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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이나 난방기 없이도 잘 사는 나라?

[목수정의 바스티유 광장] 지열 에너지 개발에 한창인 파리의 에너지 혁명

24.09.15 18:29최종 업데이트 24.09.15 18:29

▲ 지난 8일(현지시간) 프랑스 생드니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2024 파리 패럴림픽 폐회식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8일 파리 패럴림픽이 끝나면서 7월 26일 시작된 파리 올림픽 이후 모든 대회가 종료되었다. 7월 초 국내 언론들은 환경올림픽을 표방한 파리 올림픽에서 선수촌 아파트에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할 선수들을 걱정하고 파리올림픽 조직위를 비난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쾌적한 선수 숙소를 위해 에어컨이 필수라 여기는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었다. 에어컨 미설치 문제는 참가국 대표단 회의에서 여러차례 다뤄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한발 물러난 조직위는 원하는 선수단에 한해 에어컨 설치를 허용했고 7500개 숙소 가운데 2500개 숙소에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2/3에 해당하는 나머지 선수단 숙소에는 아무런 냉방 시설이 없었는데 선수들이 무더위에 시달렸을까?

파리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는 지열에너지 건물로 여름에 에어컨이나 겨울에 히터가 따로 필요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2020년 1월부터 3년 6개월에 걸쳐 건설된 지열에너지 발전소와 연결되어 선수촌 내 모든 공간은 80미터 지하에서 끌어올린 물이 바깥 기온보다 6도가량 낮은 상태로 실내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파리의 7월 평균 최고 기온이 26.5도이고 각 숙소에 선풍기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에어컨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조직위가 판단한 것이다.

일부 선수단의 에어컨 반입 결정에 대해 40개 에너지전환단체 연합인 '에너지전환 네트워크(CLER)의 다니엘 드브뢰일 대변인은 "지열에너지에 대한 정보와 신뢰가 부족했던 탓"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결정은 선수촌 내에 에어컨이 방출하는 열기를 통한 열섬 현상을 초래하여 다른 입주자들에게 불편을 끼칠 수 있다"면서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평했다.

파리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는 올림픽이 끝난 후 지역 주민을 위한 주거 공간으로 활용된다. 선수촌 아파트를 위해 지어진 지열에너지 발전소는 선수촌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 냉난방을 공급하게 된다. 시공사인 엔지 솔루션(Engie Solutions)은 지열 발전소 건설과 네트워크 공사에 2900만 유로(약 428억 원)가 소요되었고 별도의 냉난방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시스템으로 연간 5만 6000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파리의 지열 에너지

▲ 프랑스 최초의 지열에너지 건물 '라디오 프랑스' ⓒ 위키미디어 공용

파리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가 지열 에너지를 이용해 냉난방을 해결한 최초의 시도는 아니다. 1973~74년 석유 파동 당시 파리 동쪽 외곽 지역인 발드마른(Val de Marne)에서 지하 온수가 발견되면서 프랑스 지열 에너지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발드마른은 지자체 차원에서 수십 개의 지열발전소를 건설하고 난방 네트워크를 설치해 현재 세계에서 지열 발전소가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다가 원자력이 등장하면서 지열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일부 기업은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그르넬환경협정과 2009년 지열발전기금 창립이 업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에너지 자원 감소와 기후 변화라는 지구적 과제가 지열에너지를 다시 주목받게 하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 최초의 지열 에너지 건물은 파리 16구에 위치한 라디오 프랑스(La Maison de la Radio France)다. 석유 파동이라는 발등의 불이 떨어지기 10년이나 전인 1963년,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앙리 베르나르의 결정에 따라 라디오 프랑스는 설립 초부터 재생에너지 냉난방 시스템을 갖췄다.

여러 공영 방송사와 음악 공연장, 상설 오케스트라 등이 입주한 10만m²의 거대한 공간은 지하 600m에서 끌어올린 물을 통해 쾌적한 실내 온도를 유지해 왔다. 겨울에는 스튜디오 활동에서 발생하는 열을 회수해 시스템을 백업하기도 하고, 여름에는 냉방을 위해 찬물을 순환시켜 왔다. 60여 년 동안 이 건물을 덥히고 식혀온 물은 센강으로 방류되어 바다로 흘러가며 지속적으로 순환되는 효과적 재생에너지임을 입증해 왔다.

항공 여행은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주범으로 지목돼 왔지만, 파리의 두 공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 온 대표적 기관이기도 하다. 파리의 오를리 공항은 2010년부터 자체적인 지력 발전소를 갖추고 1800미터 지하의 물을 이용해 에너지를 공급해 왔다.

현재 오를리 공항에서 사용되는 냉·난방에너지의 50%를 공급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 0을 목표로 한다. 오를리 공항은 1996년부터 빗물을 모아 매년 올림픽 수영장 1.5개에 해당하는 물을 절약하고, 기내에서 사용하지 않은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등 에너지 재생과 관련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파리 북부에 있는 샤를 드골 공항도 2026년 지열을 통한 에너지 공급을 위해 공사를 하고 있다. 이 공사가 끝나면 샤를 드골 공항은 냉난방 수요의 32%를 지열로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파리 뤽상부르그 공원 옆에 자리한 상원도 2017년부터 지열 에너지를 사용하기 시작해 냉난방의 70%를 지열에 의존하고 있다. 대통령궁인 엘리제궁도 이 대열에 합류해 2024년 가을부터 기존의 화석 연료 대신 냉난방의 87%를 지열 에너지로부터 공급받게 된다.

▲ 프랑스 일드 프랑스 지역의 지열에너지 보급 현황을 보면 30만 이상의 가구가 지열에너지로 난방을 하고 있다. 발드마른 지역엔 18개의 발전소가 있어 가장 지열에너지 보급율이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 프랑스지열에너지협회

프랑스의 수도권인 일드 프랑스(Ile de France)는 프랑스 지열 에너지 생산량의 82%를 차지하는 선도적인 지역이다. 약 50개의 네트워크를 통해 현재 약 100만 명(일드프랑스 인구의 8%)의 주민들에게 지열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일드 프랑스 지자체는 2016년부터 지열 에너지 확대를 위해 1억 5000만 유로(약 2212억 원)를 투자해 왔고 장기적으로 생산량을 두배로 늘리고자 한다.

파리-일드프랑스 지역 에너지 소비량의 69%가 교통수단이 아닌 주택과 건물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지역의 탈탄소화를 위한 주요 과제는 주택·건물에서의 에너지 전환인 셈이다.

중앙 정부 차원에서도 지열 에너지로 난방 시스템을 교체하려는 가정에 최대 1만 1000유로(약 1622만 원)를 지원하면서 재생에너지 전환을 적극 장려하고 있어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일 년 내내 생산되고 순환... 완벽히 재생 가능 에너지

▲ 2023년 12월 22일(현지시간) 파리 올림픽 선수촌에 전력을 공급할 프랑스 생드니의 지열 에너지 발전소 안으로 작업자가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중국, 미국, 뉴질랜드, 멕시코, 러시아, 인도네시아, 일본, 케냐 등 전 세계 20여 개 나라가 지열 에너지를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이슬란드와 필리핀이 가장 선도적인 국가로 꼽힌다. 나라 전체가 화산섬인 아이슬란드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고 있고 난방의 90%를 지열로 공급한다. 화산 활동으로 발생하는 풍부한 지열에너지가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전력의 28%를 지열 발전으로 생산하는 최대 소비국으로 꼽히기도 한다. 화산 지형이라는 특징을 가진 나라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특별한 지형적 이점을 갖지 않은 나라들도 안전하고 풍부한 재생에너지인 지열 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열 에너지는 온실가스도 배출하지 않고 경관을 해치지도 않으며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도 않는다. 또한 지하에 있는 유한한 자원을 채취해 고갈시키지도 않는다. 지하수가 있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 년 내내 생산되고 순환되기 때문에 완벽히 재생 가능한 에너지다. 도심에 열섬 현상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여름엔 실내를 냉각시키고 겨울엔 실내를 덥힌다.

라디오 프랑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시간이 지나도 안정적으로 가동되는 신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원자력처럼 처리 난감한 쓰레기를 배출하지도 않는다. 현시점에서 지적되는 기술적 제약은 시추공을 서로 가까운 곳에 뚫을 수는 없다는 점 정도다. 물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 올려야만 한다. 지열 발전소를 짓고 네트워크를 건설하려는 지자체의 경우 초기 비용이 상당히 소요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미래를 위한 후회 없는 투자가 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지열 에너지가 약속할 수 있는 냉방의 수준은 바깥 기온보다 최대 6~8도까지 실내 기온을 내려주는 데 머물러 있다. 이는 현재까지 도달한 기술의 한계일 수도 있고 프랑스인들이 판단하는 적정선일 수도 있다. 여름에 실내 기온을 더 낮게 맞춰놓고 살아온 우리에게 이 정도의 냉방은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여름 기온이 프랑스보다 높고 습도도 상당한 수준인 우리나라가 직면할 수 있는 문제점이다.

하지만 에어컨의 가장 사악한 단점인 '안을 식히기 위해 밖을 덥히는 일'은 피할 수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기록적으로 더워지는 여름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언젠가는 내 방안을 식히기 위해 지구를 더 뜨겁게 달구는 모순을 중단하는 길에 들어서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 #지열에너지 #파리 #파리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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