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노선 건설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재 요코하마역에서 최초의 역인 사쿠라기초 역까지 가는 길은 바다와 접한 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매립하고 제방을 쌓아 레일을 설치한 것이었다. 신바시 쪽에서 나가는 기차의 레일을 까는 작업도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신바시에서 요코하마를 가기 위해 지나치는 시나가와역 인근도 원래 바다였다. 당시 시나가와역 인근 다카나와의 주민들이 토지 수용을 반대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다카나와 지역 만을 따라 제방을 쌓기로 결정했다. 바다를 메우고 제방을 쌓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었다. 제방 공사 도중 붕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신바시역에는 당시 제방의 흔적들을 발굴 중이라는 내용의 전시물이 붙어 있다. 이미 유실된 줄 알았던 제방의 교량 등이 시나가와역 증축 공사 과정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근대 산업 유산’을 대하는 일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일본 당국은 당시 제방의 교량이 서양 건축 기술과 일본 전통 건축 기술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 영국에서 온 '오야토이 가이코쿠진' 모렐은 자신이 설계한 일본 최초의 철로 개통식을 보지 못했다. 개통식 전인 1871년 9월 23일, 그는 오동안 앓고 있던 결핵이 악화돼 30대 초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지금 모렐과 그의 부인은 요코하마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모렐의 묘비는 기차표 모양이라고 한다.
일본 대도시의 번쩍번쩍한 건물들 틈새에서 일본 최초의 철도가 운행한 흔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그 초라한 유적과 기록들은 일본이 근대로 진입하기 위해 노력한 발판의 흔적이다. 메이지 유신은 어마어마한 속도전이었다. 최초의 철도를 빠른 시간에 개통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하고 레일을 놓느라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됐다. 시행착오의 대가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메이지유신을 거쳐 산업 국가로, 국민 국가로 나아가는 일본은 거대한 리바이어던처럼 움직였다. 서양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바심,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이자 환희와도 같은 것이었을 테다.
팽창의 욕망은 결국 아시아로 향했다. 1895년 대만이 일본에 양도된 후, 일본은 대만에 철도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건설한 중국의 만주 철도(만철)은 사실상 식민 정부의 기능을 수행한 종합 회사였다. 팽창욕은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게 된다. 근대의 실패는 그렇게 2차대전 패망과 함께 전 세계를 찾아왔다. 인간은 비로소 '이성'과 '발전', '과학 기술'과 '산업의 쓰임새'에 대해 윤리적 고찰을 하기 시작하면서 ‘현대’로 진입한다.
사실 일본 철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근대 산업 유산으로서 철도에 대한 자긍심도 엄청나다. 도쿄 북부 오미야에 있는 철도 박물관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철도와 관련된 온갖 지식들이 실물 기차와 함께 전시돼 있다. 일본은 철도 건설을 위해 서구의 기술과 지식을 배웠지만, 서구를 넘어서는 수준의 큰 부흥을 일으켰다. 일본의 ‘성공 신화’ 스토리의 이면엔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일본이 들여온 조선 반도의 철도는 '수탈'의 상징이란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아 있다.
최근 일본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섞인 사도광산이나 군함도를 '일본 산업 유산'이란 이름으로 묶어 유네스코에 등재했다. 이른바 '잃어버린 N년'으로 불리는, 스스로 '정체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자긍심을 다시금 고취시키기 위한 우익들의 프로젝트라는 설명은 꽤 합리적으로 다가온다. 실제 이런 움직임이 본격화 된 것도 일본 우익의 상징이었던 아베 정권 때였다. 그래서인지 일본을 다닐 때마다 항상 양가적 감정이 드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다. 그럴수록 일본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 기사는 박흥수 작가의 책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후마니타스)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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