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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김건희가 비상계엄에 연루돼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박세열 칼럼] 윤석열의 '패밀리 비즈니스'에서 빠진 김건희?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5.12.20. 08:42:04

 

1961년 5월이 되자 박정희의 신당동 집에는 군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정보기관도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었다. 5월 15일, 김종필은 군복을 입고 신당동 처삼촌(박정희) 댁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만삭의 부인에게 "내가 이 거사에서 죽더라도 그놈(자식)만은 잘 키워주시라"고 말했다.

 

박정희와 장태화, 김종필 등 쿠데타 주역들은 혁명 채비를 했다. 육영수는 비장한 각오로 부하 군인들과 집을 나서는 박정희에게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라고 말한다. 박정희는 묶던 군화 끈을 풀고 박근혜의 그림 숙제를 도와줬다. 육영수는 박정희에게 권총을 꺼내줬고, 박정희는 현관을 나서면서 육영수에게 "내일 아침 5시 라디오를 들어보오"라고 말했다. 육영수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성공하기를 바랐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11일, 쿠데타를 하루 앞두고 네 아이를 불러모았다.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는 너희를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부인 이순자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장남인 전재국은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하시는 일이면 소신 있게 해나가십시오. 저희는 아버지를 믿고 신뢰합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이순자에게 그날 밤 잠자리에서 "모든 일은 하늘에 맡깁시다. 사심 없이 하는 일이니 하늘의 보살핌이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순자는 남편의 쿠데타를 알고 있었다.

 

군인들이 신당동 사택을 뻔질나게 오가는 가운데, 남편과 그의 부하들이 무슨 모의를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육영수는 그 와중에 자녀의 숙제 걱정을 했다. 그의 걱정은 쿠데타 이후에도 꾸려갈 육아와 같은 일상적 삶이었다.

 

이순자는 남편이 쿠데타를 저지르고 있는 동안에 늦깎이로 입학한 자신의 대학 공부에 지장이 생길까 걱정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고문당하고 두드려 맞고 있는 와중에 이순자는 "느닷없는 10·26 사건으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나는 왜 이렇게 공부 운이 없나' 싶어 거의 울기 직전의 심정이었다. 실의에 빠진 나를 구원해준 건 남편이었다. 아예 외국어대 영어학과에 편입시험을 쳐 원 없이 공부에 몰두해보라고 하더라"고 회상했다. 우린 사회적 공감 능력이 없는 상태를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한다.

 

박정희,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부인과 교감을 나눴다. 그 부인은 남편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대통령 영부인이 됐다. 윤석열의 말대로 "선거(정치)는 패밀리 비즈니스"였다. 부일장학회를 탈취해 만든 정수장학회(박정희의 정, 육역수의 수를 딴 이름)에는 그들의 '공동 통치' 철학이 녹아들어 있었다. 이순자는 남편 전두환과 함께 만든 엄청난 재산으로 평생을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았다.

 

내란특검이 윤석열 정부의 실질적 V0인 김건희에 대해 "김건희의 비상계엄 관여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비상 계엄을 선포한 이후 "김건희와 윤석열이 심하게 싸웠고, 김건희가 되게 분노하고 '생각하고 있는 게 많았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특검은 윤석열이 김건희마저 배제시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봤다. 김건희의 '사법 리스크' 그 자체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김건희의 '사법 리스크'가 자신의 권력에 위해를 가하는 걸 차단하려 했다고 봤다.

 

법을 집행하는 특검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상식적으로 김건희가 어떤 방식으로든 계엄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법은 거미줄과 같은 것이다. 거미줄은 날파리나 작은 벌레들을 잡을 수 있지만, 새는 거미줄을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법은 후불제다.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할 때 법은 무력했다.

 

계엄 이후에야 비로소 법은 힘을 발휘한다. 김건희가 비리를 저지를 때 법은 무력했지만, 윤석열 탄핵 이후에야 비로소 힘을 발휘했다.

 

우린 김건희가 자신의 보좌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윤석열을 '너'라고 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건희는 대통령의 위에 있다. 대통령의 상관이다. 무려 2023년 10월부터 준비한 계엄, 아니 그 이전부터 '비상 대권' 운운하며 길길이 날뛰던 그가 친위 쿠데타를 구상했음을 김건희가 몰랐다는 게 상식적일까? 아마 그것이 내란죄 구성 요건에 해당하지 않을 뿐이고, 내란죄 구성 요건을 충족시킬 증거가 없었을 뿐일 것이다. 이순자가 전두환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검찰이 그를 내란죄로 단죄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이다.

 

계엄을 선포한 그 날, 유독 김건희는 윤석열에게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 아주 희한한 일이다. 마치 계엄날 김건희라는 인물이 스스로 사라져버리는 걸로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는 남편과 대통령실 보좌진들과 모든 연락을 딱 끊었다. 평소 새벽까지 남편의 휴대전화와 메신저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리던 김건희가, 다른 일도 아니고 '비상계엄' 상황인데 남편과 소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만들어낸 '알리바이'일까?

 

윤석열의 계엄은 두 가지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사적 감정과 보복심. 그리고 그 결과로서 바란 것은 공적 권력의 독점이고 그 권력 독점은 '패밀리 비즈니스' 차원이었을 것이다. 이는 역대의 쿠데타가 말해주는 것이다.

 

계엄 선포 한 달여 전인 작년 11월 9일 국방부 장관 공관에서 열린 저녁 식사 자리에서 윤석열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만취한 상태"에서 이진우 육군 수도방위사령관에게 한동훈을 언급하며 "내가 살면서 보면 배신을 당한다"고 말했다. 한동훈이 법무부장관 시절 김건희 사건을 처리하지 않아 그를 당 비대위원장으로 내보냈다는 주장에 신뢰를 보태준다. 윤석열과 김건희는 한동훈 후임 법무부장관을 심부름꾼처럼 수시로 연락해 검찰을 주물렀다. 핵심은 '김건희를 무혐의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윤석열은 분노와 복수의 심정으로 계엄을 준비했다. 특히 한동훈을 두고는 정치의 가장 밑바닥 언어를 동원했다. 윤석열 표현대로 한동훈이 "빨갱이"라면, 평생 윤석열 밑에서 수사하던 엘리트 검사가 '공산주의자'였단 말인가. 김건희에게 디올백을 건넨 최재영 목사는 왜 '수거 대상'에 포함돼 있어야 했을까.

 

역사를 기록할 때 우린 항상 같은 고민에 빠진다. 사적인 감정이 공적인 역사를 어떻게 뒤틀 수 있는지, 공적인 결정은 어떻게 사적인 일화들에 휘둘리는지. 1979년 박정희 시해를 다룬 두 개의 영화가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블랙코미디였고, <남산의 부장들>은 느와르에 가까운 역사물이다. 윤석열 정권은 나중에 어떻게 재현될 지, 그건 예술가와 역사가들의 몫이 될 것이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 있다. 윤석열 정권을 다룬 영화가 있다면 그 주인공은 아마 김건희일 것이다. 거미줄 같은 연약한 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역사와 예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김건희가 몰랐다? 아마 아무도 그걸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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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전 코바나 대표. ⓒ대통령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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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기자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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