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주 4·3항쟁 75주년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한의 역사다. 오죽하면 학생들에게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을까? 전국의 모든 중·고등학생들의 단골 수학여행 코스가 되다시피한 제주이지만 제주에 다녀와도 제주의 역사를 모른다. 아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지난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까지 제정·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제주의 역사는 금기사항이다.
<4·3 사건은 김일성에 의해 자행된 만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으로 근무하다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해 현재 제 21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 태영호의원이 지난 2월 12일 제주에서 “제주 4·3 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태 의원은 4·3 평화공원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향을 올리며 “4·3 사건은 명백히 김씨(김일성)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며 “김씨 정권에 몸담다 귀순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희생자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제주 4·3항쟁의 전개 과정>
오늘은 제주 4·3항쟁 75주년을 맞는 날이다.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민중항쟁으로, 일본의 전쟁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했던 미군정시대에 재등장한 친일세력들과, 또한 이 시기에 어렵게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남조선 공산노동당의 정치투쟁으로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 중 기마경찰이 탄 말의 말굽에 구경을 나온 어린이가 치이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이 격분해 돌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를 바라 본 경찰은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들에게 총을 발포하여 일반주민 6명이 사망하는 제주도 ‘3·1 발포사건’이 발생한다.
4·3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제주 4.3 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4,028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다. 제주 4.3 진상조사위원회에서는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
“제주도민 여러분께서는 폐허를 딛고 맨 손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평화의 섬 제주를 재건해냈습니다”,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10월 31일 제주도민을 향해 ‘대국민· 대도민 사과문’에서 밝힌 말이다. 4· 3사건 후 55년만이다. 대통령이 공식 사과까지 한 역사, 한의 역사. 제주의 아픔은 아직도 그대로다.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은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일제에 은혜를 입은 세력들은 ‘친일이 애국’이라는 막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며,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대한민국의 지배층들은 미국을 천사의 나라로 찬미하고 있다. 제주 4·3항쟁 75주년. 제주에 평화공원이 건설되고 4·3 평화재단과 4·3 평화기념관이 건립됐다고 ‘사건’이 ‘항쟁’이 되는 것이 아니다. 4·3항쟁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과 유족들에 대한 진정한 보상은 아직도 먼 꿈 같은 얘기다. 제주 4·3항쟁의 가해자들은 돌아오는 4·15총선에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다.
<이산하의 ‘한라산’에는...>
그날/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 예고장을 살포하고/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빨갱이 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 중학생을/금악벌판으로 몰고가 집단학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나무기둥에 묶어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속으로 던져버린 그날/한 무리의 정치깡패집단이 열 일곱도 안된/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버리던 그날,/바로 그날/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갈이 찢어져/목이 짤린 얼굴은 얼굴대로/팔은 팔대로/다리는 다리대로/몸통은 몸통대로/전봇대에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1987년 살인자 전두환의 공포정치로 온 국민이 숨죽이며 지내던 시절. 녹두서평이 ‘민주주의 혁명과 제국주의’라는 특집호 첫 페이지에 올린 이산하 시인의 시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이렇게 시작하는 57쪽 짜리의 장편시 한라산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반도 비극의 역사 드라마다.
<제주 4.3 항쟁을 ‘폭동’이라는 사람이 진실화해위원장>
제주 4.3 항쟁을 ‘폭동’이라는 폄훼한 사람을 윤석열 대통령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윤 대통령이 임명한 김광동 위원장은 2011년 6월 29일 제주에서 열린 '제주 4.3사건 교과서 수록방안 공청회'에서 4.3을 “남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폭동”이라고 하고 제주 남로당의 투쟁에 대해서도 “단독정부 수립반대 및 거부 투쟁이 아니라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 수립반대와 친북·친소체제를 자행했던 공산주의자들의 무장 투쟁”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역사는 역사로서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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