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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재정, 물가 자극해 안 된다” 윤석열 발언이 황당한 여러 이유들

재정의 경기 조절 역할 무시…전두환 정권 사례 언급에 전문가들 “당시와 상황 달라”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11.01. ⓒ대통령실 제공
정부가 확장재정 반대 논리로 물가를 들고나왔다. 재정을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주장이다. 원론적인 차원의 얘기로, 재정의 역할을 물가 안정화로 한정하는 편협한 시각이 드러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경기 조절과 취약계층 보호 등 재정의 본질적인 기능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7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주재한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우리 재정을 더 늘리면 물가 때문에 또 서민들이 죽는다”고 발언했다.

경기 침체기에 정부가 확장재정을 펴 경제 활성화를 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에 대해 반대 입장을 피력하며 재차 건전재정 기조를 확인한 것이다.

경제 수장도 확장재정 반대 논리로 물가 부담을 들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3일 내년도 경제부처 예산안 심사를 위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동안 빚이 급속도로 늘어 방만하게 재정을 운용하면 국가 부채가 너무 커지고 대외 신인도, 물가 안정에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고물가에 대한 정부 대책이 절실한 시기인 건 맞다. 치솟는 물가가 국민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3.8% 오른 113.37(2020년=100)로 집계됐다. 7개월 만의 최대 물가 상승률이다. 정부 지출을 늘리면 총수요가 커져, 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만, 물가 상승을 이유로 긴축재정을 펴야 한다는 정부 주장은 일차원적인 논리 전개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통령이 한 말은 원론적인 차원에서 대학생이 얘기하기에는 맞는데, 대통령이 하기에는 굉장히 클래스(수준) 떨어진 얘기”라고 비판했다.

재정정책은 물가 안정화를 위한 통화정책을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 따른다. 금리 인상은 물가를 잡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꼽힌다. 고금리는 대출 이자 부담을 높여, 가계와 기업 돈줄을 조이게 된다. 수요가 줄면 물가가 떨어진다. 문제는 고금리가 서민과 취약계층을 압박한다는 점이다. 매월 갚아야 할 이자가 늘고, 신규 대출을 받기도 어려워진다. 통화정책은 금융 시장 전반에 반영돼, 특정 계층에 차등 적용할 수 없다. 재정정책이 고금리에 따른 서민·취약계층 부담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령 복지 사업이나 중소기업·자영업자 지원 사업 예산을 확대해 안정망을 구축할 수 있다.

우 교수는 “통화정책은 경제 전반적으로 영향을 줘, (정책 대상을) 타겟하기 어려운, 굉장히 거친 정책”이라며 “통화정책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쓰면, 중산층과 서민, 취약계층 등 가장 약한 고리부터 부담이 가중된다”고 짚었다. 이어 “재정 대응책의 특징은 타겟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예컨대 자영업자 경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금융정책으로 돈을 빌려주면서 부실 대출이 많은데, 재정정책으로 소화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통화당국도 재정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양기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민 경제, 기업, 가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 재정정책은 건전성만 내세우며 극단적인 긴축 재정을 펴고 있다. 물가와 성장,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조화롭게 이어져야 하는데 아쉽다”고 지적하자, “재정의 양으로도 되지만, 재정지출을 취약 부분에 집중함으로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총재 발언은 재정 확대에 거리를 두면서도, 취약계층 지원 등 재정의 역할을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예산 규모가 작으면 재정이 충실히 제 역할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 내년도 취약계층 지원 예산은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건·복지·고용 예산은 16조 9천억원(7.5%)으로, 문재인 정부 5년 평균(2018~2022년) 증가율 10.8%에 크게 못 미친다. 고령화 인구구조와 물가 상승 등에 연동되는 의무지출의 자연 증분을 감안하면, 경기 침체기에 요구되는 복지체계를 구축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예산 총액을 작게 잡으면 의무지출 비중이 커져, 정부 의지가 반영되는 재량지출이 쪼그라들게 된다.

 

 

 

서울 시내 한 은행의 대출창구 모습. 2023.06.26. ⓒ뉴시스

 

왜곡된 고물가 진단·대책 

고물가 대책을 재정 운용에서 찾는 건 잘못된 접근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고유가와 세계 공급망 차질 등 외부 요인으로 물가가 오른 상황에서 수요가 둔화되면서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공통적인 진단이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은 수요가 과대해서 물가가 오르는 게 아니다”라며 “물가가 너무 올라서 사람들이 돈을 안 쓰다 보니 규모의 경제 효과가 약해지고, 효율성이 떨어지다 보니 가격을 내릴 수 없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정을 풀면 물가가 올라간다는 건 경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얘기”라며 “지금과 같이 공급 측면의 충격으로 가격이 올라간 상태에서는 적절한 수준으로 소비를 진작하는 게 효율적이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수요를 줄여 물가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경제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 교수는 “정부는 긴축재정으로 수요를 줄일 게 아니라, 고물가를 틈탄 기업의 초과 이윤을 규제하고, 기본적인 먹거리는 자급률을 높여 외부 요인에 따른 물가 변동성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내년도 지출 증가율은 정부가 전망하는 내년 경상성장률(실질성장률+물가상승률) 4.7%를 크게 밑돈다. 경상성장률에 준하는 지출 증가를 중립으로 본다. 내년도 예산은 경제 규모 확장하는 속도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인 것이다. 올해 상반기 GDP 성장률 0.9%에서 정부 기여도는 -0.8%P였다. 3분기 정부 기여도는 0.2%p로 개선됐으나, 누적 기준으로 여전히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년에도 정부가 재정을 줄여 총소비를 줄이면, 물가는 잡지 못하고 오히려 경기 반등을 지연시킬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내년도 총지출 규모는 656조 9천억원으로, 올해 대비 증가율은 2.8%에 불과하다. 재정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 역대 최저치다. 정부의 ‘상저하고’ 기대와 달리 경제 상황 개선은 지지부진하다. 정부가 예측한 올해 경제성장률 1.4% 달성도 안갯속이다. 올해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6%로 집계됐다. 연간 목표치를 달성하려면 4분기에 0.7% 이상을 기록해야 한다.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이스라엘-하마스 사태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가 가중되고, 미국 고금리가 지속되는 등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내년 전망도 밝지 않다. IMF는 최근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4%에서 2.2%로 하향 조정했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은 “미국처럼 정부 재정을 대폭 늘리는 경우에는 물가에 영향이 있지만, 한국은 정부 지출 규모가 너무 작아서 오히려 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라며 “정부가 경기 조절 역할을 아예 포기해 버리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난 2일 통계청이 발표한 10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3.37(2020년=100)로 지난해 같은 달 보다 3.8% 올랐다. 상승폭은 지난 8월(3.4%), 9월(3.7%)에 지난달까지 3개월 연속 확대됐다. 사진은 이날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시민들의 모습. 2023.11.02. ⓒ뉴시스

1980년대 군부 정권 정책에 머물러 있는 대통령

윤 대통령 경제 인식이 과거 군부 정권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재정을 통한 물가 관리를 주장하면서 전두환 정부 사례를 들었다. 그는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인플레이션이 엄청났다”며 “재정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가 정계에서도 있었지만 가장 먼저 한 것이 정부가 재정을 딱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정부는 1983년 영점기준예산편성방식(ZBBS)을 도입한 데 이어, 이듬해 예산을 전년도 수준으로 동결했다. ZBBS는 예산편성 단계에서 모든 사업을 영점 기준에서 재검토하는 방식이다. 1980년 30%에 육박하던 물가상승률이 1982~1988년 4~5% 수준으로 안정화됐다.

정부 규모와 경기 측면에서 40년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우석진 교수는 “1980년대에는 제로 베이스 버지팅이 유효했다”면서 “그때는 정부 규모가 크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정부 규모가 훨씬 크다”고 짚었다. 정창수 소장은 “현재 고물가는 원자재 가격 인상 등에 따른 것이지, 1980년대처럼 경기 과잉 때문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군부 정권의 극단적인 재정 운용은 부작용도 낳았다. 긴축재정의 여파로 수십년간 재정 역할이 축소됐다는 분석이다. 황성현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2015년 ‘한국의 1980년대 긴축 재정정책 연구’ 논문에서 “1980년대 긴축재정 운용에 대한 전형적인 평가는 ‘당시의 긴축재정 운용이 물가안정에 기여했지만, 재정 기능의 위축으로 이후 사회간접자본 시설 부족 문제 등을 야기했다’라는 것”이라고 전했다. 황 교수는 “현재(2015년) 우리나라 공공사회복지지출의 GDP 대비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건 기본적으로 세 부담 수준이 낮고 재정 규모가 작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상대적 재정 규모의 급격한 변동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1980년대 재정 규모의 출발점을 낮게 만든 정책이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서비스 제공과 소득재분배, 경기 조절 역할의 소극성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OECD가 지난 1월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 공공사회복지지출의 GDP 대비 비중은 12.3%로, OECD 평균의 61.2% 수준에 그쳤다. 이번에 정부가 긴축 예산을 강행하면, 장기간 나타난 재정 역할의 방기 현상이 되풀이될 우려가 있다.

1980년대 물가 안정화에서 정부 긴축재정이 일부 작용했으나, 전적인 요인이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1973년과 1979년의 제1·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물가가 치솟았다가, 이후 유가 하락세가 이어지면서 물가가 따라 내려간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정세은 교수는 “긴축 재정을 펴서 물가가 잡혔다기보다는 세계적인 상황이 바뀌면서 나타난 저유가 등 대외적인 요인이 컸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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