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인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은 한겨레 창간 당시 민족일보의 지령은 넘겼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다는 임재경 초대 편집인의 회고를  소개하면서,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장을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생각했던 선배 언론인들의 뜨거운 의식을 그리워했다. [사진-조천현] 
제7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인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은 한겨레 창간 당시 민족일보의 지령은 넘겼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다는 임재경 초대 편집인의 회고를  소개하면서,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장을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생각했던 선배 언론인들의 뜨거운 의식을 그리워했다. [사진-조천현] 

"신생 언론인 <한겨레>가 권력의 탄압으로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민족일보>의 지령(紙齡)은 넘겼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다."

제7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인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이 기억하는 임재경 <한겨레> 초대 편집인의 회고에는 온몸을 전율케하는 비장함, 그 이상의 뜨거움이 느껴진다.

백두산 천지 사진 아래 "백두산·천지, 그 넘쳐 흐르는 맑은 가슴은 43년 넘어 삭이고 또 삭이는 우리들 그리움의 끝이자 희망의 시작이다"라는 웅혼한 격정을 담아 창간호를 낸 송건호 발행인과 리영희 논설고문, 임재경 편집인, 성유보 편집위원장을 비롯한 <한겨레> 창간 주역들이 몇번이고 되새겼을 다짐이었으리라. 

공덕동 사옥 옥상에서 창간 20주년 기념 파티를 하던 2008년 5월 어느 날의 일로 기억했다.

지난 9일 오후 종로구 4.9통일평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김 이사장은 "나보다 윗 선배들은 <민족일보>의 폐간과 조용수 사장의 죽음에 대해 굉장히 깊게 기억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때의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서 이번 조용수언론상 수상 소감에 꼭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는 김 이사장에게 같은 시기 수감생활을 했던 인혁당 선배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처형된 처형된 사건이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새겨진 것처럼 자신보다 10년 정도 윗 선배들에게도 <민족일보>의 강제 폐간과 조용수 사장의 사형은 뇌리에 각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선배들은 적어도 그 분(조용수)의 유지라고 할까, 그런 것에 대해 항상 의식하면서 살아가시는구나 하는 것을 강하게 느꼈던 경험이었습니다."

신문사 퇴사 후에도 현대사와 동아시아 평화를 주제로 여러 저술활동을 해 온 김 이사장은 기자출신이 다룰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을 계속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조천현]
신문사 퇴사 후에도 현대사와 동아시아 평화를 주제로 여러 저술활동을 해 온 김 이사장은 기자출신이 다룰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을 계속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조천현]

김 이사장은 처음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 상까지 받으면 진짜 욕먹는다는 생각도 들었고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당연히 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역대 수상자의 면면을 보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했다.

앞서 '조용수언론상 심사위원회'는 <경향신문>기자룰 거쳐 <한겨레> 도쿄 특파원, 편집국장, 편집인, 대기자를 역임한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을 '2025년 제7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도쿄 특파원 재직시 일본 교포사회에서 활발한 민족화해 움직임과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 우경화 문제에 대해 심층 보도를 했으며, 취재현장에서 대기자로 활동하던 2007년 무렵부터 2012년 다니던 신문사를 퇴사한 이후 본격적으로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2020), 『조국이 버린 사람들』(2015), 『간도 특설대』(2014), 『역사가에게 묻다』(20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2009) 등 한국 현대사와 동아시아 평화를 주제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 온 것도 민족문제를 강조해 온 <민족일보>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신문사를 그만둬야 할 무렵, 무언가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고 했다. 남들이 다 쓴 걸 할 수는 없고 역사학자들이 오래 연구해 온 일들을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할 일도 아니었다. 미국이나 일본의 기자들의 경우를 보면 신뢰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을 남긴 이들이 있어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엔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는데, 요즘엔 그저 떠밀려서 차장하고 부장하다보면 기사도 안쓰고 그러다 신문사를 그만두면 여기저기 자리 알아보러 다니고, 대선 캠프라도 기웃거리다가 한 자리 하게 되는 일들이 많아 그런 걸 비꼬는 칼럼을 많이 썼는데, 그러다보니 자신은 그럴 수가 없게 되어 책을 쓰게되었노라는 겸양도 덧붙였다. 

김 이사장은 창간 25주년을 맞는 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민족의 장래,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진로에 대해 설득력있는 메시지를 계속 전해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진-조천현]
김 이사장은 창간 25주년을 맞는 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민족의 장래,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진로에 대해 설득력있는 메시지를 계속 전해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진-조천현]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 블랭킷판(대판) 4면으로 창간호를 발간한 뒤 그해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계엄사령부에 의해 사흘 뒤 폐간되었으니, 지령(紙齡) 92호로 막을 내린 그 운명은 그해 12월 21일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집행을 끝으로 한동안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권고로 진행된 재심을 통해 '반국가단체 찬양'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47년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심결정 한해 전인 2007년 11월 <통일뉴스>는 <민족일보>의 얼을 이어받아 '민족정론지'로 자리매김할 것을 다짐하고 복간운동을 하던 <민족일보>의 영인본을 전달받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올해 창간 25주년을 맞이한 <통일뉴스>에 대해 "지지기반도 취약하고 안팎의 공격도 많은 가운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면서 그 일을 끌고 왔다는데 대해서 우선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격려했다.

또 "갈수록 남북관계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희한한 꼴로 전개되고 있는데, 그런 속에서 <통일 뉴스>가 단순히 구호나 전달하는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장래,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무언가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계속 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자기 주장만 떠벌리는 유튜버나 일사불란하게 딱 성채처럼 굳어져서 보수적인 메시지만 전하는 그런 언론과 달리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진로에 대해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노력을 계속 해달라"는 것.

새로운 시각, 새로운 방향이 핵심이었다.

김 이사장은 여전히 가슴은 설레지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말했다. 또 어떤 내용으로 구호를 채워야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요구했다. [사진-조천현]
김 이사장은 여전히 가슴은 설레지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말했다. 또 어떤 내용으로 구호를 채워야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요구했다. [사진-조천현]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 64년이 지났지만  <민족일보>의 사시(社是)는 여전히 유효하고 기어코 실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민족일보> 발행 당시 신생 매체로서 가판 1위를 한 것은 4.19혁명 직후의 뜨거운 열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당시 신문의 논조와 내용이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확실한 지지를 얻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현재 남북관계나 분단 극복의 과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거듭 충고했다.

들으면 여전히 가슴은 설레지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지났고, 그 내용을 어떻게 채워야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 시대라고 짚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북 체제에 대해 본격적인 비판을 삼가했던 진보세력의 태도, 낙원을 꿈꾸었던 동독의 양심적인 세력들이 통일의 과정속에 겪은 혼란과 어려움, 어차피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하지만 당장 통일은 커녕 교류 자체가 어려워진 상황에 대해 하나하나 따지고 평가했다. 

또 3년간의 일본 특파원 생활 중 겪은 총련의 위축된 실태, 한국 정부의 검열, 부패한 현지 정보활동과 범민련 3자회담 활동의 내막 등에 대해서도 띄엄띄엄,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너무 실망스러운 답변만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으나 그 자체가 이미 오래된, 새로운 고민의 방향을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김 이사장은 조용수 사장의 고등학교, 대학교 2년 후배이면서 핵심 참모로 일했던 손성조라는 인물이 일본으로 도피한 뒤 1965년 도쿄에서 출간한 『망명기 한국통일운동가의 기록』에 주목하면서, 늦었지만 <통일뉴스>가 국내에 소개하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민족일보> 사건의 막전 막후에 벌어진 일들을 이영근이 발행하던 <통일조선신문>에 연재하다 소책자로 출간한 것인데, 조용수 사장이 5.16 쿠데타를 미국 CIA의 짓으로 간파했으며 일시 피신하면서도 신문 발행은 계속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을 비롯해 피신처인 '장군댁'의 주인이 '최덕신'이었다는 등의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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