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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 곤란한 세상에서
 
김종익 | 2024-01-09 09:25:2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인간이란 무엇인가
― 인간다움이 곤란한 세상에서 ―

마쓰무라 게이이치로松村圭一郞
1975년생. 오카야마대학 부교수.
『꺼림칙한 인류학』 『작은 사람들』 등의 저서가 있다.


이래도 되나 싶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직면하고 있다. 시리아에서도, 미얀마에서도, 에티오피아에서도, 우크라이나에서도, 수단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왜 평범하게 사는 시민과 아이들에게 총탄과 폭탄을 퍼부을까. 어떻게 젊은이를 병사로 전쟁터로 보내서, 생면부지의 상대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명령에 저항할 수 없는 걸까. 왜 병사들은 학살과 고문과 강간에 손을 대고 마는 걸까. 어제 오늘에 시작된 일이 아니다. 몇 번이나 반복되어 온 일이다. 그런데 인간이 아직까지도 이 어리석음을 극복할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날마다, 비참한 전쟁 영상과 정보가 난무하는 시대 깊숙한 곳에, 그 물음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에 걸쳐서, 필리핀 일롱고트Ilongot에서 ‘headhunting’ (다른 부족․부락을 습격해서 사람의 목을 베어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풍습 - 역주)을 조사한 미국의 인류학자 레나토 로살도Renato Rosaldo는, 현장에서 경험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기록한다(『Culture & Truth: The Remaking of Social Analysis』, 1990년). 로살도가 일롱고트의 벗에게, 베트남 전쟁 징병 검사에서 자신이 적격 판정을 받았다고 알렸을 때의 일이다.

일롱고트 동료들은 “베트남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 우리 집에 숨겨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병사처럼 행동하며, 자신의 형제(동포)를 전쟁터로 가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동료에게 생명을 위험에 노출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그들의 윤리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headhunting’ 충동을 열띠게 이야기하는 그들이, 미국 징병 제도의 ‘야만스러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말을 듣고, 로살도는 “내가 속한 문화적 세계가 갑자기 기괴해 보이고”, “headhunting에 대해 정결한 자가 부정한 자를 이야기 하듯이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고 썼다.

내가 전공으로 하는 문화인류학은,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구축해 왔다고 하는 단순한 발전 도식에 의문을 던져 왔다. 예전에는 ‘야만’이라든가 ‘미개’로 간주된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근대 사회의 문제를 부각시켜 왔다. “옛날이 좋았다”고 과거를 낭만화 하는 건 아니다. 다른 시대와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차이’를 통해, 의식조차 되지 못한 문제의 소재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자신들의 현재 상태를 모두 긍정하고, 찬미해서는, 어디에 문제의 근원이 있는지, 놓쳐 버린다. 당연히 일상의 밑바닥에 만연하는 문제의 뿌리를 캔다. 인류학의 관점은, 그 때문에 비판적 접근이다.

202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1961~2020년)는,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게 되는 폭력에 대해 고찰해 온 인류학자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단초로, 종종 ‘노예’에 대해 논했다. 노예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은, 마치 물건처럼 취급되는 소유물이며, 소유자가 자유롭게 죽이든지 뭐를 하든지 상관없다고 여겨진다(『부채론』 제6장). 말하자면 노예는 ‘인간다움’을 박탈당한다. 인간은 보통 뭔가 공동체 안에서 역할이나 인격을 부여받고 살아간다. 부모의 자식으로, 손자로, 혹은 형제자매로, 동료와 연인으로…. 인간성이란, 이러한 관계망 그물코의 고유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묶음에서 인간을 떼어내려면, 지속적이고 조직인 대량의 폭력이 필요하게 된다. 노예란, 그리하여 사회관계에서 이름과 동일성과 존엄을 폭력에 의해 빼앗긴 존재다. 그레이버는 이렇게 논한다. 역사상 전쟁 포로가 노예가 된 것은, 인간끼리의 고유한 관계성에서 폭력적으로 분리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레이버는, 이 “전쟁과 정복과 노예제의 유산”은 완전히 소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현대의 시장 경제와 임금 노동과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본래 공동체의 사회관계 안에서 고유성을 가진 인간은, 다른 사물이나 인간과 완전히 등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노예는, 금전으로 거래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문맥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지탱하는 관계성을 잃고, 물건과 다름없이 교환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교환 가능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현대의 임금 노동 속에서, 인간이 ‘비용’으로써 금전으로 환산되어, 일시적이든, 일하는 동안, 그 인간의 자유가 고용주에게 양도되는 상황에도 얼굴을 내민다. 급료만큼 일을 할 때까지는, 당신에게 인간다운 자유 따위는 없다, 고. 노동력으로서의 인간은, 같은 일을 하는 한, 타인과 치환이 가능한 존재가 된다. 인간에게서 고유성을 빼앗아, 계량이 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다움’을 소거하는 장치인 거다.

그레이버도 노예제와 임금 노동이 같다고 하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같은 로직이 잠재해 있다. 그레이버에게 ‘자본주의’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시작된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다양한 활동에 나타난 로직이나 구조가 더 합쳐져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이 ‘인간다움’을 박탈하는 로직은, 노예제와 임금 노동에 한하지 않고, 이 사회의 다양한 장소에 편재해 있다. 예를 들면, 인구 동태와 통계 자료 속에 인간은 수치로 환원되어, 개개인이라는 인간의 고유한 삶의 맥락이 제거된다. 감염자가 몇 명, 사망자가 몇 명이라고 계산될 때, 거기에 있어야 할 고유한 삶의 맥락은 고려 대상이 아니며, 알기 쉬운 범주로 균질화된다. ‘인간다움’을 소거하는 장치는, 이리하여 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 작동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삶을 수치로 파악하고, 관리 대상으로 삼는 인간을 경시하는 시선이 있다. 적군이 얼마만큼 앞에 있고, 거기에 대처하려면 몇 명의 병사를 동원해야 할까. 이러한 전시의 국가적 사고에서는, 한 인간의 목숨이나 죽음의 무게가 누락된다. 이것과 국가가 인구 동태와 감염자 수 등을 통계적으로 파악하고, 그 수치를 통제하려는 사고는, 같은 로직의 연장선상에 있다. 가령 거기에, 어떤 유용성이 인정된다 치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 유용성 때문에, 인간의 고유성을 희생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는 태도야말로, 문제의 뿌리가 있다. 전쟁터에서 적의 시민을 무차별 살육하고, 병사를 비인간화하는 것은, 군사 전략상, 분명 효율적이고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국 수용 시설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도 마찬가지다. 효율적인 인간 관리를 위해, 오히려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요구된다. 전쟁의 폭력의 의한 ‘인간다움’의 박탈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모든 곳에, 그 폭력의 싹이 만연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에 사는 우리도, 이 폭력의 당사자인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현명함’과 표리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적을 죽이는 것이 ‘전과’가 되고, 어떻게 그런 군사적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까가, 뛰어난 ‘전략적 사고’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인간다움을 소거해,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정치적인 현명함의 증거가 된다. 말하자면,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의 대극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이웃하며, 서로를 떠받친다. 오히려 ‘유토피아’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 자체가 ‘디스토피아’를 온존시키는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의 행동을 수치 자료로 파악하고, 인공지능으로 처리하는 시대로 되어 간다. 그것이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희망의 기술로 이야기되는 적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모든 문제가 기술로 해결되는 피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나없이 유용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계량화되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거기에 잠재한 폭력에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이런 질문은, 왜 인간이 전쟁이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지평에 있다.

적과 아군, 일본인과 외국인, 선과 악,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이러한 알기 쉬운 구도로부터 거리를 두고, 복잡하게 뒤엉킨 실을 푼다. 언뜻 보기에 문제의 해결에서는 멀어 보이는, 이 있는 그대로(等身大)의 시선에 머무는 사고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거점이다.
 (『世界』, 202401월호에서)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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