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협과 함께하는 통일 역사 프로그램 '일제 강제동원 군산유적지 역사기행'이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군산지역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민화협과 함께하는 통일 역사 프로그램 '일제 강제동원 군산유적지 역사기행'이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군산지역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 이종걸)는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일제 강제동원 흔적이 짙게 배어있는 군산 지역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회원단체들과 함께 하는 민화협 강제동원 역사기행 사업은 지난 2020년 10월 처음으로 부산 일대 구 일본군 포병부대 주둔처와 일본군 막사 등 유적 답사를 시작해  올해 두번째이다.

올해 군산 역사기행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위원장 김동명)이 공동 주최하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한국문인협회, 천인갱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회원 20여명이 참가했다.

지난 26일 서울 양재동 시민의숲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을 출발한 답사단은 2박3일 일정동안 군산 지역에 남아있는 일제의 강제동원 유적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일제가 남긴 상처를 온몸으로 느끼고 지금까지 극복하지 못한 과거사가 던지는 아픔을 다시 한번 새기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번 역사기행을 위해 기꺼이 동행해 준 김민영 국립 군산대학교 행정경제학부 교수의 도움으로 여러 답사지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해망굴(海望堀)
해망굴 [사진제공-민화협]
해망굴 [사진제공-민화협]

일제강점기 군산항의 제3차 항구구축 공사기간이었던 1926년 10월 16일 구 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현재 해신동으로 통합)을 연결하고자 만든 반원형 터널(높이 4.5m, 길이 131m)이다.

당시 이 지역은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인근에는 군산신사와 신사광장(지금의 서초등학교), 공회당, 도립군산의료원, 은행사택, 안국사(지금의 흥천사) 등이 있었다.

 

월명공원
월명공원 [사진-군산시청 홈페이지 갈무리]
월명공원 [사진-군산시청 홈페이지 갈무리]

군산의 상징이자 월명공원의 상징인 수시탑에 오르면 군산 앞바다와 금강하구둑, 그리고 군산시가지와 장항제련소 등의 주변 전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1906년 군산 각국 거류지역의 명승지인 해망정 인근 9,907 평을 일명 각국공원이라 이름을 정했다.

이후 각국공원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 각국 조계지역 법이 폐지되자 각국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군산공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일무역으로 호황을 누리던 1933년에 현재의 수시탑이 서 있는 임야 6,088평을 매입하여 공원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총면적 약 77만평, 산책로 길이 12km를 자랑하는 군산의 명소이다. 

 

이영춘 가옥
이영춘 가옥 [사진제공-민화협]
이영춘 가옥 [사진제공-민화협]

일제강점기인 1920년 군산지역 대지주였던 일본인 구마코토(態本利平)가 농장관리를 위해 지은 별장 주택.

건축 당시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한 건축비를 들여 별장처럼 지었다고 한다.

서양식과 일본식, 한식의 독특한 복합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일본인이 시공한 건물로 외부형태는 유렵양식, 평면구조는 일본식이지만 내부 온돌방은 한식으로 되어 있다.

해방후에는 개정 중앙병원을 설립해 진료사업과 농어촌 위생에 힘쓰고 학교의 영아원을 설립해 농어촌지역 주민교육과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는데 평생을 바친 이영춘(李永春, 1903∼1980) 박사가 거주하였다. 

특히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건물을 짓는데 처음으로 미터(m)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발산리 5층석탑
발산리 5층석탑 [사진제공-민화협]
발산리 5층석탑 [사진제공-민화협]

일제 강점기 군산지역 대표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1903년 자신이 소유한 농장에 세운 학교(발산초등학교) 건물 뒷편에 가져다 놓은 석등과 석탑중 31기의 석물이 남아 있다.

그는 일본에서 주조업으로 재산을 모은 뒤 일본 청주의 원료인 값싼 쌀을 찾아 군산에 왔다가 석등과 5층석탑을 비롯한 수많은 골동품을 불법 수집했다. 

이 석조물 가운데 석탑과 석등은 원래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의 봉림사터에 있었는데, 시마타니 야소야가 자신의 농장정원을 꾸미기 위하여 옮겨 놓은 것이다. 

1920년 시마타니 금고라 불리는 금고용 건물을 지어 수집 골동품을 보관하였으나 해방 후 손가방 두개만 지닌채 부산항에서 마지막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고려시대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5층석탑은 높이가 6.4m에 달하는데 신라 석탑 양식을 계승한 2층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였다고 한다.

5층석탑은 보물 제276호로, 석등은 보물 제2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피역사(驛舍)
임피역사 [사진제공-민화협]
임피역사 [사진제공-민화협]

일제강점기때 전라남·북도의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한 중요 교통로인 군산선의 역사.

1936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0년 12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임피역은 당시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 건축형식과 기법을 잘 보여주며, 원형 또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1995년 4월 1일 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었고, 2005년 9월 30일 화물취급이 중지되었다.

 

 

동국사
동국사 [사진제공-민화협]
동국사 [사진제공-민화협]

1913년 일본인 승려 우치다 대사(內田佛師)가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현존 국내 유일 일본식 사찰.

당시 일본에서 모든 건축자재를 들여와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동국사 입구에는 누렇게 때가 낀 대리석 대문기둥이 서 있는데, 기둥 양편에는 금강사(錦江寺)라는 옛 사찰의 명칭과 소화9년(1934년)이라는 음각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누군가 일본 천황의 연호인 소화글씨 위에 시멘트로 글씨를 지우려는 흔적이 남아있어 완벽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정서적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주요 건물은 대웅전, 요사체, 종각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팔작지붕 홑처마형식의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을 많이 달았고, 우리나라의 처마와 달리 처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특징을 하고 있다. 

금강사는 해방 후에 김남곡 스님이 동국사로 사찰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 [사진-군산시청 홈페이지 갈무리]
히로쓰 가옥 [사진-군산시청 홈페이지 갈무리]

옛 히로쓰 가옥. 일제강점기 군산지역의 유명한 포목상이었던 일본인 히로쓰가 건축한 2층의 전통 일본식 목조가옥.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 2채가 있고 두 건물사이에 꾸며진 일본식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이 놓여 있다. 

히로쓰는 대지주가 많았던 군산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상업으로 부를 쌓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층에는 온돌방, 부억, 식당,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일식 다다미방 2칸이 있다.  

일제강점기 군산의 가옥 밀집지인 신흥동 지역의 대규모 일식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의 촬영장소가 되기도 했다.

 

근대건축관
군산 근대건축관 [사진제공-민화협]
군산 근대건축관 [사진제공-민화협]

1923년 일제 식민지 정책의 총본산인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건립되었다. 

조선은행은 당시 일본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장악하는데 초석을 쌓아,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은행이었다. 

해방 후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되다 유흥시설로 바뀌었다. 

유흥시설로 바뀌면서 전면부와 내부가 부분 개조되었고 현재는 화재로 내부가 소실되어 방치되고 있다가 2008년 보수·복원 과정을 거쳐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근대미술관
군산 근대미술관 [사진-근대미술관 홈페이지 갈무리]
군산 근대미술관 [사진-근대미술관 홈페이지 갈무리]

1890년 인천에 처음 문을 연 일본 나가사키 지방은행이 1907년 4월 8일 조선에서 7번째 지점으로 군산에 설립한 은행.

구 일본 18은행 군산지점이라 불렸다. 숫자 18은 은행 설립인가 순서를 뜻한다.

주 업무는 무역에 따른 대부업이 주종을 이루었다.

일제의 미곡 반출, 토지강매 등 수탈의 흔적으로 일제강점기 초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해방 후 대한통운 지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2008년 2월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보수복원을 통해 현재는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항도호텔
향도호텔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향도호텔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숙박시설로 군산 1호 호텔로 불린다.

처음 지어 일제 총독부의 영빈관으로 쓰이다가 해방 후 미군청정 관리가 신탁통지기간 살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군산 근대 문화거리 조성에 맞춰 리모델링을 통해 1930년대 컨셉으로 운영중이다.


김민영 교수는 답사단에게 현재 울프 팩(Wolf Pack)으로 불리는 주한미군 8전투비행단(군산시 옥서면 일대) 비행장의 역사가 1934년 일본군이 비행조종사 양성을 위해 건설한 '다쓰하라 비행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일제는 이곳 군산비행장을 구 일본 육군특별공격대 지란기지 산하의 육군 비행학교 군산교육대가 기본조종교육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고 쌍엽기 20여대에 300여명의 조종사와 정비병을 주둔시켰다.

"항공대가 주둔하여 군산비행장의 확장이 필요하자 전라북도 일원의 청장년을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징집하였고, 중학생들은 '학도 근로대'라 하여 강제동원하여 작업을 함. 이들은 한 기수에 200~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음. 당시 비행장 공사장에는 군용 천막을 쳐 놓고 한 천막에 30~40명을 숙식시키며 나무 밥그릇에 젓갈 한 토막의 식사와 하루 막걸리 한 대접, 그리고 4~5일에 권련초 한 갑을 나누어주며 2달씩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함."

"1934년 준공된 군산비행장은 솔밭뜸(송촌리)에서 시작하여 상제와 중제마을이 포함된 규모였기에 마을 주민들은 하제마을이나 불기 간척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함."(김중규, 『군산역사이야기』, 도서출판 나인, 2001, 동 『군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도서출판 나인, 2003)

군산비행장 건설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파악된 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난 2006년 조사에 따르면, 강제동원 당시 직업은 대부분(87%) 농업이었고 41%가 무학력이었다.

동원 당시 평균나이는 16.8세이고 노동시간은 하루평균 11.2시간, 휴식일은 월 기준 0.8일, 숙소는 따로 마련되지 않고 비행장 입구에 있는 함바(飯場, 식당)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는 환경이었으며, 식사는 수수밥 한 공기 정도의 양에 경제적 보상은 거의 없었다.

동원시기는 1944년~1945년에 집중되어 있으며, 부친이나 형님 대신 동원된 경우가 많고 대부분 마을별로 인원이 배정되어 구장 등의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강제동원 관련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은 있다.

김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일상화된 강제동원의 실태 분석을 위해서는 보다 종합적으로 전국적 및 지역별 피해실태 분석이 필요하며, 특히 군사동원 관련 전수조사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군산비행장의 경우 보다 구체적인 조사를 위해서는 현장조사가 필요하지만 현재 미 공군 관할지역이기 때문에 접근은 물론 사진촬영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울프 팩(Wolf Pack)으로 불리는 주한미군 8전투비행단.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울프 팩(Wolf Pack)으로 불리는 주한미군 8전투비행단.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현재 미군기지 앞. 1934년 일본군이 비행조종사 양성을 위해 건설한 '다쓰하라 비행학교'가 있던 군산비행장 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현재 미군기지 앞. 1934년 일본군이 비행조종사 양성을 위해 건설한 '다쓰하라 비행학교'가 있던 군산비행장 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과거사가 온전히 해결되지 못했을때 현재와 미래로 오롯이 이어져 무거운 과제로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일제하 강제동원 조선인은 국내동원 650만명, 해외 동원 130만명을 비롯해 총 780만여명에 달한다.

일제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민화협은 지난 2018년 7월 18일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과 '조선인 유골송환을 위한 남·북 민화협 공동추진위원회' 결성에 합의하고 그해 11월에는 '이를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위원회'로 발전시켜 강제동원 조선인 유해 봉환과 진상규명을 위한 사업을 추진해 왔다.

2018년 10월 일본에서 '남·북·일 조선인유해봉환추진위원회'를 결성해 구체화된 유해봉환 사업은 이듬해 2월 27일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서 75위의 유해중 북에 고향을 둔 1위를 제외한 74위의 조선인 유해를 봉환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봉환된 유해는 2019년 3월 1일 제주도 애월읍 선운정사에 모셨으며, 이중 세 분은 국내외에 거주하는 유가족을 찾게되어 의미를 더했다.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봉환 사업에서 남·북 민화협과 재일 동포단체가 공동으로 추진해 결과를 도출한 첫 성과로 평가된다.

민화협은 지난 2019년 3월 1일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 모셔진 조선인 유골 74위를 봉환해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추모식을 진행했다. 유골은 제주 선운정사에 안치되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민화협은 지난 2019년 3월 1일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 모셔진 조선인 유골 74위를 봉환해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추모식을 진행했다. 유골은 제주 선운정사에 안치되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1차 유해봉환 사업이 마무리된 후에도 일본에서 매년 열리고 있는 간토대지진 추모제, 1945년 3월 도쿄대공습 당시 조선인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제, 그리고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도쿄 우천사에 일부 유해 봉헌)를 위한 참배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2019년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을 통해 재일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제작한 '일본지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역사의 진실을 가슴깊이 새기다'를 출판하고 지난 4월에는 조사단에서 발간한 20권 분량의 자료집을 받아 국내에서 간행·배포하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사업 초기부터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봉환사업에 참여해 온 민화협 이시종 사무차장은 2019년 5월 평양에서 '강제동원 피해 공동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나 급변한 정세로 인해 성사되지 못한 일을 못내 아쉬워했다. 

특히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100주기를 맞는 2023년 9월 1일에 즈음해서는 남북 민화협이 공동으로 일본측에 진상공개와 사과를 강력하게 제기하고,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도 함께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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