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한국교회를 구해야 한다

 

파시즘 체제와 유착, 대형화 웰빙 추구로 극우화

애초 한국 원신앙, 이기이원론, 유교윤리가 기반

일제 강점기 항일참여 여부로 가톨릭-개신교 갈려

미국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에서 사실상 국가종교화

새는 양 날개로 난다지만, 한국교회는 ‘극우주의’와 ‘웰빙’이라는 양 날개로 추락중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외형적인 몰락에 접어든 한국교회는 2025년 12월 3일, 윤석열이 저지른 불법계엄을 옹호하는 것으로 영적·도덕적 파산을 맞았다. 전광훈이나 손현보 목사 같은 이들이 윤석열을 ‘하나님이 세운 사람’으로 내세우며 계엄령을 신탁인 양 여길 때,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아무도 저들을 질책하지 않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아사미 마사카즈와 안정원은 『한국 기독교, 어떻게 국가적 종교가 되었는가』(책과함께,2015)에서 “일본에서 기독교가 거의 수용되고 있지 않음을 고려한다면, 한국 기독교를 둘러싼 현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8쪽)라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기독교를 말할 때 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 양측을 다 포함하지만, 한국에서는 양자를 엄밀하게 구분한다.

1784년, 이승훈(1765~1801)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최초의 신자가 되면서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왔다. 사은사(謝恩使)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갔던 그는 자연과학 서적을 수집하면서 천주교 관련 서적도 함께 수집하게 되었고 프랑스 신부까지 접촉하게 됐다. 귀국한 이승훈은 사제를 대신해 세례를 베풀었는데[代洗], 새로운 신자는 대부분 양반 계급이었다. 이들은 관학(官學)이던 성리학에 의문을 품고 학문적 모순과 사회를 개혁할 원리를 찾는 중에 천주교를 연구하게 되었다.

 

서울 명동성당 전경.

천주교는 종교가 아니라 서학(西學), 즉 유럽의 학문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신 앞에서의 평등을 가르치는 천주교는 엄격한 신분 질서 아래 억압당하던 하층계급으로 빠르고 널리 퍼져나갔다. 1791년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해교난(辛亥敎難) 이후, 약 100년 동안 되풀이된 교난에서 희생당한 천주교 신자의 숫자가 그것을 증명한다.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약 3000명,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 때 113명, 1866년에서 1871년까지의 병인교난(丙寅敎難) 때 약 8000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당시의 인구를 감안하면 천주교 교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사미 마사카즈와 안경원의 말대로 “조선 기독교의 역사는 곧 조선가톨릭교회의 박해와 순교의 역사였다.”(94쪽) 그러나 오늘의 한국에서는 1879년, 천주교보다 약 1백년 늦게 세례자를 배출했던 개신교가 기독교를 대표한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화이지만, 천주교 사제보다 뒤늦게 한반도에 당도한 개신교 전도사는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들과 접촉했고 그들에게서 조선말을 배웠다. 그러기만 했을까? 신천지가 기성 교단의 신자를 빼가듯이, 천주교 신자를 개종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개신교가 득세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조선 왕실 500년을 지켜주던 중국이 아직 서구의 간섭과 침략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건재했다. 그래서 서구는 조선에서 무수한 순교자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으나, 개신교가 들어올 즈음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하여 중화질서가 급속히 해체되는 때였다. 신미교난(1871)을 마지막으로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구와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상 숭배를 중시하는 유교와 제사를 우상 숭배로 간주한 기독교 교리가 대립하면서 조화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천주교 박해의 원인이다. 이 사실만 보면 유교의 가르침을 목숨 걸고 따랐던 조선인이나 그 뒤의 한국인은 영영 기독교를 배척해야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한국 기독교, 어떻게 국가적 종교가 되었는가』는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깊이 침투한 요인을 이렇게 짚었다. ①한국의 원신앙(原信仰)이 일신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신교인 기독교를 수용하는 기반이 되었다. ②조선시대에 주자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③유교 윤리를 중시하는 자세가 기독교 윤리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④일제 강점기에 기독교가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①~③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데 유교가 오히려 유리한 기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 ④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다.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개신교는 민족주의와 굳게 결합했고, 독립 투쟁에 적극적이었다. “사실 항일운동의 중심이던 독립협회 지도자의 대다수는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교회가 항일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907년부터 일본은 항일운동의 거점이 교회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136쪽)

지은이들은 한국전쟁 후 개신교회가 확대되어가는 반면에 가톨릭교회가 현저하게 열세가 된 이유 중 하나로 가톨릭교회가 식민통치에 침묵했던 사실을 든다. “가톨릭교회는 식민지 시대에 항일운동에 관여하는 것을 꺼렸고 신사 참배 문제에서 보듯이 정치적 발언을 회피해왔다.”(147쪽) 가톨릭교회는 항일운동과 더불어 고양된 민족의식을 수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때 미국에 다녀온 유학생 태반이 기독교 신자이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인 사람들이었다. 반면 가톨릭교회의 경우 미국 유학 경험자가 거의 없었다.

해방 직후 미군은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활동한 경험을 가진 선교사들의 정보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 통치 책임자였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존 리드 호지는 민주주의와 기독교 선교를 구별하지 않고 미 국무성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할 정도로 신생국의 기독교화를 강력하게 지원했다. 초대 대통령이자 개신교 신도인 이승만의 제1공화국(1948~1960)에서 기독교는 사실상 국가 종교의 역할을 했다.『한국 기독교, 어떻게 국가적 종교가 되었는가』는 전광훈·손현보 등이 퍼트리고 있는 기독교입국론(基督敎立國論)의 뿌리가 해방 직후, 남한에 진주한 미 군정청의 정책과 닿아 있다고 암시해준다.

 

윤석열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개신교 목사 전광훈, 손현보 씨.

배덕만은 『전광훈 현상의 기원』(뜰힘, 2025)에서 전광훈의 신학적으로 이단적인 행태와 극우주의 정치 행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전광훈 현상’은 한국 개신교계에 돌출한 이질적이고 일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계의 역사적·구조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가 반공과 친미주의에 치우치면서 비도덕적이고 비민주적으로 행동하게 된 극우화의 원인을 네 가지로 꼽았다. ①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월남한 교인들에 의해 남한의 교회가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고향, 재산, 가족, 교회를 잃어버린 월남한 교인들은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분노와 공포를 집단적 무의식이자 삶의 양식으로 내재화했다. 동시에 자신들에게 삶의 공간과 신앙의 자유를 제공한 미국과 그들이 추구하는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종교화하게 되었다. 제주 4·3사건에서 도살자 역할을 맡았던 서북청년단은 월남한 목회자였던 한경직이 세운 영락교회 청년회와 동일 조직이다.

②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파시즘 체제와 맺은 끈끈한 정교 유착과 거기서 얻은 기득권. ③한국 교회가 초창기부터 수용했던 근본주의적 신앙과 신학. 근본주의는 한국에서 우익 정부와 배타적 일치, 숭미와 반북, 진보적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극단적 적대감으로 표출되었다. ④한국 교회가 처한 존재론적 위기감이 초래한 종말적 광기. 한국 교회는 21세기에 진입하면서 빠르게 신자들이 이탈하고 교세가 급감하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교회가 반성과 개혁 대신, 문제의 원인을 페미니스트·종북좌파·이단·동성애자·외국인(중국인·무슬림)에게 돌리게 된 것. 여기에 한국 교회가 미국의 기독교 민족주의자(기독교 우파)의 기독교 국교화 전략을 따라하고 있다는 것을 추가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보수화와 극우화에 대해 여러 권의 책을 쓴 김진호는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오월의봄, 2020)에서 현재 쇠락을 거듭하고 있는 대형교회의 극우주의보다는 그가 만든 개념인 ‘웰빙보수주의’ 현상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IMF를 막 극복한 2000년대 초반에 수입되어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태도’에 두루 쓰이는 웰빙(well-being)은 중상위 계층이 주도하는 계급 현상이다. 지은이는 강남에 몰려 있는 대형교회가 웰빙보수주의의 문화적 실천 장소가 되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2000년대 이후 교회에서는 가난이 사라져갔다. 특히 그 무렵 급성장한 교회들은, 대부분이 강남권에서 성공을 이룬 덕에,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고 권력을 가진 자들로 채워졌다. 바야흐로 가난의 기억 자체가 없는 이들의 교회가 대두하고 있다.”(127~128쪽)

현재 신천지는 한국의 개신교 주류로부터 이단이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모든 대형교회와 목사들은 이단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젊은 여 집사에게 빤스 내려라. 한번 자고 싶다 해보고 그대로 하면 내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라고 호기롭게 떠벌이는 전광훈 말이다. 김진호는 “2000년대 어간부터 한국 개신교에서 이탈한 이들 중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이들의 다수가 신천지로 이동했다”(266쪽)면서, “교회가 잊어버린 약한 자들을 향한 위로와 치유의 기능은 신천지에서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그것이 2000년대 신천지의 광속 성장 비결이다.”(268쪽)라고 말한다. 주여, 한국교회를 구해줍소서!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