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는 종교가 아니라 서학(西學), 즉 유럽의 학문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신 앞에서의 평등을 가르치는 천주교는 엄격한 신분 질서 아래 억압당하던 하층계급으로 빠르고 널리 퍼져나갔다. 1791년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해교난(辛亥敎難) 이후, 약 100년 동안 되풀이된 교난에서 희생당한 천주교 신자의 숫자가 그것을 증명한다.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약 3000명,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 때 113명, 1866년에서 1871년까지의 병인교난(丙寅敎難) 때 약 8000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당시의 인구를 감안하면 천주교 교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사미 마사카즈와 안경원의 말대로 “조선 기독교의 역사는 곧 조선가톨릭교회의 박해와 순교의 역사였다.”(94쪽) 그러나 오늘의 한국에서는 1879년, 천주교보다 약 1백년 늦게 세례자를 배출했던 개신교가 기독교를 대표한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화이지만, 천주교 사제보다 뒤늦게 한반도에 당도한 개신교 전도사는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들과 접촉했고 그들에게서 조선말을 배웠다. 그러기만 했을까? 신천지가 기성 교단의 신자를 빼가듯이, 천주교 신자를 개종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개신교가 득세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조선 왕실 500년을 지켜주던 중국이 아직 서구의 간섭과 침략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건재했다. 그래서 서구는 조선에서 무수한 순교자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으나, 개신교가 들어올 즈음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하여 중화질서가 급속히 해체되는 때였다. 신미교난(1871)을 마지막으로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구와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상 숭배를 중시하는 유교와 제사를 우상 숭배로 간주한 기독교 교리가 대립하면서 조화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천주교 박해의 원인이다. 이 사실만 보면 유교의 가르침을 목숨 걸고 따랐던 조선인이나 그 뒤의 한국인은 영영 기독교를 배척해야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한국 기독교, 어떻게 국가적 종교가 되었는가』는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깊이 침투한 요인을 이렇게 짚었다. ①한국의 원신앙(原信仰)이 일신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신교인 기독교를 수용하는 기반이 되었다. ②조선시대에 주자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③유교 윤리를 중시하는 자세가 기독교 윤리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④일제 강점기에 기독교가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①~③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데 유교가 오히려 유리한 기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 ④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다.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개신교는 민족주의와 굳게 결합했고, 독립 투쟁에 적극적이었다. “사실 항일운동의 중심이던 독립협회 지도자의 대다수는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교회가 항일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907년부터 일본은 항일운동의 거점이 교회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136쪽)
지은이들은 한국전쟁 후 개신교회가 확대되어가는 반면에 가톨릭교회가 현저하게 열세가 된 이유 중 하나로 가톨릭교회가 식민통치에 침묵했던 사실을 든다. “가톨릭교회는 식민지 시대에 항일운동에 관여하는 것을 꺼렸고 신사 참배 문제에서 보듯이 정치적 발언을 회피해왔다.”(147쪽) 가톨릭교회는 항일운동과 더불어 고양된 민족의식을 수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때 미국에 다녀온 유학생 태반이 기독교 신자이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인 사람들이었다. 반면 가톨릭교회의 경우 미국 유학 경험자가 거의 없었다.
해방 직후 미군은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활동한 경험을 가진 선교사들의 정보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 통치 책임자였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존 리드 호지는 민주주의와 기독교 선교를 구별하지 않고 미 국무성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할 정도로 신생국의 기독교화를 강력하게 지원했다. 초대 대통령이자 개신교 신도인 이승만의 제1공화국(1948~1960)에서 기독교는 사실상 국가 종교의 역할을 했다.『한국 기독교, 어떻게 국가적 종교가 되었는가』는 전광훈·손현보 등이 퍼트리고 있는 기독교입국론(基督敎立國論)의 뿌리가 해방 직후, 남한에 진주한 미 군정청의 정책과 닿아 있다고 암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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