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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살지는 못할 망정 짐승이 되지 맙시다

박한표  | 등록:2024-01-11 11:17:09 | 최종:2024-01-11 14:01:2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5일)

말은 참 중요하다. 특히 지도자는 말을 더 조심해야 한다. 연초부터 아무 말 잔치에 야당 대표가 죽을 뻔한 타살 사건이 있었다. 그 말은 이 거다. “이권,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을 반드시 타파하겠다.” 이 말은 사용된 용어를 잘 모르고 그냥 뱉아낸 거다. 이 말은 그 카르텔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라는 거다. 그래 이  메시지는 '분노와 증오와 혐오를 권하는 사회'를 만들고, 살해 테러가 나오는 거다.

‘패거리’의 ‘패(牌)’를 낮잡아 부르는 말로, ‘차별과 비하, 적대의식'이 담긴 비속어이다. 같이 어울려 다니는 무리, 대개 나쁜 뜻으로 쓰이는 비속어이다.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는 이준석은 “권력만 노리고 달려가는 패거리 권력 카르텔이 자신들이 뜻하는 대로 안 되면 상대를 패거리 카르텔로 지목하고 괴롭힌다. 이 모든 걸 바로 잡을 방법은 정치 세력의 교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념 팔이를 하면서 이권을 챙기는 관변 단체들이 이권,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인문 운동가의 눈에 카르텔이라는 원리 의미를 모르고 막 사용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카르텔에 대해 잘 설명하였다. 카르텔이란 원래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지 기업들 간의 ‘경쟁 방지 또는 완화를 위한 신사협정’을 말하는 거다. 카르텔이라는 말 대신에 협정이라고 해야 더 사람들이 잘 알아듣는다. 노동자나 농민들은 서로 단결해서 ‘조합’을 만들 수 있을 뿐, ‘카르텔’을 만들 수 없다. ‘마약 카르텔’은 마약을 생산 하고 공급하는 자들 끼리의 협정이지, 마약 소비자들이나 마약 원료 재배자들의 협정이 아니다. 카르텔의 의미를 확장하더라도 본래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다음과 같은 카르텔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 법률 적용과 해석권을 독잠하고 법률 시장을 전면 장악한 ‘법조 카르텔’
   - 거대 신문과 종편을 장악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 카르텔’
   - 의료시장을 독점하고 의대 입학정원까지 통제하는 ‘의료 카르텔’

왜 이렇게 따지냐 하면, 문해력이 부족하면, 자신의 생각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신년사에 담긴 앞의 말은 자기를 반데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라는 자기 지지세력을 향한 선동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산전체주의 세력’, ‘반국가 세력’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름을 붙인 적이 있다. 올 초에는 그들을 다시 “이권,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로 규정하고 있는 거다.

더 심각한 것은 ‘언론 카르텔’이다. 그들은 국민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고객이다. 클릭하기를 바라는 고객들이다. 돈, 아니 떡고물만 보는 거다. '국민통합의 정치’를 하지 않고, ‘편 가르기 정치’를 한다며 맹비난했던 ‘언론 카르텔’은 지도자가 국민의 마음 속 내부에 자기 마음 대로 ‘적’을 지정하고, 그 ‘적’을 타도, 타파,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저속한, 아니 사용된 어휘가 틀린 언어로 표현하는 데도 칭송 일색이다.

수치, 창피함을 모른다. “지치득거(舐痔得車)”라는 말이 있다. 직역을 하면 남의 치질을 핥아주고 수레를 얻는다는 뜻이다. 이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거다. 이 말은 <<장자(莊子)>> 외편 <열어구(列禦寇)>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송(宋)나라 사람 조상(曹商)이라는 자는 송나라 왕을 위해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가 떠날 때는 몇 대의 수레를 받아갔으나, 진나라 왕이 그를 좋아하여 수레 백 대를 더해 주었다. 그가 송나라로 돌아와 장자를 보고는 말했다. “대저 궁색한 마을의 뒷골목에 지내면서 곤궁하여 짚신이나 삼고 비쩍 마른 목덜미에 누렇게 뜬 얼굴로 사는 짓은 내가 잘 하지 못하오. 하지만 만승(萬乘)의 임금을 한번 깨우쳐서 백 대의 수레를 얻어내는 것은 내가 잘 하는 일이오.” 장자가 말했다. “진나라의 임금이 병이 나서 의원을 불렀다오. 종기를 터뜨려 고름을 짜낸 자는 수레 한 대를 받았고, 치질을 핥은 자는 수레 다섯 대를 받았다오. 치료가 더러울수록 더 많은 수레를 받은 것이오. 그대는 그의 치질이라도 고쳐준 것이오?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수레를 받은 것이오? 썩 물러가시오.”

한 마디로 온갖 아부를 하며 치졸하고 졸렬하게 자신의 이득을 얻을 때 쓰는 말이다. 언론이라는 본연의 직무를 망각하고 철저하게 찌라시 행태를 보이며, 더럽고 더러운 위정자의 비위를 맞추는 기사를 쓰는 쓰레기 집단들로 내 눈에 비친다. 이런 집단은 정의도 진실도 없다. 오직 본인들의 이득을 위해 온갖 쓰레기 짓을 일삼는다. 사회를 시궁창으로 만드는 집단이고, 공정해야 할 법과 원칙을 유린하는 데 앞장서는 집단이다.

국가 지도자가 국민의 일부를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국가 공동체를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하고 어떤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 모르는 집단이다. 내 생각으로는, 오히려 그들이 저속하고 파괴적인 굥의 발언을 칭송하는 것은, 이 정권이 법조 패거리와 언론 패거리의 제휴로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본다. 이제까지 언론 카르텔은 언제나 부패한 기득권 패거리들의 동맹이자 나팔수였다.

실제로 ‘이권,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을 반드시 타파하겠다’고 선언한 그 다음 날, 부산에서 이렇게 세뇌된 ‘외로운 늑대'가 야당 대표의 목을 살해할 목적으로 칼로 목을 찌르는 사건이 터졌다. 사회가 이런 식으로 퇴행하면, 사람들의 심성, 아니 인간성도 퇴행한다. 해방 후, 서북청년단원들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나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장면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 야만과 광기의 시대로 다시 되돌아 가고 있는 듯 해서 끔찍하다. 그럴수록 인문 운동가의 노력이 더 필요한 시대라 생각 잠을 이룰 수 없다.

전우용 교수는 “이젠 ‘사람답게 살지는 못할 망정 짐승이 되지 맙시다’라는 호소도 때늦은 듯하고”, 짐승처럼 살지 언정 악귀가 되지 말자고” 했다. 언젠가 그가 말한  ‘악귀(아귀) 이야기”를 다시 소환한다. 물고기 중에 아귀라는 게 있는데, 본래 ‘굶어 죽은 귀신 또는 굶주린 귀신’이란 뜻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냐 하면 이제 생선은 대가리라 그러는데, 물고기는. 그 다음에 입이라고 안 하고 아가리라고 그래요. 대가리의 대부분은 아가리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고 기능은 없고 탐욕 기능만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좀 동물처럼, 이런 물고기처럼 이익만 된다면 어떤 사고 기능이 마비된 채 자기가 과거에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잊어버리는 또는 자기가 어떤 주장을 지지했는지 조차 잊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래 이런 글이 나온다. “일본의 #후쿠시마 #핵폐기수 해양 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국가세력”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일본의 ‘反 환경적, 反 생명적 행위’에 반대하는 게  대한민국에 대한 ‘反 국가 행위’라는 생각은 ‘일본인’도 못합니다. ‘사람’은 결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나 ‘악귀 같은 놈’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닙니다.”(전우용)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한가한 연초의 틈을 타고,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계의 거장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사람보다 원칙이, 배려보다는 절차가 우선인 현실에 화가 난, 주인공 다니엘은 잠시 화를 식히기 위해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그곳에서 케이티 가족을 마주친다. 케이티는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미혼모였으며, 그녀 또한 관공서 측의 관료적 일 처리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다니엘은 케이티를 돕기 위해 함께 분노하며 관공서의 직원과 맞서 싸운다. 비합리적 원칙만을 강조하는 직원과 복지제도의 사각지대,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서 소외 당하는 디지털 취약계층에 대한 무언의 협박이 그들을 궁지로 몰아 놓고 있었다. 그들은 나는 한 사람의 시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원한다며, 이렇게 서로 다독인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거요”

인상적이고, 마음이 뭉클했던 장면은, 답답한 현실에도 할 수 있는 게 없던 주인공 다니엘이 스프레이로 센터 벽면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쓸 때였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소 요구를 받아들여라”. 이에 지나가던 행인들은 멈춰 서서 그에게 열렬한 지지와 격려의 박수를 보냈 다. 이후 그는 질병 수당 자격심사 문제에 대한 항고를 신청하러 갔으나, 결국 항고 재판에 참여하기 직전 심장마비로 쓰러져 목숨을 잃게 된다. 다니엘의 승소를 누구보다 기원 했던 케이티의 울부짖는 목소리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다음의 영화의 끝 장면으로, 재판에서 다니엘이 전하려 했던, 그러나 끝내 전하지 못했던 메시지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속의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며칠 동안, 내 귀에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라는 대사 떠나지 않았다.

복지는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리고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존재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처절함을 ‘스스로’ 증명해 내지 못하면서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보장받지 못했다. 선택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는 복지도, 생존도, 인간의 존엄성도 없었다. “코코넛과 상어 중 뭐에 사람이 더 많이 죽 게?”라는 다니엘의 질문에 며칠 동안 고민하던 케이티의 아들 딜런은 “코코넛이에요”라 답했다. 다니엘과 딜런이 떠올렸던 코코넛과 상어는 무엇이었을까. 코코넛은 복지제도의 모순과 오류들을 뜻한 것 아닐까. 희망을 줄 것처럼 달콤해 보였던 코코넛이 상어와 같은 가난과 빈곤의 위협보다 더욱 위험해 보이는 현재, 오늘도 다니엘들은 또다시 코코넛에 희망을 건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것을 방해하고, 차단하는 시스템. 그 어리석고 잔인한 시스템 속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밀려난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부축하며 살아가는 모습들.  나만 바보 같아서, 재수없어서 힘들었던 게 아니란 사실을 켄 로치가 등 두드리며 말해준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이건 다니엘이 캐시에게 한 말인 동시에 감독이 관객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켄 로치가 우리 편이라 다행이고  칸느영화제가 이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줘서 고맙다. “당신이 우리가 힘들 때 도와주었는데, 왜 우린 당신이 힘들 때 도울  수 없는 거죠?” 아이가 상처받은 다니엘에게 말한다. 도움을 주고,  도움 받으면서 우린 강해지고 뜨거워진다. 로봇이 되어버린 인간들의 세상에서 살아남은 뜨거운 인류가 손을 잡을 시간이다.” 목수정 작가의 담벼락에서 읽은 거다.

지난 연말 연휴부터 김기현 교수의 <<인간다움>>(21세기북스)을 읽고 있다. 잘 정리하여 공유할 생각이다. 이 책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구성 요소와 형성 과정, 인간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저자는 “현대인들은 인간다움에 대한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환경 변화나 경제적 측면에 관심이 쏠려 있지만,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다움의 핵심 가치로 공감, 이성, 자유(자율)를 꼽고, 이 세 가지를 축으로 현실에서 구체화한다고 말한다. 인간다움은 ‘공감을 연료로 하고, 이성을 엔진으로 하며, 자유로써 규범을 구성하는 성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 역사를 통해 이러한 요소가 문명의 형성과 함께 잉태되고, 인류 자산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추적한 후, 인간다움은 귀중한 자산이라며 “인간다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미래 사회의 모습이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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