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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길 수 없는 ‘진짜 사장’… 노조법 개정 늦출 명분 없다



 

대리점 뒤에서 임금·노동조건 좌지우지한 CJ대한통운

서울행정법원, “CJ대한통운이 진짜사장, 교섭 의무 이행해야”

노조법 2·3조 개정 정당성 확인

지난 12일,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의 ‘진짜사장’이 CJ대한통운임이 밝혀졌다. 2017년,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이 노조 필증을 받은 지 6년 만이다.

 

이 판결로 ‘진짜사장’ 원청의 책임을 인정하는 노조법 2조, 그리고 ‘손배폭탄’을 제한하는 노조법 3조 개정을 늦출 명분이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날 서울행정법원은 CJ대한통운이 택배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은 “부당노동행위”라고 판단했다.

 

판결의 핵심은 “CJ대한통운은 집배점(대리점) 택배기사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며 “택배기사와의 관계에서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사진 : 뉴시스

대리점 뒤에서 좌지우지한 CJ대한통운

 

그동안 CJ대한통운은 택배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 등 노동조건을 조절하고 통제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교섭에 대한 ‘사용자 책임’은 회피했다.

CJ대한통운은 택배 대리점(점주)와 택배화물운송 위수탁계약을 맺고, 대리점으로 하여금 택배기사와 택배화물운송 재위탁계약을 체결하게끔 한다. 대리점 뒤에 숨어 ‘진짜 사장’으로서의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택배노동자들의 실제 노동은 CJ대한통운의 필요에 따라 통제되고 있다. 택배기사들의 업무는 CJ대한통운의 이름으로 고객들에게 택배를 배달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CJ대한통운이 구체적으로 설정한 업무매뉴얼에 따라 일했다.

CJ대한통운은 택배 대리점주를 통해 택배기사들의 노동조건을 좌지우지했다. 대리점은 전국적 규모의 택배전산시스템을 통해 CJ대한통운에 노무제공 과정 전체를 보고했다. 운송장·바코드·요금정산내역·화물추적 시스템 등을 구비해 놓는가 하면, 도난·분실 근절 지침, 잡화금지·제한 상품 지침, 급지수수료 등 업무매뉴얼을 구체적으로 설정해 택배기사들에게 지시했고, CS(고객만족) 지표를 통해 업무지침을 강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청 CJ대한통운은 “집배점 택배기사들과 근로계약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므로 사용자가 아니다”, “교섭할 의무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왔다.

 

법원 판단은 달랐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근로자의 기본적인 노동조건 등에 관하여 그 근로자를 고용한 사업주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일정 부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정도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원청 사업주는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에 해당한다”는 것. 그러므로 “택배노조와 교섭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노동계와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노조법 2조·3조의 개정”이 옳고 정당했음을 법원이 확인시켜준 셈이다.

민주노총은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 등 교섭의 대상이 형식적인 계약관계인 대리점, 하청회사가 아닌 원청임을 확인한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고,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도 “하청 뒤에 숨어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진짜 사장’의 부당노동행위에 경종을 울렸다”고 했다.

지난 6년 동안 부당노동행위를 강요당한 당사자, 택배노조도 이번 판결에 대해 “진짜 사장의 교섭 의무를 명시하는 노조법 2조, 3조 개정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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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 못하는 노조’가 할 수 있는 건 ‘투쟁’뿐

 

그동안 원청은 하청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으면서도 “사장이 아니”라 우겼다. 택배노조의 말처럼 ‘노조의 교섭요구 → 원청의 거부 → 노조 투쟁 돌입’이 반복되면서 노동자들의 희생을 낳았다.

원청 기업들은 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법’으로 내몰며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를 무기삼아 이들을 시시각각 옥죄었다.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진짜 사장과 교섭을 위해 투쟁한 노동자들은 손배폭탄을 떠안았다.

택배노조는 25명의 택배노동자가 과로사로 쓰러져갈 때 과로를 유발하는 택배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원청 택배사와 교섭을 요구했지만 CJ대한통운은 교섭에 나오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는 지키지 않고, 인상된 택배요금으로 매년 3500억이라는 막대한 이익만 취했다.

지난 2021년 6월 중앙노동위원회가 ‘원청이 교섭의무가 있다’고 판정했음에도 CJ대한통운은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청구하며 시간을 끌었다. 오히려 CJ대한통운은 과로사 해결을 위한 택배노조의 파업에 20억 원의 손배를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 역시 중노위의 판정이 옳다며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행정소송 승소 판결 직후 택배노조는 “‘교섭 못하는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투쟁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여름 국민 관심 속에 파업을 이어간 대우조선해양 사내하청 노동자, 화물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 노동자성을 증명하기 위해 소송하고, 투쟁해야 하는 지난한 시간이었다.

특수고용노동자인 학습지 교사들도 2018 대법원에서 노조법상 노동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받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해 10월, 현대기아차 사내하청노동자 400여 명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대법원은 ‘불법파견’임을 인정하고 현대기아차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직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을 받기까지 12년이 걸렸다.

대우조선, 현대제철,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도 굴지의 대기업 원청기업과의 교섭을 요구하며 법정 소송 투쟁을 진행 중이다.

지난달 중앙노동위원회는 현대제철, 대우조선해양 등에 대해서도 ‘노동조합법상 하청노동자의 사용자’라고 판단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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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법 2·3조 개정, 늦출 명분 없다

 

택배노조는 CJ대한통운에 공식적으로 교섭을 요구할 예정이다.

법원의 판단대로 임금과 노동조건에 실질적 지배력과 결정권을 갖는 ‘진짜사장’과 교섭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임금과 근로조건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을 쥐고 있는 원청과는 교섭할 수 없으며, 파업을 하면 불법으로 낙인찍혀 수십, 수백억 원의 손해배상·가압류에 내몰리는 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들. 이들의 현실을 노조법 2·3조 개정을 통해 바로잡을 때다.

그러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 국민의힘은 노조법 개정을 원천 차단하고 있고, 더불어민주당은 법안 상정에 뒷걸음질 치고 있다. 또 한 번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이 예상되지만, 투쟁만이 답일 수밖에 없다.

 

조혜정 기자jhllk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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