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실 판은 이미 바뀌고 있었다. 비핵화도 협상 의제로 삼으면서 대미 관계 정상화를 최대 목표로 삼았던 조선은 협상 시한으로 제시한 2019년이 지나면서 기존의 목표를 접고 '안보는 핵으로, 경제는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으로, 외교는 중국·러시아 중심으로 삼겠다'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중국은 조선의 핵무장을 사실상 묵인해 왔고, 러시아는 북핵을 사실상 인정했다.
심지어 일본조차도 조선과의 정상회담을 타진하면서 비핵화 요구 수위를 크게 낮춰왔다. 이 와중에 돌아온 트럼프 진영은 물론이고, 의회에서도 비핵화를 '죽은 단어'처럼 취급하고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지난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발표한 정강정책에서 '비핵화'를 포함시키지 않은 것에서도 이러한 기류를 읽을 수 있다. 미국 내 여러 싱크탱크와 전문가들도 비핵화보다는 군비통제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윤석열 이후 한국'의 선택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이 확정되어 조기 대선이 실시될 경우, 차기 정부의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거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비핵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입구'나 '중간 단계'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비핵화 달성은 물론이고 협상조차도 불가능해진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다. 특히 '선 비핵화' 노선을 고수할수록 북미대화 국면에서 소외될 공산도 커진다.
둘째는 비핵화를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라고 밝히면서 이를 '출구' 쪽에 두고는 우선은 긴장완화와 군비통제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2기 트럼프도 이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여러 전문가들도 이러한 주문을 하고 있는 만큼, 차기 정부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일 공산은 크다. 다만 이러한 입장은 비핵화는 끝났다는 조선의 입장과 여전히 거리가 멀어 비핵화라는 종착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또 조선의 핵무장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라는 반발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끝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접근을 도모하는 것이다. 30년째 실패를 반복해 온 비핵화 대신에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를 핵 문제 해법으로 삼는 것이 그 골자에 해당된다. 나는 이 선택이 여러모로 유의미하다고 본다.
우선 한반도 비핵화에는 '합의된 정의'가 없었고 이것이 협상에 실패한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반면에, 비핵지대에는 명확한 정의가 있다. 해당 지역의 비핵화뿐만 아니라 공식 핵보유국들이 해당 지역의 국가에 대해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으며,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국제법적으로 약속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비핵지대는 비핵화 불가론을 외치고 있는 조선에 생각해볼 여지를 줄 수 있다. 조선이 과거에 주창했던 '조선반도 비핵화'와 친화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재를 앞세운 '압박을 통한 비핵화'가 실패한 만큼, '공감을 통한 비핵지대'를 도모해야 할 때라는 뜻이다.
물론 한반도 핵문제 해법의 방식으로 비핵지대를 추구한다고 해서 이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또 하나의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이었다면, 앞으로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통한 비핵지대 실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이자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최근에 쓴 책으로는 <청소년에게 전하는 기후위기와 신냉전 이야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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