는 ‘알라 외에는 신(神)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칼이 한 자루 그려져 있다. 이것이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은 대부분 억지다. 일단 역사적으로 이슬람교가 기독교보다 더 폭력적이었다는 주장부터 너무 주관적이다. 이슬람교가 일으킨 전쟁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가 일으킨 전쟁의 양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은 세금이 문제였다

이런 해석에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를 끌어들인 것은 견강부회의 극치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기에 그려진 칼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 그 국기는 지금으로부터 고작 50년 전인 1973년에 만들어졌다. 1973년 이후 이슬람교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일으킨 전쟁이 몇이나 되나? 이 시기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 국가들 중 가장 온건한 성향의 나라였다. 그래서 실제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폭력으로 종교를 퍼뜨렸다.”는 말을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 가지 더 살펴보자. 이슬람교도들은 오른손과 왼손을 매우 정확히 구분한다. 깨끗한 것을 만질 때에는 오른손을, 용변을 본 뒤 물로 씻을 때에는 왼손을 쓴다. 만약 이들이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을 들었다면 오른손으로는 당연히 가장 중요한 『코란』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칼을 왼손으로 쥘 수밖에 없다. 왼손에 칼을 쥐고 그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말이 되나? 통계적으로 사람은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훨씬 많다. 이슬람 전사들이 모조리 왼손잡이가 아닌 한 왼손에 칼을 쥐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슬람교가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득세한 이유를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헌금이다. 종교가 국교로 숭배되던 시절, 헌금은 내도 그만 안 내도 그만인 돈이 아니라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기독교의 헌금이 십일조(소득의 10분의 1을 헌금으로 내는 제도)였던 반면, 이슬람교의 헌금은 소득의 2.5%에 불과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것에 비해 돈이 4분의 1밖에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가난한 민중들에게 이 차이는 매우 컸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경합했던 시기, 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원주민들이 이슬람교를 선택했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7년 전쟁의 불똥이 북아메리카로 튀다

역사적으로 벌어진 수많은 전쟁 중에는 이와 유사한 것들이 널려 있다. 뭔가 숭고한 가치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사람을 살상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그 내면에는 돈의 문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세금은 전쟁의 매우 중요한 원인이었다. 중세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벌인 영토 확장 분쟁의 핵심 요인 중 하나가 헌금(사실상 세금)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근대 이후 세금이 촉발한 최대 규모의 전쟁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3)이 될 것이다. 독립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당시 영국과 미국의 관계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주류는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북미 대륙의 주도권이 원주민(유럽인들이 ‘인디언’이라고 불렀던)들에게 있었다면 당연히 그 관계는 매우 험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미 대륙의 주도권은 영국에서 건너온 신교도들에게 있었고, 그들은 영국에 별 악감정을 갖지 않았다.

비교적 무난한 관계가 지속되던 두 나라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유발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리는 7년 전쟁(1756~1763)이 그것이다. 이 전쟁의 출발은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진 단순한(!) 왕위 계승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 전쟁에 프로이센이 개입하더니,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 등 유럽 열강들이 각자의 이유로 이 전쟁에 참여해 전쟁의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영원한 앙숙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 불똥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번졌다. 북아메리카에서 각각 식민지를 갖고 있던 프랑스(캐나다)와 영국(미국)이 이곳에서도 전쟁을 벌인 것이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당연히 영국 편에서 프랑스와 싸웠다. 그리고 미국은 이 싸움에서 꽤 진심으로 영국을 도왔다. 당시만 해도 원주민이 아닌, 즉 영국에서 건너와 정착한 이주민들은 자기들이 식민지 피지배인이라기 보다 영국 사람에 가깝다고 믿고 있었다.

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전쟁에서 너무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영국 정부가 막대한 빚을 졌다는 점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 빚을 메우기 위해 엉뚱하게도 식민지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걷기로 했다. 종전 이듬해인 1764년 영국이 만든 설탕법(Sugar Act)이 이를 위한 정책이었다.

이번에는 인지세가 문제였다

설탕법이 실시된 배경과 역사는 생각보다 조금 더 복잡한데, 최대한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17세기 영국은 크롬웰이 만든 항해법(Navigation Acts)을 통해 영국 식민지에서 재배된 설탕과 담배 등을 무조건 일단 영국에 팔도록 정해놓았다. 영국은 그렇게 모은 설탕과 담배를 다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식민지에 내다 팔았다.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것이다.

그런데 7년 전쟁 이전까지 미국은 이 법을 거의 지키지 않아도 별 탈이 없었다. 담배야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서 났던 것이니 외국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었고, 문제는 설탕이었는데, 미국 주민들은 이 설탕을 대부분 밀수로 구입했다. 미국과 우호적 관계였던 영국도 미국의 이런 설탕 밀수에 별 시비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7년 전쟁 이후 제정된 설탕법은 국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설탕법의 요지는 한 마디로 “미국 이주민 너희들도 앞으로 설탕을 밀수하지 말고, 우리 영국에서 수출되는 정상적인 설탕만 수입해라. 그리고 우리는 그 설탕에 세금을 왕창 매길 테니 그 세금을 온전히 내라!”는 것이었다.

이 법이 통과되면서 미국에 거주하던 이주민들이 갖고 있던 영국에 대한 우호적 감정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이주민들은 자기와 별 상관도 없는 7년 전쟁에서 진심으로 영국을 도왔는데, 영국은 세금폭탄을 매겨 은혜를 원수로 갚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반(反)영 감정의 불씨가 서서히 타오를 무렵, 영국은 이 불씨 위에 기름을 들이붓는 일을 자행했다. 여전히 부족했던 재정을 메우기 위해 1765년 인지세법(Stamp Act)이라는 것을 미국에 도입한 것이다.

인지세법이란 미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나 팸플릿, 서적이나 증명서 등 종이로 만든 모든 출판물에 우표와 비슷한 모양이 인지를 사서 붙이는 것을 의무화한 법이다. 즉 미국 식민지 개척민들은 종이 문서를 만들 때마다 건건이 세금을 내고 인지를 사야 했던 것이다.

이 법에 대한 미국 이주민들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설탕법이 반영 감정의 불씨 역할을 했다면, 인지세법은 반영 감정을 산불처럼 확산시켰다. 이때 미국 이주민 대표들은 “우리가 뽑은 우리의 대표가 없는 상태에서, 영국 의회가 독단적으로 내린 인지세법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 유명한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말이 널리 알려진 계기였다.

이주민들의 반발로 인지세법은 유야무야됐지만 감정은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 인지세법이 폐지되며 체면을 구긴 영국 의회는 타운센드 법 등 다양한 법을 새로 만들어 미국 이주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려 했다. 이런 세금 횡포에 더 이상 영국 식민지인으로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이주민들은 마침내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계기로 두 나라의 감정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결국 두 나라는 1775년 미국 독립을 두고 일전을 시작했다.

전쟁 초기 전황은 압도적으로 영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영국과, 전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던 미국은 전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이 전쟁을 ‘영국 대 미국의 전쟁’으로 불러서 그렇지, 당시 미국은 ‘하나의 나라’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13개로 나뉜 영국의 식민지 연합이었다. 이런 연합체가 일치단결된 힘으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을 꺾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미국 독립전쟁 때의 전투 모습ⓒ기타

하지만 13개 식민지 연합군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앞세워 조금씩 전황을 만회해 나갔다. 그리고 식민지 연합군은 유렵 열강에도 도움을 청했다. 7년 전쟁 이후 영국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유럽 열강들이 하나 둘씩 참전해 미국 편을 들기 시작했다.

참고로 당시 영국과 앙숙이었던 프랑스를 외교의 힘으로 식민지 연합군 편으로 끌어들인 인물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은 있어도, 이 사람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랭클린이 바로 100달러 지폐에 그려진 초상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점차 전황을 회복해나가던 식민지 연합군은 끊임없이 영국군을 괴롭히는 소모전을 펼쳤다. 영국군은 단기 전투에서 종종 승리했지만 그 드넓은 대륙에서 벌어진 장기 소모전을 감당하지 못했다.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식민지 연합군을 이끌던 워싱턴이 마침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2년 뒤인 1783년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함으로써 미국은 공식적인 독립국가가 됐다. 인지세가 유발한 미국의 독립전쟁은 19세기 주인공 영국의 퇴장과, 20세기 주인공 미국의 등장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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