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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 유예해달라’며 제시한 정부 대책, 10개 과제 중 8개는 기존 대책

지원 대상·예산 수치 부각하며 “획기적 지원”이라는 자평도 무색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대재해 취약분야 지원대책 관련 당정협의회 회장 앞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유예연장 폐기' 손 피켓을 들고 있다. 2023.12.27 ⓒ뉴스1
지난 9일, 50인 미만(건설업의 경우 공사금액 50억 미만) 사업장에 대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2년 더 미루는 법안이 1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자 정부는 곧바로 입장을 냈다. “민주당이 제시한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연장 전제조건 충족 및 취약 분야의 대응 역량 획기적 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며 정부가 그동안 취한 조치를 열거하며 항변에 나선 것이다.

정부가 언급한 ‘취약 분야의 대응 역량 획기적 강화’ 조치란, 지난달 27일 당정 협의를 거쳐 정부 합동으로 발표한 지원 대책을 일컫는다. 4대 분야·10대 과제를 선정해 올해 중점 추진 예정이며, 이를 위해 2024년 정부 예산에 간접 투입 효과까지 합쳐 총 1.5조원 규모로 지원한다는 게 이번 지원 대책의 핵심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 정부가 제시한 대책들을 살펴보면, 사업장들이 자체 진단을 하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정부가 기존에 해왔던 대책이 대부분인 것으로 확인된다. 10개의 세부 과제 중 민관합동 중대재해 대책 추진단구성, 산업안전 대진단을 제외하고 8개의 세부 과제가 이미 실행 중이거나 발표한 대책들이 주로 포함돼 있다. 새롭게 제시한 내용 역시 실질적으로 중대재해 예방 지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엔 실효성이 부족한 내용이다.  “획기적”, “전방위적 지원”이라 자평한 정부 대책의 실상이다.

 

 

 

설문조사 또는 체크리스트 형식으로 83.7만개 사업장 ‘자체 진단’,
기존에 진행해 온 컨설팅 지원은 지원 대상만 늘리며 반복


정부가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운 과제는 ‘산업안전 대진단’이다. 5~50인 미만 사업장 83.7만개를 대상으로 ‘전수’ 자체진단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사업장의 중대재해 예방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설문조사 또는 체크리스트 형식의 도구를 개발한 뒤, 각 사업장이 이를 통해 자체적으로 사업장 상태를 진단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대진단 내용을 바탕으로 업종과 재해 현황, 위험 기계 보유 등을 고려해 중점 관리 사업장을 8만개(예상치) 선정하고 컨설팅과 시설개선 등을 패키지로 지원하겠다는 게 큰 골자다.
정부는 산업안전 대진단을 두고 마치 ‘전수조사’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현실적으로 전수조사가 이뤄지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산업안전 대진단을 위한 도구는 현재 개발 중으로, 1월 말 즈음에 현장에 배포할 예정이다. 정부가 밝힌 계획으로는 2월까지 대진단을 통해 ‘중점 관리 사업장’과 ‘일반 사업장’을 선정하겠다는 것인데, 불과 한 달 만에 83만개가 넘는 사업장이 안 해도 그만인 강제성 없는 조사를 모두 마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1월 말부터 대진단을 시작해서 홍보를 해가며 (순차적으로) 83만개 사업장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라며 “꼭 대진단을 마무리하고 지원을 시작할 필요는 없어서 먼저 대진단을 끝내고 지원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온 사업장의 경우 먼저 지원을 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지난달 27일 당정 협의를 거친 뒤 발표한 ' 중대재해 취약분야 기업 지원대책(案)' 골자. ⓒ고용노동부

‘안전보건관리역량 확충 지원’ 분야에서 중점적으로 추진되는 과제는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컨설팅’이다. 컨설턴트가 직접 사업장을 방문해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컨설팅 해주는 사업인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2022년부터 진행해 왔다. 법 시행 직후인 2022년에는 50인 이상 사업장에 우선적으로 지원해 사업장 5800곳에 대한 컨설팅을 마쳤고, 지난해에는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얖둔 50인 이하 사업장을 중심으로 1만 6천곳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정부는 올해 컨설팅 대상을 총 2만 7천곳으로 대폭 늘렸다. 예산 역시 전년도에 비해 79.1% 늘어난 684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컨설팅을 받는다고 해서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요구하는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다. 다만, 기존에 정부가 지원했던 교육, 기술지도, 재정 지원 등의 대책을 병행하면서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하면 된다는 게 정부의 구상이다.

컨설팅은 컨설턴트가 직접 사업장을 방문해 안전관리체계 구축을 위한 7가지 요소들을 5회차(제조업 기준)에 걸쳐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1년 안에 진행할 수 있는 대상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 계획은 지난 2년에 걸쳐 컨설팅한 사업장의 수보다 더 많은 곳을 1년 안에 컨설팅한다는 것인데, 컨설팅이 내실 있게 진행될 수 있을지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기존 컨설팅 사업을 보완해 시행한다는 방침이지만, 보완 대책 역시 아쉬운 수준이다. 컨설턴트가 사업장 내 공정에 대해 위험성평가를 시범실시하고, 이후 사업장이 직접 위험성평가를 할 수 있도록 참관 지도하겠다는 게 현재까지 노동부가 고안한 개선책이다. 위험성평가란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유해·위험 요인을 파악해 개선 대책을 수립·이행하는 제도로, 정부가 2022년 발표한 중대재해로드맵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정부는 지난해까지 위험성평가 의무화를 골자로 한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가, 지난해 말 “추가적인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며 법 개정 추진 시기를 무기한 연장한 바 있다.

이 외에 세부 과제인 ▲안전보건 전문인력 양성 등 지원 ▲안전교육 강화 및 안전문화 확산 ▲안전장비·설비 등 지원 확대 ▲R&D 지원 강화 ▲협·단체 및 산업단지 중심 지원 확대 ▲원·하청 산업안전 상생협력 및 건설분야 하도급 안전관리 강화 ▲안전보건산업 육성 등은 모두 기존 대책을 정리하거나 일부 수정해 발표한 수준에 불과하다.

 

 

 

건설업 특화 대책들도 일부 포함됐지만, “수박겉핥기식 대책” 평가
1월 임시국회서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논의 이어질 듯


건설업에 특화된 대책도 일부 제시돼 있지만, 이 역시 미약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건설업은 전 산업 산재 사망자 중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중대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산업이다. 지난해 12월 29일 확정 발표된 ‘2022년 중대재해 산업재해 현황 분석’ 자료를 보면, 5~50인 미만 사업장과 공사금액 50억 미만 현장에서 나온 산재 사망자 수는 328명인데, 공사금액 50억 미만 현장에서 나온 산재 사망자 수는 218명(66.4%)에 달한다.

정부는 올해 건설업 사업장 1,200곳에 컨설팅을 지원하고, 공사금액 일부를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쓰도록 배정하는 ‘산업안전보건관리비’ 요율을 확대하는 내용으로 고시를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산업안전보건관리비 요율 상향은 그간 노동계에서도 오랫동안 주장해 온 내용이긴 하지만, 건설현장의 중대재해를 예방하는 근본적인 대책은 빠져 있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건설안전기술사이기도 한 함경식 노동안전연구원장은 통화에서 “건설현장 사망사고의 절반 이상은 50억 미만 공사현장에서 나오는데, 이곳에는 안전 관리 업무만을 전담하는 전담안전관리자가 없다. 이런 전담 인력을 어떻게 지원해 줄 것이냐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며 “컨설팅 내용 역시 정작 죽고 사는 건설노동자들의 현실에는 반영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구조적으로도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나 절대 공기 등 근본적인 문제에는 칼을 대지 않고, 수박 겉핥기식 대책을 계속 내놓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국민의힘 유의동 정책위의장, 이양수 원내수석부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이개호 정책위의장,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가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여야 2+2 합의체 회의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3.12.26 ⓒ뉴스1

여야가 1월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하면서 50인(억) 미만 사업장의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다. 공교롭게도 1월 임시국회 본회의는 중대재해처벌법 전면 적용을 이틀 앞둔 25일에 열린다. “12월 말이 지나면 더 이상 협상할 생각이 없다”던 민주당은 정부·여당과 협의 가능성을 계속 열어두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윤영덕 원내대변인은 11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1월 임시국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유예를 재검토하나’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자 “민주당이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해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적용 유예를 얘기하는 정부·여당에 세 가지 전제 조건을 밝혔다”며 “그 숙제부터 제대로 해오셔라. 그러면 저희도 진지하게 협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은 ▲정부의 공식 사과 ▲산업현장 안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재정 지원 방안 ▲2년 후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에 대한 경제단체의 약속 등이다. 정부는 유감 표명만 할 뿐 사과는 하지 않았고, 정부가 연말에 발표한 대책 역시 “2024년 예산안의 포장만 바꿔 놓은 겉핥기식 정책”이라는 게 민주당의 평가다.

다만 현재로선 정부가 추가 대책을 내놓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현재로서 저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지난해 연말에 발표한 대책에 담겨 있다”며 “지금 상황에서 추가 대책을 내놓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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